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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9

외계인 손 증후군



외계인 손 증후군(AHS; Alien Hand Syndrome)은 자신의 손이 마치 다른 사람의 손처럼 통제되지 않는 증상을 가리킨다. 겉보기로는 멀쩡한 손이지만 본인 의사대로 통제되지 않아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뇌졸중, 뇌종양, 뇌량절제술 이후 드물게 발생한다고 한다. 외계인 손 증후군에 대한 명확한 진단은 아직 없으며 치료 방법도 아직 없다.

외계인 손 증후군의 발병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며, 국내에서도 보고된 바가 거의 없다. 의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사례로는, 2019년 12월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발병한 사례가 있다.







* 참고 문헌: 김선희 (2013), 「뇌졸중 후 발생한 외계인 손 증후군: 사례 연구」, 『재활치료과학』 2권 2호(통권4호), 77-81쪽.

* 링크(1): [오마이포토] 문희상 의장 코앞에서 본인 입 틀어막은 이은재 의원

(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599586 )

* 링크(2): [포쓰저널] “성희롱 하지마” 문희상 공격한 한국당 이은재, 고발당할 위기

( http://4th.kr/View.aspx?No=639646 )

(2019.12.29.)


2020/02/28

학위와 자신감

   
예전에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데 늦어서 택시를 탄 적이 있다. 택시기사는 어머니 또래로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운전 중간에 휴대전화로 전화가 와서 택시기사는 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통화를 했다. 손자 교육 관련된 통화인 것 같았는데, 송도 신도시에 있는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하는데 1년 교육비가 2천만 원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택시 뒷자리에 앉아서 생각했다. ‘저 집 손자는 유치원생인데 박사과정생인 나보다 교육비가 더 들어가네.’
  
택시기사는 통화가 끝나고 나서, 자신이 원래 교사였는데 정년퇴직 후 택시기사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물음에 내가 대학원 다닌다고 대답하자, 택시기사는 자기도 대학원을 다녔다면서 대학원 다니느라 힘들었다, 학위 받는데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석사나 박사 학위를 취득한 교사에게는 교장 진급하는 데 가산점 같은 게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택시기사는 아니라고 답했다. 나는 월급이 늘어나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그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나는 교사가 학위를 받으면 진급하는 데 가산점이 붙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게 아니고서는 학문적으로도 도움이 안 되고 교육 현장에서도 도움이 안 될 그 수많은 교육학 학위 논문들이 배출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학위가 진급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 전직 교사에게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연구 점수를 꼭 석박사 점수 따지 않아도 되어서 그 택시기사분이 진급과 무관하게 대학원에 갔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대학원에 가서 학위를 받는 거지? 당시 나는 약간 얼떨떨해서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대학원에 오게 된 계기가 있나요?” 택시기사는 답했다. “그냥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어요.” 택시기사는 곧 이어서 말했다. “학위 받으면서 정말 힘들었는데 받으니까 보람이 있었어요.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됐어요.”, “어떤 도움이요?”, “자신감이요. 학위를 받으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2019.12.28.)
     

2020/02/26

도시 빈민 탐사보도 문체에 관한 감상

   
학부 선배가 대학원에서 기말 보고서를 쓰느라 어쩔 수 없이 어떤 시사주간지 연재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도시 빈민에 관한 기획 기사였다. 그 선배가 문제 삼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체, 그리고 그 문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시선이었다.
  
나도 인터넷으로 찾아서 몇 부분 읽어보았다. 가독성도 낮으면서 아름답지도 않은 문체였다. 어떤 일이 있었으면 그런 일이 있었다고 쓰면 될 텐데, 문학 소년도 아니고 이상한 수사와 비유로 점철된 문장이 가득했다. 예를 들어, 누가 몇 명 죽었다고 하면 될 것을 꼭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꽃 피는 계절이 올 때마다 주민들은 우수수 졌다. 겨울 동안 웅크렸던 긴장을 놓으면서 겨울 동안 웅크렸던 생명들이 움틀 때 그들은 떠났다. 2014년엔 최소 14명이 이생을 정리했다. 저승사자가 실적을 채우지 못할 때마다 들러 ‘머리수’를 흥정하는 듯싶었다. 주민들에게 환절(換節)의 시간은 살아남아야 하는 나날이었다.”
  
사람마다 사연도 많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둘러싼 상황도 복잡할 것이다. 지면은 제한되니 그러한 사연과 상황을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런데도 그런 괴상한 문학성(?)을 뽐내니 이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당시에 그런 기사를 상찬한 사람들도 있다는데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 진행된 기사 문체에 관한 연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신문사들은 사람들이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접하게 되면서 기사의 가독성을 높일 방안을 연구했다. <AP통신>의 의뢰를 받은 루돌프 플레시(Rudolf Flesch) 박사는 독자들이 쉽고 편하게 읽으려면 신문 기사의 첫 문장이 평균 1.5 음절의 단어 19개 이하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AP통신>은 기사 첫 문장의 길이를 27개 단어에서 23개로 줄이고, 음절은 평균 1.74개에서 1.55로 줄였다. 비슷한 시기 <UP통신>(<UPI>의 전신)의 의뢰를 받은 로버트 거닝(Robert Gunning)은 기사의 난이도를 분석하는 안개 지수(fog index)를 개발했다. 거닝에 따르면, 당시 <UP통신>의 기사 난이도는 평균 16.7년 이상 교육을 받아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이를 평균 11.7년 정도 교육받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가 아는 기사 문체는 이 시기에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문체가 달라진 신문 기사를 어려움 없이 이해하는 데도 평균 11.7년 정도 교육 기간이 필요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도시 빈민들을 정규 교육과정 중 몇 년이나 이수할 수 있었을까 자기나 자기 이웃의 삶을 다룬 기사를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도시 빈민은 얼마나 될까?
  
그 선배가 불편해한 것도 이러한 점과 맞닿아있을 것이다. 그 기사는 애초에 도시 빈민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형태의 글이 아니었다. 도시 빈민을 취재했지만 그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기사도 아니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면 기사를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의 요상한 문체가 도시 빈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자의 야릇한 감상을 서술하는 데 적합한 것이라는 점도 그 선배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을 것이다. 기자가 기사를 쓸 때의 태도는 내가 우리 집에 사는 고양이인 화천이에 대한 글을 쓸 때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화천이의 사진을 찍고 화천이에 대한 글을 쓰지만 거기에 대한 감상은 철저히 나의 감상이다. 처음부터 그 글은 화천이가 보여주거나 읽어줄 글이 아니었다. 기자도 도시 빈민들에게 자기의 기사를 보여주고 읽어줄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자에게 도시 빈민의 사연이란,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희미한 옛 풍경과 비슷한 것은 아니었을지. 그 기사의 문체는 종군기자의 기사보다는 가난했던 옛 추억을 곱씹는, 문학쟁이가 쓴 글에 더 가까워보였다.
  
  
* 참고 문헌: 최수묵, 『기막힌 이야기 기막힌 글쓰기』 (교보문고, 2011), 169-170쪽.
  
   
(2019.12.26.)
    

2020/02/23

남자는 부인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

    
남자는 부인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맞기는 맞나 보다. 김의겸 대변인의 부인이 남편 모르게 10억 원을 대출받아서 25억 원이 넘는 재개발 부동산을 구입했다는데, 투자 차익이 8억 8천만 원이라고 한다. 나는 놀라움을 넘어 약간의 경외감까지도 느꼈다.

부동산 투자 잘못하면 알거지 된다. 대출 끼고 투자하다가 삐끗하면 빚더미에 앉고, 자기 돈으로 투자해도 잘못하면 돈이 묶인다. 그런데 부동산 투자 전문가도 아니고 결혼 뒤 30년 가까이 집 없이 전세 살던 사람이, 단 한 번의 투자로 그렇게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투자처를 알아보는 분석 능력, 부동산에 처음 투자하면서도 대출을 10억 원씩이나 땡기는 대범함, 이 모든 일을 남편 모르게 추진하는 결단력, 얼마나 대단한가. 부인이 이렇게 능력자인데, 김의겸 대변인은 기자하면서 부동산 투기 비판하는 칼럼이나 쓰고 부인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기자 생활 하는 동안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의겸 대변인의 동생도 흑석동 부동산을 구입했는데, 동생 부동산 구입도 동생 부인이 했다는 것이다. 김의겸 대변인에 따르면 “제수씨는 일대 부동산 매물에 대해 잘 알만한 위치에 있”고 “제수씨가 동서들끼리 만나면서 흑석동에 집을 살 것을 권유”하여 김의겸 대변인과 동생이 비슷한 시기에 집을 사게 됐다는 것이다. 김의겸 대변인의 제수씨가 어떤 위치에 있어서 일대 부동산 매물을 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수씨도 능력자임에는 분명하다.
  
김의겸 대변인 형제의 사례를 보면서, 나도 똑똑한 여자와 결혼하면 부인 말을 잘 듣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의겸 대변인과 달리, 나는 부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나는 결혼할 수 있을까?
  
  
* 링크(1): [SBS] 김의겸, 부동산 논란 하루 만에 사퇴… “아내가 했지만 내 탓”
   
* 링크(2): [서울신문] 김의겸 전 靑 대변인 건물 시세차익 8억 8000만원 올려
  
* 링크(3): [중앙일보] 김의겸 ‘동생도 흑석동 건물 매입’ 보도에 “제수씨 권유로 산 것”
  
  
(2019.12.23.)
     

2020/02/21

똥글 선호자의 최면 감수성에 관한 가설

   
문학이나 예술 쪽 종사자 중 일부는 글을 쓸 때 자유연상법을 즐겨 쓴다. 자유연상법을 즐겨 쓰는 정도가 아니라 자유연상법만으로 글을 완성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영화 <혹성탈출>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보자. <혹성탈출>에는 원숭이가 나오고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건 사과고 사과는 맛있고 맛있는 건 바나나인데, 바나나하면 남근이 떠오르는데 김건모는 왜 그랬냐면서 글이 끝날지도 모른다. 아무 맥락 없이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이 등장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전문 분야에 대해 폼 잡고 기괴한 글을 쓰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전문 용어를 도입해놓고 그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글쓴이가 어떤 의도로 그 용어를 쓰는지 설명하기 전에 다른 전문 용어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전문 용어를 계속 나열하기만 해서 글 한 편을 완성한다. 아무런 설명이나 분석 없이 어휘력을 자랑하다가 글이 끝나므로, 해당 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 없이도 글을 쓸 수 있다. 인공지능으로 그런 글을 쓴다고 해보자. 알파고 이야기하다가 강한 인공지능 이야기하다가 특이점 이야기하다가 계산주의/연결주의 이야기하다가 라이프니츠는 계산을 좋아했다고 하면 글 한 편이 뚝딱 나온다. 이거 개소리 아니냐고? 물론 개소리다. 그러든 말든 분량은 채웠으니 글 한 편이 나왔다고 우기면 된다.
  
건전한 판단을 하는 사람이 그런 글을 읽는다면 지금 무슨 똥을 본 것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감이 없는 사람은 글쓴이가 전문적인 내용을 압축해서 썼다고 생각하고, 좀 독특한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감이 없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왜 독특한 사람들은 그런 똥 같은 글을 읽으며 야릇한 흥분을 느끼는가. 학부 때 나는 그 두 부류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둘 다 머리가 나빠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바뀐 것은, 대학원에 와서 여러 과를 돌아다니면서였다. 다른 것을 할 때는 굉장한 사람인데 똥글이나 똥발표 앞에서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면서, 똥글이나 똥발표에 대한 이상 반응은 단순히 지능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지능 차이 가설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 나의 새로운 가설은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이다. 최면 감수성의 차이가 반응 차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최면 감수성이 높으면 최면에 잘 걸리고 최면 감수성이 낮으면 최면에 잘 안 걸린다고 한다. 똥글이나 똥발표에는 비-지시적 최면의 요소가 있고 그러한 요소가 최면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의 이상 증상을 유도한다는 것이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이다.
  
최면의 필수 요소로는 연상과 은유가 있다. 똥글이나 똥발표는 어떤가? 걸핏하면 무엇과 무엇이 비슷해 보인다고 한다. 아무 상관없는 것들을 늘어놓고는 그러한 것들끼리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별반 상관없는 대상들은 연상과 은유를 통해 연관을 가진다. 어떤 대상의 본질적인 속성과 거리가 먼 속성을 부각하고, 그 속성을 부차적인 속성으로 가지는 다른 대상을 연달아 나열한다. 아무 관련 없는 것들을 나열하기만 해놓은 글을 읽고도 그 글이 어떤 대상을 분석했다고 생각하거나 심오한 함축을 가진다고 생각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일반인보다 연상이나 은유를 쉽고 빈번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최면의 또 다른 필수 요소는 감각적 표현이다. 가령, 최면을 걸 때 피험자에게 “사과가 있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색상, 냄새, 감촉, 한 입 물었을 때의 아삭 하는 소리, 과즙 같은 것들을 생생하게 묘사해야 한다. 똥글은 어떤가? 감각적 표현이 불필요한 내용을 다루는 경우에도 감각적 표현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똥글에는 최면적 질문과 트랜스 유도성 탐색과 연관되는 부분도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한참 토론하다가 갑자기 “오늘은 며칠이죠?”라고 물으면 누구라도 잠시 멍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잠시 트랜스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똥글이나 똥발표에서도 비슷한 특징이 나타난다. 가뜩이나 별 내용도 없는 글인데 중간에 뜬금없는 소리가 나온다. 그런 때 최면 감수성이 낮은 사람은 ‘이거 미친 놈이네’ 하면서 글을 덮겠지만, 최면 감수성 높은 사람에게 그런 봉창 두드리는 소리는 트랜스 상태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똥글 선호자들은 글에서 뜬금없는 소리하는 부분을 높게 평가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부분을 읽을 때 짜릿해하는 등의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도 최면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비-지시적 최면에서는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경험에서 비롯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일종의 라포를 형성하다가 대화의 방향을 바꾸면서 트랜스 상태로 빠뜨리는 것이다. 똥글이나 똥발표는, 개인 경험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경험을 그렇게 우라지게 강조한다. 최면 감수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경험담을 들으면서 동의의 반응을 격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트랜스를 유도하는 데는 여러 가지 화법이 있는데, 그 중에는 혼란 기법을 사용한 최면 유도도 있다. 똥글이나 똥발표를 보면, 사실은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마치 대단히 놀라운 일인 것 마냥 나열한다. 아무리 현란한 수식어나 쇼맨십을 사용하더라도 결국 자명한 사실이라서 독자나 청자는 계속 그러한 내용에 수긍하게 된다. 일종의 예스 세트(yes set)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예스, 예스, 예스를 반복하다가 한순간 사람들을 혼란한 상황에 빠뜨린다. 사람들은 혼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심리적 저항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암시 화법에는 반어법을 사용한다든지, 함축적인 말을 쓴다든지, 어떤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한다든지, 모호한 표현을 쓴다든지, 아무 내용 없는 빈 말을 한다든지, 혼란스러운 말을 한다든지, 대조적인 단어들을 나열해서 선택이 어렵게 만든다든지 하는 등이 있다. 실제 똥글이나 똥발표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매우 빈번히 등장한다.
  
내 가설을 어떤 방식으로 검증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내 가설이 맞다면, 이는 글쓰기 교육과 관한 함축을 가질 것이다.
  
정상적인 글쓰기 교육에서 아무 이유 없이 저항하는 학생들이 간혹 있다. 그러한 학생들이 뭔가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 수업에서 분탕을 치고 자꾸 소모적인 논쟁을 하려고 하거나 이상한 과제물을 제출하면 강사나 조교의 시간을 빼앗게 되고 다른 학생들의 학습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 기존의 글쓰기 수업에서는 그런 학생들에 대한 대응 매뉴얼이 마련되지 않았다.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에 기반한 대응 매뉴얼을 갖추게 된다면 글쓰기 수업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다.
  
많은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 수업 중에는, 똥글 선호자들의 이상 반응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극하는 요소들이 포함된 수업이 적지 않다. 보고서나 논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체계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자기 이야기나 쓰게 하고 무절제한 연상 능력을 보여주는 글이나 쓰게 한다.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은 현행 글쓰기 수업이 어떤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019.12.21.)
      

2020/02/19

경제학자 부부가 쓸 수 있는 애정 표현?

   
“all else being equal”, “all other things being equal”, “everything else being equal” 같은 표현은 경제학 논문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표현일 것이다. 논문 저자가 모형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해당 모형이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상황에 적용되는 것임을 밝힐 때 쓴다.
  
한국에 오는 해외 경제학자들을 보면 부부 경제학자들도 드물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 중에 애정 표현할 때도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가령, 구애하거나 청혼할 때 이런 표현을 쓸 수도 있겠다. “당신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소.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이렇게 말하면 나중에 왜 사람이 달라졌느냐, 사랑이 식었느냐는 등의 물음에도 적절한 답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건이 달라졌으니까”라고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현직 경제학자의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은 아직 경제학자들 중 사랑에 대하여 그러한 표현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고 하셨다. 아마 경제학자들도 다분히 로맨틱해서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그 분의 말씀이다. 사랑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충격(shock)으로 설정하는 경제학 모형은 있다고 한다.
  
  
(2019.12.19.)
    

2020/02/14

논증 에세이 쓰기 상담 요령



이번 학기 학부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맡은 일은 논증 에세이 기획서를 검토하는 일이다. 학생 한 사람당 15분 간 면담하며 기획서를 검토한다. 학생이 원할 경우 다른 시간을 정해서 추가로 면담할 수도 있다.

면담하기 전에 학생들이 제출한 기획서를 읽어보았다. 대부분은 설명문 기획서나 실험 보고서 기획서에 가까운 글을 썼고, 기획서를 거의 못 쓰거나 아예 안 쓴 학생도 일부 있었다. 나는 학생들의 기획서를 하나하나 봐주는 것보다는 논증 에세이의 취지를 설명한 뒤에 글의 방향을 잡거나 바꾸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초교육원에서 이공계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글쓰기 과제는 주로 설명문, 논증 에세이, 연구보고서, 이렇게 세 가지다. 왜 이렇게 구성되었을까? 기초교육원에서 그와 관련된 안내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글의 기능과 관련된 것 같았다. 설명문은 기존의 있던 지식이나 정보를 다른 사람이 알기 쉽도록 전달하는 글이다. 글쓴이의 의견 같은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연구보고서는 기존에 없던 지식을 새로 만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글이다. 아마도 논증 에세이는 설명문과 연구보고서의 중간쯤에 있을 것이다. 기존의 지식 중 어느 것이 맞고 틀린지 가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공계 학생들이 과학 활동에서 필요한 글쓰기 능력과 관련될 것이다.

기존의 상충되는 주장들 중에서 어떤 주장이 옳은지 논증하는 글을 쓰려면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어떠한 주제에 대해 대립되는 두 입장을 찾은 다음, 어느 지점에서 논쟁이 벌어지는지를 찾고 어떤 입장을 지지할지 정한다. 기존 주장을 지지해도 되고 기존 주장에 대한 비판을 지지해도 되고, 둘 다 틀렸다고 해도 된다.

서로 대립하는 의견들 중 어느 의견이 옳은지에 대하여 논증 에세이를 쓰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하나는 그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지 아닌지를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니까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입장의 허실을 비교적 알기 쉽다는 것이다. 장점은 지지자가 말하고 단점은 비판자가 말한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직류/교류 논쟁을 예로 든다면, 직류 체계의 문제점은 테슬라가 설명할 것이고 교류 체계의 문제점은 에디슨이 설명할 것이다. 이 것은 옛날에 중고차 살 때와 비슷하다. 자동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중고차 살 때 시승해본다고 하고 그 차를 끌고 다른 중고차 가게에 가서 사장한테 이 자동차 팔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냐고 물으면 그 가게 사장이 그 자동차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다 짚어준다.

논증 에세이는 대체로 서론-본론-결론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세분하면 다섯 부분이 된다. 1절은 서론, 2절은 기존 입장, 3절은 기존 입장에 대한 기존 비판, 4절은 글쓴이의 의견, 5절은 결론이다. 이 중 2절부터 4절까지가 본론이다. 서론에서는 이 글을 왜 쓰고 어떤 목적에서 쓰고 어떻게 쓸지를 쓰고, 결론에서는 본론에서 한 말이 무엇이고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함축하는지를 쓴다. 2절과 3절에서는 기존 입장과 그에 대한 기존 비판을 정리하는데, 어느 지점에서 두 입장이 충돌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두 입장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등을 잘 정리해놓으면 4절에서 주장을 개진할 때 부담이 줄어든다.

3절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존 이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펼치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다. 학생들이 기존 비판에 대한 검토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주로 필요성을 모르거나, 필요성을 알지만 다른 과제도 많아서 금방 과제를 끝내려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판을 끌어오면 자기주장의 독창성이 희석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절을 건너뛰면 글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남들이 논의하지 않은 것을 처음 논의한다면 보통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기발한 것이거나 논의할 필요도 없어서 논의하지 않은 것일 텐데, 보통은 후자이므로 기존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 설사 글쓴이의 비판이 옳더라도 기존 비판을 검토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쉽다. 맞는 말이지만 이미 이전에 더 맞는 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쓴 글이 맞는 내용이지만 쓸모없게 된다. 그래서 선행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이 정도 설명하면, 학생들은 대부분 “아, 글을 다시 써야겠네요”라고 먼저 말하거나, 글을 다시 써야하지 않겠냐는 나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한다. 내가 글을 잘 썼는데 조교인 당신이 글을 볼 줄 몰라서 그런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글을 다시 쓰겠다는 다짐을 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수업에서는 이대열 교수의 『지능의 탄생』을 읽고 논증 에세이의 주제를 잡아야 하는데, 그 책은 매끄럽게 쓴 교양서적이라 그 책만으로는 논쟁점을 찾기 어렵다. 그런 경우는 책만 읽어서는 안 되고 책 내용과 관련된 내용을 따로 찾아야 한다. 책에 나오는 내용 중 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는 것이 있고 논쟁 중인 것이 있을 텐데, 논쟁 중인 것을 찾아서 그와 관련된 논증 에세이를 쓴다. 책과 관련된 책 이외의 내용을 찾고 분석하는 최소한의 과정이 필요하다. 교양 수업이니 굳이 논문까지 찾을 필요는 없고, 구글에서 한국어로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쓴다. 물론, 그대로 긁어서 붙이면 표절이 되기 때문에 자료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공과 분석이 동반되어야 한다. 과제의 취지는 논증 에세이의 형식에 맞는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로 논문을 쓰는 것은 아니므로 자료 찾는 데에 너무 힘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글을 쓸 때 추가로 고려할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논쟁지점을 다룰 때 최대한 범위를 좁혀야 한다는 것, 정해진 기간에 글을 완성할 수 있는지 견적을 내면서 작업할 것, 어떤 자료를 찾을 때 어떤 자료가 나올지 예상하면서 찾을 것, 꼼꼼히 읽지 않고도 글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쓸 것 등이다.

그런데 논증 에세이를 쓰기를 이런 방식으로 지도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논증 에세이는 어떤 주제나 문제에 대하여 논증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다루는 범위를 한정해야 하는지 말이다. 어떤 주제든 논증만 하면 논증 에세이인 것은 맞다. 맞는 말이지만 교육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다. 학부생들한테 논증 에세이를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결국 쓰나마나한 글이나 쓰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것을 어떤 사람이 생각해낸 다음 “몰랐지, 요놈들아?” 하면서 기가 막힌 논증 에세이를 썼다고 하자. 이에 대한 선행 연구도 없으니 기존 비판을 고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놀라고 그 에세이를 쓴 사람은 교과서에 실릴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미 대가이므로 학부 글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학 교재에도 나오고 모두가 맞다고 생각해서 고려할만한 기존 비판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 그게 틀렸다고 하는 논증 에세이를 썼다고 하자. 그 에세이의 내용이 정말 맞다면 그 에세이를 쓴 사람도 이미 대가이므로 역시나 학부 글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대가가 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대가가 아니므로 그에 맞게 글쓰기를 가르쳐야 한다.

글쓰기 과제를 내주면서 선행 연구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논증을 하라고 하면, 억지 논증을 만드느라 망상 경연대회 같이 되거나, 분량을 억지로 늘리느라 채점 방해를 위한 필리버스터 같은 것이 되기 쉽다. 학부 글쓰기 수업 조교가 되어서야, 내가 학부 때 문과대를 다니면서 본 글이 죄다 왜 그렇게 이상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상한 글을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공 수업 중 상당수는 중간고사도 건너뛰는 판이어서 글쓰기 과제 같은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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