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학부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맡은 일은 논증 에세이 기획서를 검토하는 일이다. 학생 한 사람당 15분 간 면담하며 기획서를 검토한다. 학생이 원할 경우 다른 시간을 정해서 추가로 면담할 수도 있다.
면담하기 전에 학생들이 제출한 기획서를 읽어보았다. 대부분은 설명문 기획서나 실험 보고서 기획서에 가까운 글을 썼고, 기획서를 거의 못 쓰거나 아예 안 쓴 학생도 일부 있었다. 나는 학생들의 기획서를 하나하나 봐주는 것보다는 논증 에세이의 취지를 설명한 뒤에 글의 방향을 잡거나 바꾸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초교육원에서 이공계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글쓰기 과제는 주로 설명문, 논증 에세이, 연구보고서, 이렇게 세 가지다. 왜 이렇게 구성되었을까? 기초교육원에서 그와 관련된 안내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글의 기능과 관련된 것 같았다. 설명문은 기존의 있던 지식이나 정보를 다른 사람이 알기 쉽도록 전달하는 글이다. 글쓴이의 의견 같은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연구보고서는 기존에 없던 지식을 새로 만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글이다. 아마도 논증 에세이는 설명문과 연구보고서의 중간쯤에 있을 것이다. 기존의 지식 중 어느 것이 맞고 틀린지 가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공계 학생들이 과학 활동에서 필요한 글쓰기 능력과 관련될 것이다.
기존의 상충되는 주장들 중에서 어떤 주장이 옳은지 논증하는 글을 쓰려면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어떠한 주제에 대해 대립되는 두 입장을 찾은 다음, 어느 지점에서 논쟁이 벌어지는지를 찾고 어떤 입장을 지지할지 정한다. 기존 주장을 지지해도 되고 기존 주장에 대한 비판을 지지해도 되고, 둘 다 틀렸다고 해도 된다.
서로 대립하는 의견들 중 어느 의견이 옳은지에 대하여 논증 에세이를 쓰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하나는 그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지 아닌지를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니까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입장의 허실을 비교적 알기 쉽다는 것이다. 장점은 지지자가 말하고 단점은 비판자가 말한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직류/교류 논쟁을 예로 든다면, 직류 체계의 문제점은 테슬라가 설명할 것이고 교류 체계의 문제점은 에디슨이 설명할 것이다. 이 것은 옛날에 중고차 살 때와 비슷하다. 자동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중고차 살 때 시승해본다고 하고 그 차를 끌고 다른 중고차 가게에 가서 사장한테 이 자동차 팔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냐고 물으면 그 가게 사장이 그 자동차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다 짚어준다.
논증 에세이는 대체로 서론-본론-결론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세분하면 다섯 부분이 된다. 1절은 서론, 2절은 기존 입장, 3절은 기존 입장에 대한 기존 비판, 4절은 글쓴이의 의견, 5절은 결론이다. 이 중 2절부터 4절까지가 본론이다. 서론에서는 이 글을 왜 쓰고 어떤 목적에서 쓰고 어떻게 쓸지를 쓰고, 결론에서는 본론에서 한 말이 무엇이고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함축하는지를 쓴다. 2절과 3절에서는 기존 입장과 그에 대한 기존 비판을 정리하는데, 어느 지점에서 두 입장이 충돌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두 입장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등을 잘 정리해놓으면 4절에서 주장을 개진할 때 부담이 줄어든다.
3절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존 이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펼치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들이 기존 비판에 대한 검토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주로 필요성을 모르거나, 필요성을 알지만 다른 과제도 많아서 금방 과제를 끝내려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판을 끌어오면 자기주장의 독창성이 희석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절을 건너뛰면 글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남들이 논의하지 않은 것을 처음 논의한다면 보통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기발한 것이거나 논의할 필요도 없어서 논의하지 않은 것일 텐데, 보통은 후자이므로 기존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 설사 글쓴이의 비판이 옳더라도 기존 비판을 검토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쉽다. 맞는 말이지만 이미 이전에 더 맞는 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쓴 글이 맞는 내용이지만 쓸모없게 된다. 그래서 선행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이 정도 설명하면, 학생들은 대부분 “아, 글을 다시 써야겠네요”라고 먼저 말하거나, 글을 다시 써야하지 않겠냐는 나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한다. 내가 글을 잘 썼는데 조교인 당신이 글을 볼 줄 몰라서 그런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글을 다시 쓰겠다는 다짐을 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수업에서는 이대열 교수의 『지능의 탄생』을 읽고 논증 에세이의 주제를 잡아야 하는데, 그 책은 매끄럽게 쓴 교양서적이라 그 책만으로는 논쟁점을 찾기 어렵다. 그런 경우는 책만 읽어서는 안 되고 책 내용과 관련된 내용을 따로 찾아야 한다. 책에 나오는 내용 중 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는 것이 있고 논쟁 중인 것이 있을 텐데, 논쟁 중인 것을 찾아서 그와 관련된 논증 에세이를 쓴다. 책과 관련된 책 이외의 내용을 찾고 분석하는 최소한의 과정이 필요하다. 교양 수업이니 굳이 논문까지 찾을 필요는 없고, 구글에서 한국어로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쓴다. 물론, 그대로 긁어서 붙이면 표절이 되기 때문에 자료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공과 분석이 동반되어야 한다. 과제의 취지는 논증 에세이의 형식에 맞는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로 논문을 쓰는 것은 아니므로 자료 찾는 데에 너무 힘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글을 쓸 때 추가로 고려할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논쟁지점을 다룰 때 최대한 범위를 좁혀야 한다는 것, 정해진 기간에 글을 완성할 수 있는지 견적을 내면서 작업할 것, 어떤 자료를 찾을 때 어떤 자료가 나올지 예상하면서 찾을 것, 꼼꼼히 읽지 않고도 글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쓸 것 등이다.
그런데 논증 에세이를 쓰기를 이런 방식으로 지도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논증 에세이는 어떤 주제나 문제에 대하여 논증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다루는 범위를 한정해야 하는지 말이다. 어떤 주제든 논증만 하면 논증 에세이인 것은 맞다. 맞는 말이지만 교육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다. 학부생들한테 논증 에세이를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결국 쓰나마나한 글이나 쓰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것을 어떤 사람이 생각해낸 다음 “몰랐지, 요놈들아?” 하면서 기가 막힌 논증 에세이를 썼다고 하자. 이에 대한 선행 연구도 없으니 기존 비판을 고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놀라고 그 에세이를 쓴 사람은 교과서에 실릴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미 대가이므로 학부 글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학 교재에도 나오고 모두가 맞다고 생각해서 고려할만한 기존 비판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 그게 틀렸다고 하는 논증 에세이를 썼다고 하자. 그 에세이의 내용이 정말 맞다면 그 에세이를 쓴 사람도 이미 대가이므로 역시나 학부 글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대가가 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대가가 아니므로 그에 맞게 글쓰기를 가르쳐야 한다.
글쓰기 과제를 내주면서 선행 연구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논증을 하라고 하면, 억지 논증을 만드느라 망상 경연대회 같이 되거나, 분량을 억지로 늘리느라 채점 방해를 위한 필리버스터 같은 것이 되기 쉽다. 학부 글쓰기 수업 조교가 되어서야, 내가 학부 때 문과대를 다니면서 본 글이 죄다 왜 그렇게 이상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상한 글을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공 수업 중 상당수는 중간고사도 건너뛰는 판이어서 글쓰기 과제 같은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19.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