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대에 서서 활을 쏘았다. 다섯 발을 한 순이라고 하고 한 순을 쏴서 그중 한 발을 과녁에 맞추는 것을 일중이라고 한다(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는 145m). 입회한지 석 달 만에 일중을 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어떤 할아버지가 나의 직업을 물었다.
할아버지: “자네 직업이 뭔가?”
나: “대학원생입니다.”
할아버지: “전공이 어떻게 되나?”
나: “철학과입니다.”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탄식. “아...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는 건데...”
탄식과 함께 맹자의 한 구절을 내뱉은 그 분은 모 사립대 중문과 교수였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졌다고 하셨다. 나는 그 동안 그분이 그냥 동네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교수님은 나보고 일중했으니 술 한 잔 하자고 하셨다. 나는 교수님께 만 원을 받아서 국궁장 밑에 있는 가게에 가서 술을 사왔다. 막걸리 두 병을 사와서 마셨다.
평소에 그 분은 근육 이야기, 체력 이야기 정도를 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생인 것을 알자 학교 이야기를 하셨다. 피를 토하듯 울분을 토해내셨다.
“내가 올해 나이가 63살이야. 연구년인데 실적을 내래. 기껏 단행본을 냈더니 이 ㄱㅅㄲ들이 단행본은 실적에 안 들어간다고 논문을 써내라는 거야! 내일 모레 정년인데 이게 뭐야! 학과장이 후배인데 그놈한테 말하니까 그놈이 일단 잘 말해놓을 테니까 빨리 논문을 쓰래. 6개월이면 논문 서너 편은 쓰지. 그런데 이게 뭐야. 아오, 정말.”
막걸리 한 병씩 마시고 나서, 나와 교수님은 다시 사대에 섰다. 교수님이 쏜 화살은 과녁에 맞지 않았고, 나는 내가 놓은 활시위에 제대로 맞아 팔뚝에 피멍이 들었다. 교수님이 흐트러진 것은 마음이었고, 내가 흐트러진 것은 자세였다.
(2014.05.27.)
2014/12/04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어머니의 심리상담 소견서
나의 어머니는 작년 11월부터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옆집에서 나를 무고하여 8월과 10월, 두 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고, 이후 무고 건과 스토킹 건 모두 검찰에 송치되었다(무고 건은 경찰에서 불송치했으나 고소인들의 이의제기로 강제송치되었다), 11월...
-
<죽으면 되는 것이다> 짤은 『고우영 십팔사략』 10권 96쪽에 나온다.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송으로 이어지는 5대 10국 시대에서 후한이 망할 때 풍도가 유빈을 죽인 일을 만화로 그린 것이다. 907년 주전충이 당을 멸망시키고 후...
-
누군가 잘 나간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그에게 “문화 권력”이라는 수식어가 들러붙는다. “권력”이라는 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말하는데 “문화 권력”이라고 불리는 건 그냥 그 사람이 요새 잘 나간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용...
-
Jonathan Schaffer: Beyond Fundamentality (Metaphysics: Royal Institute of Philosophy London Lecture Series 2016) ( www.youtube.com/watch?v=6...
-
■ 1획 (6개) (001) 一 한 일 (002) 丨 뚫을 곤 (003) 丶 불똥 주・점 (004) 丿 삐침 별 (005) 乙 새 을 / ⺃ (새을 방) (006) 亅 갈고리 궐 ■ 2획 (23개) (0...
-
99. 耽讀翫市 寓目囊箱 저자[의 서점]에서 글 읽기를 즐기니, 눈에 스쳐도 주머니나 상자에 넣듯이 했다. * 이 구절은 후한 시대 왕충이 글 읽기를 좋아했지만 집이 가난하여 책 살 돈이 없어서 낙양 저자에 있는 책방에 가서 진열된 책을 읽었다는 ...
-
60세 이후의 유시민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기는 있었으나, 올해 66세인 유시민의 최근 활동을 보면서 경각심이 들어서 며칠 전부터 뇌 영양제를 먹고 있다. 종근당의 <포스파티딜세린 앤 징코> 30일분 두 통을 약 6만 원에 주문했다. 한 통...
-
[ Karl Popper (2002),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 2nd ed. (Routledge), pp. 74-94. Karl Popper (1959), The Logic of scientific disc...
-
Sylvie Vartan - La Maritza ( www.youtube.com/watch?v=Mdu0MZwJCRo ) (2026.07.26.)
-
[ Ch7. Crisis and the Emergence of Scientific Theories, pp.66-76 3판 ] [pp.66-67] 148-149 - 6장에서,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발견하는 것은 패러다임 변화...
-
유튜브 채널 <크로커다일 남자훈련소>에 1980-90년대 공안 사건을 설명하면서 586을 비판하는 동영상이 시리즈로 올라온다. 그런데 그런 동영상 밑에 뜬금없이 “너 친중이냐?”고 하는 댓글이 자꾸 달린다고 한다.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