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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3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겠다는 오바마와 목자가 되겠다는 박근혜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난 후 형제를 낳았다. 형인 카인은 농부가 되었고 동생인 아벨은 목동이 되었다. 둘 다 신에게 제물을 바쳤는데 신은 아벨의 제물은 반겼지만 카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다. 화가 난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신이 카인에게 물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카인은 대답했다. “저는 모릅니다. 제가 제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까?(I don't know, Am I my brother's keeper?)”
   
오바마는 이 물음에 다르게 대답했다. 그는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I am my brother's keeper)”라고 했다. 2004년 7월에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시 상원의원인 오바마는 기조연설을 했다.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것은 저에게 중요합니다.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If there's a child on the south side of Chicago who can't read, that matters to me, even if it's not my child.)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있고 그분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제 삶을 가난하게 만듭니다. 그 할머니가 제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If there's a senior citizen somewhere who can't pay for their prescription and having to choose between medicine and the rent, that makes my life poorer, even if it's not my grandparent.)
   
어떤 아랍계 미국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제 시민권을 침해해한 것입니다. (If there's an Arab-American family being rounded up without benefit of an attorney or due process, that threatens my civil liberties.)
    
저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저는 제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It is that fundamental belief -- I am my brother's keeper, I am my sisters' keeper -- that makes this country work.)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개인적인 꿈을 추구하지만 하나의 미국이란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다수로부터 하나로 말입니다. (It's what allows us to pursue our individual dreams, yet still come together as a single American family: "E pluribus unum," out of many, one.)”
  
나는 지금까지 3-4년 간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복음서에 나오는 말이 좋은 말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오바마의 연설문을 읽으니 가슴을 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자신의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며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것은 카인의 후예가 카인과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박근혜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으로 대한민국의 희망의 새 시대를 열어 갈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은 미국이 아니니까 한국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의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또 상당수의 한국인은 자신을 화끈하게 영도해줄 반인반신인 지도자를 원하기도 하니 박근혜의 생각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비난만 하기도 어렵다. 박정희가 한국에 걸맞는 민주주의를 주창했던 것처럼, 어쩌면 박근혜는 한국에 걸맞는 지도자 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양을 이끄는 목자는, 적어도 양보다 똑똑해야 하지 않을까?
   
   
* 링크1: [Weekly BIZ] [지식콘서트] "저는 제 동생을 지키는 자" 군중 울린 오바마
   
* 링크2: Transcript: Illinois Senate Candidate Barack Obama
   
* 링크3: 朴대통령 “양떼 돌보는 목자 마음으로 희망의 새 시대 열 것”
   
   
(2015.03.13.)
   

2014/12/21

우리 집안의 비밀

  
성묘를 했다. 모두들 절을 하고 나서 할아버지들이 비석을 보며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한 할아버지는 비석을 가리키며 “이거 100년은 넘었을 걸?”이라고 말씀하셨다. 
  
비석 뒷면을 보았다. “개국 539년”이라고 써있었다. 조선 개국이 1392년이니 그 비석은 1931년에 만든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말하자 몇몇 할아버지들이 동요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알아차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쇼와 몇 년 이렇게는 안 썼네요. 일제시대인데도 조선 개국을 기준으로 했어요.”
  
할아버지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한 할아버지는 “아유, 그때 왜놈들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어 그래. 내가 쇼와 11년생이야”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들이 비석 앞면에 “통정대부”라고 쓰인 글자를 가리키며 “통정대부가 뭐지?”라고 할 때, 나는 차마 “그거 나라에 돈 주고 벼슬을 샀다는 겁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100년 전 나의 조상은 나와 달리 부자였다.
  
  
(2014.09.08.)
  

2014/12/20

무엇을 배우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배우느냐다

  
과외 때문에 <Grammar in Use>를 조금 읽었다. <Grammar in Use>나 <성문영어>, <맨투맨>이나 다루는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설명방식은 정반대다. 인칭대명사 같은 것을 설명할 때, <성문영어>나 <맨투맨>은 표 하나로 정리한 것을 먼저 보여준 다음 용례를 보여준다. 반면 <Grammar in Use>는 용례를 먼저 보여주고 나서 맨 마지막에 표 하나로 정리한다.
 
어디서 들은 건데, 외국 중학교에서 과학시간에 암석 분류 가르치는 방법은 한국에서 가르치는 방법과 다르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화산암, 퇴적암, 변성암을 구분해놓고 표로 만들어서 외우게 하는데, 외국에서는 여러 돌멩이들이 각각 어떻게 다른지 설명한 후 공통점이 있는 돌멩이끼리 모은 다음 화산암, 퇴적암, 변성암을 구분한다고 한다.

두 사례 모두 한국 방식이든 외국 방식이든 배우는 내용은 똑같다.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가르치는 방식이다. 결론을 보여주고 외울 것을 정해주느냐, 현상을 나열해놓고 추론적 사고를 거쳐 결론 내리는 것을 보여주느냐, 이 차이다.

한국의 중등 교육의 문제점이 주입식 교육이라는 비판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뀐 이후부터는 주입식 교육만 가지고는 수능을 풀 수가 없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선 학교에서는 주입식 교육이 이루어지냐는 점이다. 이것은 교사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 교육체계와 여러 가지 구린 것이 엉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등 교육의 문제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주입식 교육이다. 대학입시가 온 국민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중등교육의 문제는 사회쟁점이 되지만, 대학교육의 문제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가 아니라 어느 직장에 들어가 얼마를 버느냐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본 것은 어떤 학부수업의 과제물이었다. 책을 읽고 정해진 부분의 논증을 파악해서 제출하는 과제였다. 그 수업을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과제만 보고서도 어떻게 수업이 진행될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교양수업에서 이렇게 하는 것도 가능 하구나’ 싶었다. 적어도 그 수업은, 교수가 책을 요약해주는, 수업을 들으나 책 몇 권 읽으나 별 차이 안 나는 그런 수업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동안 나는 교양수업이라는 게, 책 내용을 적당히 읽어주는 것을 수업이라 하고, 그런 수업내용을 대충 외워서 쓰는 것을 시험이라 하고, 누가 누가 무절제한 상상력을 발휘하나 경합을 벌이는 것을 과제 또는 토론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나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이런 방식의 수업에서는 매 수업시간마다 과제물이 부여될 수밖에 없다. 학생은 그 과제를 다 해야 하고 교수도 그 과제를 다 채점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학생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교수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학생에게는 학자금 지원이 필요하고 교수에게는 행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이것을 중등교육에 적용하면 어떨까.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몇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제대로 가르치고 그에 맞게 과제를 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제 하느라 사교육 받을 시간이 없을 것이니까 사교육으로 인한 문제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물론 숙제를 대신 해주는 사교육이 등장할 수도 있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그렇다면 한국의 중등교육의 문제는 교사 수를 늘리고 행정인력을 배치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는 해결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학부모가 찡찡대도 무시할 수 있는 교권을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여건을 마련해준 틈을 타서 놀고 있는 교사를 조질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한 줄 요약: 한국의 중등교육의 문제와 고등교육의 문제는 발생 원인은 다르지만 문제점과 해결책은 똑같다.


(2014.10.09.)
   
  

2014/12/14

예전에 했던 일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서 피자를 먹었다. 동생은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예전 일을 꺼냈다.
  
(1) 동생이 중학교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했을 때의 일이다. 동생은 선거 벽보 2부를 만들어야 했고 어떻게 만들지 나한테 물어봤다. 동생에 따르면,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동생에게 두 가지 벽보를 제안했다고 한다. 하나는 4절 색지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느낌표를 그리고 그 밑에 “느낌이 오는 후보, 기호 2번 김OO”라고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4절 색지 한가운데 커다랗게 물음표를 그리고 그 밑에 “항상 고민하는 후보, 기호 2번 김OO”이라고 쓰는 것이라고 했다. 후보 사진도 붙이지 말고 공약도 쓰지 말고 딱 그렇게만 하라고 했다고 한다.
  
동생은 내가 말한 그대로 했고, 그 다음날 선생님한테 매우 심하게 혼났다고 한다. 당시 학생회장 선거 벽보는 4절 색지에 후보 사진을 붙이고 공약을 쓰는 게 관례였는데, 선거 벽보라고 가져온 것이 그랬으니 화를 냈나 보다. 나는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나가는 선거가 아니라서 되는대로 말했던 모양이다.
  
(2) 초등학교 방학 숙제와 관련된 일이다. 동생과 나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내 동생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방학숙제로 관찰일기를 쓰라고 하자, 나는 동생을 관찰해서 관찰일기를 써냈다고 한다. 그 당시 학교에서 관찰일기를 쓰라고만 하고 관찰대상은 제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2014.09.28.)

  

동양철학과 조선시대 펠리칸 멸종사

  
학부 때 동양철학 교수 중에 희한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서양 철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동양 철학은 이렇고 서양 철학은 저렇다면서 성급한 일반화를 한 다음, 현대 사회의 문제는 서양 철학의 산물이고 그 대안이 동양 철학이라는 굉장히 거대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꼭 예로 들었다. 이게 서양철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수업 중에 교수가 나에게 의견을 묻길래, 이렇게 답했다.
  
“<사기>에 따르면, 진나라의 백기는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산 채로 파묻었고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 군사 30만 명을 산 채로 파묻었고 합니다. 저는 근대 이전 유럽사에서 단일 전투에서 이렇게 대량학살을 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 펠리컨이 살았다는 것도 놀랍고 그걸 조선 사람들이 멸종시켰다는 것은 더 놀랍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연과 일체감을 느껴서 자연을 보호했고 근대 유럽인들은 그렇지 않아서 환경을 파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둘의 차이는 사상의 차이가 아니라 생산력의 차이다.
  
  
* 링크: 조선시대 펠리칸 멸종사
  
  
(2014.09.23.)
  

2014/12/07

연구윤리 수업을 다르게 해보자 (타짜 버전)

 
수의학과를 비롯한 몇몇 학과에서는 연구윤리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 황우석이 수의학과 교수였고 그 여파로 연구윤리 수업이 생겼다고 한다. 내 룸메이트 말에 따르면 그 수업은 정말 재미없고 별 내용도 없다고 하는데, 이왕 하는 거 조금 재미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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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독백) “싸늘하다. 지도교수의 한 마디가 가슴에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편집 속도는 연구 속도보다 빠르니까. 외국 논문에서 한 단락, 국내 논문에서 한 단락, 내가 쓴 거 한 단락, 외국 논문에서 한 단락, 다시 국내 논문에서 한 단락...”

논문심사위원: “동작 그만, 첫 논문부터 표절이냐?”

학생: “무슨 말씀입니까?”

논문심사위원: “국문초록만 늬 손으로 썼지, 교수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학생: “증거 있으십니까?”

논문심사위원: “증거? 증거 있지. 너는 구글 스칼라에서 자료를 찾았을 것이여. 그리고 이거 이거 주술 호응 안 맞고 내용 전개도 뜬금없고 인용부호 없는 문장, 이거 외국 논문에서 그냥 따온 거 아니여? 자, 모두들 보쇼. 어디서 적당히 대충 긁어 와서 석사과정을 끝내겠다 이거 아니여?”

학생: “상상력이 풍부하십니다, 교수님.”

옆 교수: “저기 김 선생, 그 표절 확인하는 프로그램에 넣고 돌려봐.”

논문심사위원: “논문 건들지 마, 손모가지 날라가분께. 해머 갖고 와!”

학생: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논문심사위원: “표절하다 걸리면 피 보는 거 지도교수한테 안 배웠냐?”

<<표절에 대해 알아봅시다.>>


(2014.09.02.)

박경철의 <자기혁명> 비판

동료 대학원생이 박경철의 <자기혁명>을 읽길래 무슨 말이 나오나 몇 쪽 읽어보았다. 박경철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선 그 책은 제목과 달리,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것만 잔뜩 써놨다. 그 책을 읽으니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 술술 들리는듯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온곡 (온곡) 초등학교 (초등학교) 어린이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박경철이 그 책에서 말한 게 자기혁명이라면 내가 보았던 교장선생님들은 혁명가일 것이다.

그 별거 아닌 내용을 풀어내는 방식도 정말 별로였다. 마치 책 많이 읽은 중학교 2학년 학생의 글 같았다. 한 줄로 끝낼 말을 이상한 수사를 덧붙여서 2쪽에 걸쳐 써놨는데, 보통 그런 것은 글을 안 써본 사람들이 많이 한다. 그런 사람들은 글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떤 멋있는 단어를 쓸지 누구의 명언을 인용할지를 더 고민하는 경향이 있다. 책표지에는 박경철이 대단한 독서가네 어쩌네 써있는데, 어쩌면 책이라는 게 사람을 크게 바꾸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김난도 책도 150만부가 팔리는 판이라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 안철수가 대선 후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석연치 않다. 박경철과 그의 친구 안철수는 전국을 돌며 토크콘서트를 했고 그게 안철수가 대선후보가 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런데 그 토크콘서트의 내용이라는 것이 <자기혁명>에 나오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면, 한국은 후진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나라가 개판이면 그런 별 거 아닌 거에 현혹되겠나.

말기 증상 중 하나는 사람들이 별거 아닌 거에 현혹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나라 말에 장각은 “나한테 쌀 다섯 말만 가져오면 병을 낫게 해주지. 그런데 병이 안 나으면 네가 나를 안 믿어서 그런 거야”라고 했다. 나라가 멀쩡하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안 나올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이 나타나도 사람들은 외면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먹힌다는 것은 그만큼 한나라가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얼마나 개판이면 사람들이 평생 정치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을까. 아, 그러고 보니 2002년에는 정몽준이 있었네.


(2014.07.29.)

2014/12/05

문제는 독서량이 아니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도서관의 대출도서 순위를 밝히는 기사는 1년에 한 번씩 꼭 나온다. 서울대 도서관 대출 1위가 『해리포터』라는 기사가 나오면, 요즘 젊은 학생들이 교양서적을 안 읽는다는 둥 온갖 걱정을 하는 칼럼이 따라 나온다.
  
도서관에서 대출한다는 건 그 책을 돈 주고 사서 읽지 않는다는 거다. 학생들이 할 일이 없어서 『해리포터』나 읽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건지, 교양서적은 돈 주고 사서 읽고 『해리포터』는 그러기에 돈이 아까워서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 건지, 하도 학과공부에 치이다가 어쩌다가 『해리포터』 읽는 건데 2만 명이 빌리는 거라 집계에 그렇게 잡힌 건지 알 방법이 없다. 학생들의 독서 습관을 진단하려면 어떤 책을 읽는지를 조사해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 받은 것을 적당히 기사로 만들어서 내보내는 것이다.
  
신문에 가끔씩 한국 사람들 책 안 읽는다, 책 좀 읽어라 하는 기사가 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1인당 연간 독서량을 중심으로 나라별로 비교를 하는데, 과연 그게 적절한 비교일까. 그들이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 모른 채로 1년에 책 몇 권 읽는 거 비교하는 게 그렇게 유의미한 비교일까. 가령, 이지성이 쓴 책을 읽은 것을 연간 독서량에 넣는 것은 유의미한가.
  
한국인 1인당 연간 독서량 관련된 기사에는 평균만 나와 있지 표준 편차가 얼마인지도 나오지 않는다. 상위 10%와 상위 50%의 독서량 차이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어떤 책을 읽는지도 알 수가 없다.
  
기사는 독서를 안 해서 국가경쟁력, 기업경쟁력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한다. 괜한 걱정이다. 이전 세대라고 해서 그렇게 독서량이 많다거나 지적으로 성숙했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몇몇 어른들은 “옛날에는 책을 읽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 하는데, 막상 만나보면 대학원생 빼고 교수 빼고 학부 졸업한 사람들만 놓고 볼 때 어른들과 젊은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어른들보다 젊은 사람이 나은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지식의 격차다. 과학고 출신에게 들으니, 요즘 어떤 과학고에서는 원서로 분석철학 서적을 읽는다고 한다. 웬만한 영어 책은 문제없이 읽으니 교재로 쓰는 영어 책의 난이도를 높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 과학고 학생들의 독서 수준은 서울 시내 웬만한 대학의 학부생보다 높은 것이며 나처럼 엉성한 대학원생보다도 높다. 이런 차이는 대학 사이에도 나타나고 직업군 사이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 그 차이는 재능의 차이 뿐 아니라 빈부격차나 생활환경도 반영한다.
  
기사에서 아무리 “책 읽어라, 안 읽으면 나라 망한다”고 겁을 줘도 책을 안 읽던 사람들은 책을 안 읽을 것이며 10년 후에 재앙이 벌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독서량 상위 20%와 하위 20%의 삶의 배경을 취재한다면 조금 더 설득력 있는 기사가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당분간 한국 언론에서 그런 기사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 링크: [머니투데이] 무식한 대한민국… “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2014.07.26.) 
  

세월호와 나사로

  
예배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세월호 참사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국민들이 미개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왜 돈 없는 애들이 제주도로 여행을 갔냐고 했습니다. 이 말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생각해봐야 할 점은 이 말이 그 와중에 해야 하는 말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말은 잘못된 말이지만, 설사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이 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면 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사람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천국 갔는데 왜 우느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순히 육체만 인간인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완전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똑같이 기뻐하시고 똑같이 슬퍼하시고 똑같이 아파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아멘.”
  
목사님 말씀을 듣고 생각난 것은 예전에 방송에서 김용민이 말했던, 김어준의 일화였다.
  
김어준이 장례식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장례식장에서 예배를 하는데 유족들이 우니까 목사가 역정을 내더란다. “울지 마세요, 울지마! OOO 성도가 천국에 갔는데, 이렇게 기쁜데 왜 웁니까. 울지 마요!” 그 말을 듣고 김어준은 이 목사에게 가만히 다가가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뭐라고, 이 ㅆㅂ놈아?”
  
  
(2014.06.09.)
   

2014/12/04

국궁장에서 만난 교수님

처음 사대에 서서 활을 쏘았다. 다섯 발을 한 순이라고 하고 한 순을 쏴서 그중 한 발을 과녁에 맞추는 것을 일중이라고 한다(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는 145m). 입회한지 석 달 만에 일중을 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어떤 할아버지가 나의 직업을 물었다.

할아버지: “자네 직업이 뭔가?”
나: “대학원생입니다.”
할아버지: “전공이 어떻게 되나?”
나: “철학과입니다.”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탄식. “아...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는 건데...”

탄식과 함께 맹자의 한 구절을 내뱉은 그 분은 모 사립대 중문과 교수였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졌다고 하셨다. 나는 그 동안 그분이 그냥 동네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교수님은 나보고 일중했으니 술 한 잔 하자고 하셨다. 나는 교수님께 만 원을 받아서 국궁장 밑에 있는 가게에 가서 술을 사왔다. 막걸리 두 병을 사와서 마셨다.

평소에 그 분은 근육 이야기, 체력 이야기 정도를 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생인 것을 알자 학교 이야기를 하셨다. 피를 토하듯 울분을 토해내셨다.

“내가 올해 나이가 63살이야. 연구년인데 실적을 내래. 기껏 단행본을 냈더니 이 ㄱㅅㄲ들이 단행본은 실적에 안 들어간다고 논문을 써내라는 거야! 내일 모레 정년인데 이게 뭐야! 학과장이 후배인데 그놈한테 말하니까 그놈이 일단 잘 말해놓을 테니까 빨리 논문을 쓰래. 6개월이면 논문 서너 편은 쓰지. 그런데 이게 뭐야. 아오, 정말.”

막걸리 한 병씩 마시고 나서, 나와 교수님은 다시 사대에 섰다. 교수님이 쏜 화살은 과녁에 맞지 않았고, 나는 내가 놓은 활시위에 제대로 맞아 팔뚝에 피멍이 들었다. 교수님이 흐트러진 것은 마음이었고, 내가 흐트러진 것은 자세였다.


(2014.05.27.)

중앙대에 철학과가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

  
두산이 중앙대를 인수한 후 중앙대를 명문대로 만들겠다면서 여러 학과를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을 했다. 이에 항의했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했고, 이 학생이 학생회 선거에 나가자 학교는 선거에 개입을 했다. 결국 이 학생은 자퇴서를 냈다. 대학에는 연구 기능과 교육 기능이 있는데, 두산 재단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목 하에 중앙대의 연구기능을 일정 부분 포기했다.
  
내가 이번 학기에 듣는 <과학적 추론의 이해> 수업에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 학생들 외에도 경제학과와 심리학과의 석사과정생도 들어온다. 이들이 들어오는 이유는 모델링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연구에서 모델링이 잘 안 되어서 이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 모델링에 대한 이론적인 기반을 연구하기 위해 이 수업을 듣는다.
  
어떤 학문이든지 연구 수준이 높아지면 메타적인 연구를 할 필요가 생긴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메타적인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사카린 섭취가 방광암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가설이 있다고 하자. 생물학이나 의학 같은 분과학문에서는 둘 사이에 정말 인과관계가 있는지 실험설계를 하고 임의표집을 하고 등등의 과정을 거쳐 결과를 내놓을 것이다. 이 때 메타적인 연구라는 것은 이러한 연구에서 ‘인과적 추론’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묻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학에도 물리학의 철학이 있고, 생물학에도 생물학의 철학이 있고, 경제학에도 경제학의 철학이 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의 연구가 물리학의 주제면서 동시에 철학과 관련된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중앙대에서 철학과를 없앤다는 말은, 이러한 분과학문들의 메타적인 연구를 일정 부분 포기함을 의미한다. 물론 굳이 그런 연구를 안 해도 논문 써서 실적 올리는 데에 큰 지장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앙대에서 자신이 하는 연구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그러한 연구를 할 때 다른 학교 학생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연구기능을 포기한 명문대는 없다. 연구기능을 포기하고 학부생들의 취업률로만 명문대가 될 수 있을까. 두산 재단이 바라는 중앙대가 그러한 학교인지 모르겠다. 두산 재단은 대학교와 직업학교의 차이를 모르는 모양이다.
  
  
(2014.05.08.)
  

천재는 불행한가

  
내가 이번 학기에 수강하거나 청강하는 수업이 다섯인데, 데이비드 루이스는 <한국철학사>를 제외한 내가 듣는 모든 수업에서 언급된다. <과학철학통론1>에서도 나오고, <심리철학연습>에서도 나오고, <물리학의 철학>에서도 나오고, 학부 <언어철학>에서도 나온다. 크립키는 말할 것도 없다.
  
천재를 시샘하는 동료 대학원생은 “천재들은 불행할 것”이라고 하며 위안을 삼는다. 실제로 몇몇 천재들은 불행했다. 루이스는 당뇨로 고생하다 죽었고, 크립키는 부모와 대화가 안 된다면서 의절했고, 소크라테스는 대머리였다.(불쌍한 소크라테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천재도 아니면서 천재들이 겪는 불행을 똑같이 겪는다. 천재 아닌 당뇨 환자, 천재도 아니면서 부모와 의절한 사람, 그냥 대머리도 많다. 천재들은 웬만큼 불행해도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 아참, 그래도 난 천재지?” 하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는데, 천재가 아닌 사람이 불행하면 그냥 불행할 뿐이다. 천재라고 일반인보다 딱히 더 불행한 게 아니다. 사람들이 천재의 불행에 주목하는 것뿐이다.
  
  
(2013.06.05.)
  

한국철학사 - 서경덕, 이황, 이이, 조식 편

  
<한국철학사> 수업에 따르면, 조선 시대 학파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서경덕, 이이, 이황, 조식인데 각각 개성이 독특하다.
  
서경덕은 인생에 별 굴곡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냥 개성에서 태어나서 책 읽고 공부하다 죽는다. 저작도 별로 없다. 황진이를 비롯한 여러 기생들과 친했다.
  
이이는 실제로는 위인전기에 나올 만한 위인이 못 된다. 천재인 건 맞는 것 같은데 그 머리를 공부 쪽으로 안 쓰고 권력 쪽으로 쓴다. 붕당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다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방조하거나 조장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관료가 아닌) 정치가로 보냈고 학문을 한 기간은 비교적 짧다. 그렇지만 그의 학설은 서인의 이론적인 기반이 된다.
  
이황은 기록상으로 보면 똑똑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평생 꾸준히 공부해서 60대에 자기 입장을 가진 학자가 된다. 그가 이룬 학문적인 업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 것이며, 조선 후기가 되면 상대 당파에서도 이황의 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주희에서 이황까지 이어지고 이황에서 이이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물론 이건 다 뻥이다.) 이황은 어떻게 공부했느냐. 그는 열심히 옮겨 적고 요약했다. 자기 관리의 달인이며, 특히 건강 관리와 재산 관리 부문에서 돋보인다.
  
조식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식은 성인 집중력 장애가 아니었을까 싶다. 젊어서 왕한테 상소를 과격하게 써서 죽을 뻔했는데 대신들이 만류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다. 상소 내용이 이런 식이다. “나라가 이미 망했다. 똑바로 헤리. 네가 왕인 건 맞지만 너네 엄마는 그냥 과부인데 왜 설치냐. 너도 따지고 보면 그냥 고아잖아.” 이거 실제 상소에 있는 내용이다.
  
조식은 늙어서도 이 버릇을 못 고친다. 옆 동네 과부가 음녀라는 소문을 듣고는 사실 확인도 안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는 과부의 집을 허물어버린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문이 과부의 오빠가 과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퍼뜨린 헛소문이었다. 하마터면 귀향 갈 뻔 했는데 가까스로 귀향을 면한다.
  
조식에 대한 ㅈ선생님의 평은 이렇다: “조식의 글을 보면 남은 게 악 밖에 없는 사람이 쓴 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식의 글은 논의가 꼼꼼하지 않다. 어쨌든 16세기 영남에서 이황과 함께 양대 축을 이룬다.
  
이 네 명 중 청나라가 편찬한 <사고전서>에 들어간 글은 서경덕의 것뿐이다. 서경덕이 글을 많이 남기지도 않았는데 왜 그의 글만 <사고전서>에 실렸을까. 조선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자적인 연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물론 소옹과 비슷하다는 단서가 붙는다)
  
다른 세 사람과 달리, 서경덕은 개념 자체를 붙들고 혼자서 씨름을 했다. 죽을 때 서경덕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스승이 없어서 젊어서 너무 많이 고생했다. 너희들은 절대로 그러지 마라.”
  
  
(2013.05.21.)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올해 서울대 봄축제 제목은 <지겹지 아니한가 청춘노릇>이다. 축제 행사 중에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면서 만보기를 차고 천 번 흔드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축제 홍보하는 유인물에는 김난도 교수와 혜민 스님을 대놓고 조롱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비꼬는 내용이 있다. 혜민 스님은 멀리 있지만, 김난도 교수는 서울대에 다닌다. 김난도 교수는 그런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고로 어제는 스승의 날.
  
  
(2013.05.16.)
  

이빨이 암탉에게 그러하듯 둥지는 무엇에게 그러한가?


“이빨이 암탉에게 그러하듯 둥지는 무엇에게 그러한가?”
  
뭔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따르면 이것은 슈퍼 아이큐 테스트에 나오는 문제라고 한다. 일반적인 지능검사는 150 만점이라 그 이상의 지능을 측정하지 못한다. 슈퍼 아이큐 테스트는 일반 지능검사에서 만점을 받는 사람들의 지능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얼마 전 겪은 일 때문에 이것이 생각났다.
  
동료 대학원생에게 나는 호두를 심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호두가 뿌리식물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진지하게 내 지식을 의심했다. 나는 호두가 나무에서 열린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호두나무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해서 동료 대학원생에게 그 지식의 출처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동료 대학원생은 엉뚱한 답변을 했다. “호두와 땅콩은 맛이 비슷하니 비슷한 식물 아닌가요?” 추론에 의한 지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치면, 뱀고기 맛은 닭고기와 비슷하다고 하니 뱀은 조류이어야 한다. 그런데 호두맛은 땅콩맛보다 잣맛에 더 비슷하지 않은가? 동료 대학원생은 미각이 비교적 둔한 사람인 것 같다.
  
그는 왜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까. 그의 지능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그는 고등학교에서 한 지능검사애서 최고 상위등급이 나왔다고 한다. 슈퍼 아이큐 테스트의 질문이 정말 신빙성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뿌리가 땅콩에게 그러한 것처럼 호두에게도 그러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던 것이다.
  
지능이 높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패턴 찾는 방식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양적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호두는 나무에서 자란다.
  
  
(2013.03.06.)
  

좆나 열심히 하자

   
학교에서 수첩을 주웠다. 수첩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쓴 손글씨가 써있었다. 여자가 쓴 글씨 같았다.
  
수첩에는 각오를 다지는 문구가 여러 곳에 있었다. 유독 눈에 띠는 문구가 있었다. “좆나 열심히 하자”였다. “존나”도 아니고 “졸라”도 아니고 “좆나”라고 정확하게 쓴 것을 보면, 아마도 수업 주인은 국문학 전공이었나 보다.
  
  
(2013.01.27.)
   

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

   
서점에서 갔다. 『공부는 내 인생에 대한 예의다』라고 하는, 제목부터 재수 없는 책이 있었다. 목차를 살펴보았다. 목차는 제목보다 더 재수 없었다. 몇 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전미(全美) 최고의 고교생이라고?
      나의 경쟁자는 오로지 ‘어제의 나’ 뿐이다
      “그때 너는 분명히 네 한계를 뛰어넘었어!”
      모든 처음은 다 두렵다, 하지만 처음이 없으면 지금도 없다
      일리노이 주를 주름잡은 ‘스타 논객’의 탄생
      배움에 있어 우린 무엇도 두렵지 않다, 예일대 정신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소설’이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을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 책까지 쓰는 것이 적절한 일인가 모르겠다. 하버드만 해도 1년에 1,600명 정도 입학한다고 하는데 그런 학생들이 죄다 책을 쓴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크립키나 퍼트남, 폰 노이만 같은 사람도 20대 초반에 그런 책을 안 썼는데, 대학을 잘 갔다고 자랑하는 책을 쓰는 것이 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책을 쓰는 학생은 그렇다고 치자. 그 학생은 태어나서 최고의 성취를 얻었고, 자기가 속한 집단(고등학교)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와 같은 성취를 얻은 사람도 없고, 대학에 들어가서 자기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휩싸여 좌절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얼마나 기쁘겠는가. 하지만 부모는 미성년자인 자기 자식이 그런 책을 쓰려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얄팍한 책을 써서 돈을 챙기려는 출판사가 접근해도 부모가 막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제일 비판받아야 하는 곳은 따로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이다. 그런 책표지에는 예외 없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 추천도서>라는 딱지가 붙고, 그 책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뭐 하는 곳이길래 그런 책을 청소년들한테 추천하는가.
  
  
(2013.01.22.)
   

은퇴

  
대학원생들을 보면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선생님들도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철학과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은퇴한 ㅎ선생님이다. 얼굴에 ‘나 행복함’, 또는 ‘행복함이라는 속성을 예화하고 있음’이라고 써있다. 그 다음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정년이 얼마 안 남은 선생님이다. 정년이 꽤 많이 남은 선생님들은 별로 안 행복해 보인다.
  
파이어아벤트가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니?”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은퇴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람들은 바쁘고 행복해보이지 않는데 은퇴한 사람들은 여유롭고 행복해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어이아벤트가 네댓 살 때 한 말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행복해지려면 은퇴해야 한다. 은퇴하려면 데뷔해야 한다. 그러니 빨리 석학이 되자.
  
  
* 참고: 『킬링 타임: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철학적 자서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지음, 정병훈 옮김, 한겨레출판사, 2009년 04월, 44쪽.
  
  
(2012.12.14.)
  

   
어머니께서 작년 가을에 얼려놓은 감을 드시다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옛날이야기 보면 병든 어머니가 한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아들한테 말하잖냐. 그거 노인네 치매 증상이 아니냐? 치매 걸린 노인네들이 꼭 뭐 먹고 싶다고 하잖냐. 무슨 한겨울에 딸기를 먹고 싶다고 아들을 괴롭히냐? 제정신이 아닌 거지.”
  
원래 그 이야기는 자식의 효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2012.08.27.)
    

지금의 한국 정부가 100년 전 유럽 국가들의 정부보다 나을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니, ‘전쟁 나면 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재난과 전쟁은 다를 수도 있다. 전쟁은 예상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도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매뉴얼도 있을 것이다. 군대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타 행정부처는 어떨까. 매뉴얼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매뉴얼이 있다는 것과 매뉴얼대로 행동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매뉴얼대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매뉴얼을 해석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할까. 매뉴얼을 해석할 능력이 있다는 것과 별개로, 매뉴얼대로 행동할 능력이 있을까.

얼마 전 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영국 정부는 2차 대전이 터지기 2년 전인 1937년에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에는 영국이 독일과 전쟁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런던이 폭격당할 것이며, 이 경우 사상자가 얼마일지, 런던 시민들을 어디로 대피시킬지에 대한 계획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인상적인 것은, 폭격 이후 정신질환에 시달릴 사람들이 얼마나 될 지도 계산해서 그에 맞게 런던 인근에 정신병원을 지었다는 점이다.(실제로는 영국 정부의 예상보다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이 적어서, 정신병원을 군사 목적으로 활용한다.)

과연 지금의 한국 정부가 100년 전 유럽 국가들의 정부보다 나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2014.04.23)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