2014/12/04

국궁장에서 만난 교수님

처음 사대에 서서 활을 쏘았다. 다섯 발을 한 순이라고 하고 한 순을 쏴서 그중 한 발을 과녁에 맞추는 것을 일중이라고 한다(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는 145m). 입회한지 석 달 만에 일중을 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어떤 할아버지가 나의 직업을 물었다.

할아버지: “자네 직업이 뭔가?”
나: “대학원생입니다.”
할아버지: “전공이 어떻게 되나?”
나: “철학과입니다.”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탄식. “아...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는 건데...”

탄식과 함께 맹자의 한 구절을 내뱉은 그 분은 모 사립대 중문과 교수였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졌다고 하셨다. 나는 그 동안 그분이 그냥 동네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교수님은 나보고 일중했으니 술 한 잔 하자고 하셨다. 나는 교수님께 만 원을 받아서 국궁장 밑에 있는 가게에 가서 술을 사왔다. 막걸리 두 병을 사와서 마셨다.

평소에 그 분은 근육 이야기, 체력 이야기 정도를 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생인 것을 알자 학교 이야기를 하셨다. 피를 토하듯 울분을 토해내셨다.

“내가 올해 나이가 63살이야. 연구년인데 실적을 내래. 기껏 단행본을 냈더니 이 ㄱㅅㄲ들이 단행본은 실적에 안 들어간다고 논문을 써내라는 거야! 내일 모레 정년인데 이게 뭐야! 학과장이 후배인데 그놈한테 말하니까 그놈이 일단 잘 말해놓을 테니까 빨리 논문을 쓰래. 6개월이면 논문 서너 편은 쓰지. 그런데 이게 뭐야. 아오, 정말.”

막걸리 한 병씩 마시고 나서, 나와 교수님은 다시 사대에 섰다. 교수님이 쏜 화살은 과녁에 맞지 않았고, 나는 내가 놓은 활시위에 제대로 맞아 팔뚝에 피멍이 들었다. 교수님이 흐트러진 것은 마음이었고, 내가 흐트러진 것은 자세였다.


(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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