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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나는 왜 글을 쓰는가? - 서민적 글쓰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먹고 사는 것과도 밀접하지 않은데도, 왜 짜잔한 글을 꾸준히 쓰는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라고 생각했던 것과 실제 글을 쓰는 원인이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서민의 『서민적 글쓰기』를 읽고 나서였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글을 잘 쓸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언젠가 제자 한 명이 내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저도 글을 잘 쓰고 싶어요.” 그의 눈은 정말 글을 잘 쓰고픈 의지로 반짝였다. 그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글은 매일 조금씩 써야 하거든요. 그러니 블로그를 만들고 매일 한 편씩, 주 5회 글을 올리세요. 제가 매일 한 번씩 들러 봐드릴게요.”

처음 사흘간, 그는 하루 한 편씩 글을 썼다. 바쁜 와중에 난 매일 들러서 그가 올린 글에 대해 “이렇게 바꾸면 좋습니다”라며 첨삭지도를 했다. 4일째 되는 날,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가 글을 올리지 않는 날은 점점 늘어났고, 나중에는 일주일 내내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왜 글이 올라오지 않나요?”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여자친구가 생겼어요.” (11-12쪽)

나는 2023년에 짜잔한 글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 참고 문헌

서민, 『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생각정원, 2015.

(2022.12.31.)

2023/02/26

탕수육 먹고 술을 안 먹게 된다는 것

일요일 점심에 어머니와 함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었다. 집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명장>이라는 중국집에 갔다.

학부 수업 기말보고서를 채점하기 싫어서였을까? 술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이과두주 한 병을 주문했다. 어머니는 운전해야 하기도 했고 원래 술 자체를 안 좋아하셔서 나만 술을 마셨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어머니가 술을 안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서 한 병을 다 마시고 집에 돌아와서 기말보고서를 채점했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것이 아니므로 기말보고서 채점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혹시라도 점심 때의 음주가 채점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저녁 때 맥주 두 병을 더 마셨다. 그렇게 채점의 공정성을 확보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운전 면허를 따고 18년 동안 운전을 안 해서 지금은 운전을 못 하지만, 운전 학원 같은 데 가서 연수를 받아 어떻게 운전을 하게 된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에 일요일 점심 같은 상황에 나도 술을 마시겠다고 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부인도 술을 마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머니가 천년만년 지금 같을 것도 아닐 텐데, 두 사람이 서로 술을 마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율주행자동차의 상용화가 예상보다 늦어지게 된다면? 그런데도 두 사람이 중국집에서 치킨게임을 한다면?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기사를 부르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두 사람이 음식을 먹는 값만큼 대리운전비로 주어야 한다. 그럴 거면 그 돈으로 더 좋은 것을 사먹는 게 낫다. 그런데 술을 안 마신다면 그렇게 더 돈을 들여 좋은 것을 먹을 필요가 있는가?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았는데, 그게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러한 마음이 든다면, 화딱지가 나는데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발적으로 술을 안 마시고 기쁜 마음으로 탕수육만 씹어먹게 된다면, 아마도 그러한 상태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 상태일지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 든다면 아마도 부인을 매우 사랑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가능하다면, 그런 마음이 들게 만드는 사람하고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2.12.26.)

2023/02/23

단군신화에 대한 재해석

동료 대학원생들하고 점심식사를 하다가 마늘 구워 먹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대학원생은 마늘을 구워 먹는 것을 좋아해서 고기를 다 주워 먹으면 남은 마늘만 가지고도 구워 먹는다고 했고, 누가 누가 마늘을 좋아하나 이야기를 했다. 나는 고기 먹을 때 마늘을 안 익혀 먹는다고 하니, 어떤 대학원생은 잘못 알아듣고 내가 고기 없이 생마늘만 먹는 줄 알고 놀라기도 했다. 마늘이 아몬드도 아닌데 어떻게 생으로 오독오독 씹어먹겠는가? 그런데 그 대학원생은 내가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안 되는 법이다.

하여간, 마늘 먹는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고기 먹을 때 주로 생마늘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대학원생이 나보고 전생에 웅녀였냐고 농담을 했다. 웅녀 이야기를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뭐가 좋아 보여서 굳이 사람이 되겠다고 환웅을 찾아왔을까? 곰과 호랑이가 사람보다 신체 능력도 나을 것이고 고기도 많이 먹을 텐데 사람의 어떤 측면이 좋아 보였을까? 나는 동료 대학원생들에게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곰과 호랑이가 왜 인간을 부러워하죠? 그것도 신석기 시대 수준의 인간을?”

나의 물음에 동양과학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이렇게 답했다. “인간을 부러워할 정도의 곰과 호랑이라는 것은 무리에서 잘 나가는 개체가 아니라 밀려난 개체일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환웅이 쑥과 마늘을 먹여가며 근성을 시험한 거죠.”

신석기 시대의 인간을 부러워할 정도의 곰과 호랑이라면 무리에서 밀려난 개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나는 왜 진작에 하지 못했을까? 내가 들은 단군신화에 대한 해석 중 제일 그럴듯한 해석이었다.

(2022.12.23.)

2023/02/20

도광양회

연구실에 실훈 같은 것은 없는데 혹시라도 실훈을 만든다면 ‘도광양회’(韜光養晦)가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남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힘들고 어렵고 돈 없더라도 함부로 까불지 말고 실력을 키우며 조용히 버티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있는 연구실은 실험 같은 집단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알아서 와서 독서실처럼 책이나 논문을 읽다가 가는 곳이기 때문에 따로 책임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당연히 실훈 같은 것을 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도 없다. 물론, 연구실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기 때문에 내가 대충 말해도 다른 사람들이 따라주기는 하겠지만, 나이 많다고 유세하면 매우 추하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내 이야기를 들은 동료 대학원생은 금이 간 벽이 그대로 있는 것보다는 ‘도광양회’가 적힌 액자가 있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래도 내가 나이 많다고 실훈 정하자고 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으며, 액자나 족자를 한다고 했을 때 내가 글씨를 잘 쓰는 편도 아니고 잘 쓴 글씨를 받아오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러자 동료 대학원생은 자신의 5천 원짜리 패드를 보여주며 심심할 때 패드에다 ‘도광양회’를 써보라고 했다.

(2022.12.20.)

2023/02/19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저작권 관련 법학 논문을 읽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법학 논문을 읽게 되었다. 원래부터 법학 논문을 읽을 생각은 아니었고 하다 보니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르바이트가 들어온 것은 2주 전쯤이었다. 의뢰인은 제출 기한이 촉박한데 보고서를 써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원래 6주 정도 시간을 주어야 하는데 시간이 급박하니 2주 안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6주에 할 일을 어떻게 2주 안에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의뢰인이 제시한 금액을 듣고 해당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마침 나는 대학원 선배가 하는 <인공지능과 철학>의 수업 조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보고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과학철학 선생님들이 그 동안 인공지능 관련해서 논문을 많이 써놓으셨으니까 적당히 정리하고 대충 의견을 붙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의뢰인은 보고서에 정책적 함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책적 함의? 나는 과학철학 전공인데?

알고 보니, 의뢰인은 내가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협동과정 박사과정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내가 철학을 그만둔 줄 알았다고 했다. 어쩐지, 과학정책 대학원생이 할 아르바이트가 왜 나한테 왔나 했다. 그래도 나한테 들어왔으니까 내가 해야 했다. 의무감이고 뭐고 간에 당장 증여세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선택한 보고서 주제는 인공지능 창작물의 저작권 개념이었는데, 한국어로 된 철학 논문을 다 뒤져도 보고서에 쓸 만한 내용은 없었다. 역시나 철학은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인가? 어쨌든 나는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법학 논문을 찾았다. 스무 편 정도 읽었다.

법학 논문을 읽으면서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일만 해도 그렇다. 민사소송으로 할 것을 도청과 시청을 들쑤셔서 행정명령으로 해결하지 않나, 정말로 민사소송 하나가 진행중이지 않나, 너무 오래된 사건이어서 소 제기가 어려운 사건을 소 제기가 가능하게 만들고 민사소송 직전까지 몰아붙여서 친척한테 빼앗긴 땅을 받아내지 않나, 그런데도 재심 청구할 게 하나 남아 있지 않나, 이제는 저작권법 관련 논문을 읽고 있으니, 이럴 거면 로스쿨을 갔어야지 왜 철학과 대학원에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여러 정황상 나는 로스쿨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과 대학원에 적합한 인간이냐고 하면 또 대답하기 마땅치는 않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하여간 나는 돈 받을 기한을 넘기지 않고 보고서를 제출했다. 의뢰인은 아마도 보고서를 수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며 이번 달 말에 돈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번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운 점도 있었다. 학부 때 법학과 수업을 들은 사람들이 왜 법학에 대해 감탄하거나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는지 당시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마흔을 앞두고 법학 논문을 읽으면서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법을 아예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법이라는 건 그냥 국회의원들이 적당히 합의해서 만들었다 없앴다 하면 되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령, 우리가 바둑을 공부하려고 서점에서 바둑 기보 같은 것을 샀다고 해보자. 이 때 기보는 저작물로 인정받아야 하며 기보 수익의 일부는 해당 대국을 한 바둑기사에게 가야 하는가?

간단히 생각해보면, 바둑기사가 바둑을 두었으니 기보는 바둑기사의 저작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떤 창작물이 저작물로 인정받으려면 해당 창작물의 저작물성이 성립해야 한다. 저작물성이 성립하려면, 해당 저작물이 저작권법에 명시된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보에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이 표현되는가?

의견은 둘로 나뉜다. 기보의 저작물성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바둑판 위 어느 곳에 착점할지는 사상의 표현이 아니며 최선의 답을 찾아가는 데 불과하므로 창작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기보의 저작물성을 인정하는 측에서는 창작성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여 “선택의 폭”도 창작성의 범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민경재 교수 같은 경우는 대국할 때 바둑기사가 바둑판 위의 아무 곳에 두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대국이 어떻게 전개될지,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등을 고려하며 수많은 수에서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최대한 반영한 수를 두기 때문에 충분히 창작성이 있다고 본다.(244쪽) 그런데 도대체 이게 왜 중요하냐? 기보의 저작물성 여부에 따라 기보의 수익이 대회를 개최한 바둑협회로 갈지, 바둑기사에게 갈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보의 저작물성에 관하여 아직 명확한 합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편의상 기보의 저작권이 바둑기사에게 있다고 치자. 그러면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가 바둑을 두었다. 기보의 저작권이 기사에게 있다면, 알파고의 몫은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아마도 알파고를 만든 회사가 해당 수익을 차지하는 것이 맞겠지만, 여기서 몇 가지 조건만 바꾸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이 실제로 외국에서 발생하고 있고 아마도 조만간 한국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 참고 문헌

민경재 (2016), 「게임의 유형별 그리고 구성요소별 법률관계의 검토 - 특허법 및 저작권법을 중심으로」, 『과학기술과 법』 제7권 제1호, 231-268쪽.

(2022.12.19.)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