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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3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에 나오는 물고기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에 나오는 물고기가 내 기말보고서보다 낫다. 그래도 뼈대는 있기 때문이다.





(2018.12.23.)


2019/02/19

회색 고양이가 된 화천이



주말에 집에 갔더니, 화천이와 새끼가 회색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어째서 저렇게 되었느냐고 내가 물으니, 어머니는 화천이가 새끼를 끌고 다니더니 어디서 숯검정을 묻혔는지 깜장 고양이가 되어 돌아왔다고 하셨다. 그나마 며칠 동안 하얗게 되어서 회색 고양이가 된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어디서 굴뚝을 타고 다니나? 화천이가 산타냐?” 기억을 더듬어보니, 화천이는 꼭 겨울만 되면 어디서 숯검정 같은 것을 묻히고 왔다.










(2018.12.19.)


2019/02/09

동방 박사와 아기 예수



성탄절이 몇 주 안 남았는지, 오전 예배 때 부른 찬송가 중에는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찾아왔다는 내용의 것도 있었다. 그 찬송가를 부르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동방 박사가 아니라 동방 석사나 동방 박사과정생이었다면 다른 박사들한테 밀려서 아기 예수를 만날 기회를 놓쳤을 텐데. 동방 박사들은 박사라서 좋았겠다. 나는 언제 박사 학위를 받나. 받을 수는 있나.’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온 이야기는 마태복음 2장에 나온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집을 찾는다.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본 박사들은 엎드려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 예물을 담은 보배합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예물은 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2018.12.09.)


2019/02/08

<물리학의 철학> 수업에서 얻은 교훈

법학 학술지에 윤리학 논문이 실리기도 한다. 윤리학의 주제 중에는 법학의 주제와 연결되는 것이 있어서 그렇다. 계량화된 실적만 놓고 보면, 동일한 논문을 윤리학 학술지에 싣는 것보다 법학 학술지에 싣는 것이 이득이다. 왜냐하면 법학 학술지가 요구하는 철학 수준은 철학 학술지가 요구하는 수준보다 낮지만 피-인용수는 법학 학술지에 실렸을 때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법조인과 결혼하게 된다면 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법학 학술지에 공동 저자로 논문을 싣고 피-인용수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분야의 여성을 만나도 이 전략을 유지할 수 있다. 부인이 의료인이면 의료 윤리 논문을 싣는 식이다. 나는 이 것이 괜찮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물리학의 철학> 수업을 듣고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부인이 물리학자라고 해도 나는 물리학의 철학에 관한 논문을 쓰지 않을 것이다. 물리학도 모르는 주제에 물리학의 철학에 손을 대봐야 똥이나 만들어낼 게 뻔한데, 괜히 물리학의 철학을 하자면서 부인 옆에서 알짱거리면 별다른 산출 없이 부인이 하는 연구나 방해하게 될 것이다. 부인이 물리학을 연구하든 물리학의 철학을 연구하든, 나는 조용히 가사노동을 하면서 부인이 연구에 전념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그게 가정에도 도움이 되고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겠다.



(2018.12.08.)


2019/02/07

시트콤 <지칭 이론> - 밀고 편

   

혹시라도 미국 시트콤 <빅뱅 이론>을 따라 해서 한국에서 <지칭 이론>이라는 시트콤을 만든다면,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그 시트콤의 작가가 된다면, 에피소드 중에 <밀고>라는 편을 넣을 것이다. 지도교수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원생이 그 사실을 들킨 뒤 밀고자를 추적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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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원생 연구실
  
- 한식: “이번에 ◯◯구청에서 강의한다면서요?”
- 덕용: “아, 그거 뭐, 강의라고까지 할 건 없고 어떻게 소개가 들어와서 아르바이트 하게 된 거예요.”
- 경태: “강의 준비는 많이 하셨어요?”
- 덕용: “예전에 다른 데서 해봐서 별로 준비할 건 없어요.”
- 한식: “예행연습 같은 것도 안 해요?”
- 덕용: “뭐, 그냥 하면 돼요.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어요.”
- 한식: “뭔데요?”
- 덕용: “내가 아르바이트 하는 내용이 신문에 났어요. 구청에서 홍보 기사를 냈나 봐요. 공무원들이 일을 열심히 할 줄 몰랐는데, 큰일이네. 지도교수님 알면 안 되는데.”
- 원호: “지도교수님이 그런 거 하지 말래요?”
- 덕용: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지금 까불고 다닐 처지가 아니잖아요. 공부를 딱히 잘 하는 것도 아니고.”
- 원호: “지도교수님도 괜찮다고 할 걸요? 선배가 이상한 거 하지 않을 텐데.”
- 덕용: “그래도 좀 그렇죠. 다른 선생님 제자 중에는 이번에 해외 학술지에 논문 실은 사람도 있는데 우리 선생님 제자는 아르바이트 하고 다닌다고 그러면 좀 안 그렇잖아요. 대학원생들 중에 막 까불고 다니는 애들 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책 내고 연구도 못하는 주제에 소개하라고 하면 꼭 연구자라고 소개하고 글도 못 쓰는데 신문 칼럼 같은 거나 쓰고, 그런 애들 보면 아름답지 않더라고. 내가 소주 한 병 먹고 써도 걔네들보다 훨씬 잘 써요. 그런데 왜 안 합니까. 공부 못하는 주제에 까불고 돌아다니면 지도교수님께 누가 되고 대학원에 누가 될까봐 그러는 거죠. 하여간 지도교수님이 알면 안 돼요. 안 돼 안 돼. 지도교수가 걱정해. 안 돼.”
  
  
#2 택시 안
  
- 교수: “덕용이”
- 덕용: “네, 선생님.”
- 교수: “이번에 ◯◯구청에서 강의한다면서?”
- 덕용: “네? 어... 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 교수: “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 덕용: “못 하게 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씀 안 드린 것은 아닌데, 그런 거 한다는 걸 아시면 걱정하실까봐 굳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교수: “걱정은 뭐. 자기일 잘 하면서 하면 되지. 전공자들이 일반인들에게 자기 전공 알리는 것도 좋은 일이에요. 그런 거 하면 잘 할 건 같은데 뭐.”
- 덕용: “네, 수강생들은 좋아합니다만... 그런데 제가 그 일 하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구청에서 현수막 붙인 것 같지는 않던데...”
- 교수: “그냥 뭐.. 그냥 알게 됐지.”
- 덕용: “혹시 검색해서 신문 보고 알게 되신 건가요? 구청에서 공무원들이 일을 열심히 할 줄은 몰랐어요.”
- 교수: “구청에서 그런 행사를 하면 공무원들이 당연히 알리는 게 맞지.”
- 덕용: “그러면 신문을 보신 건가요? 저하고 이름이 같은 연예인이 있어서 이름만 검색해서는 그게 잘 안 나올 텐데.”
- 교수: “그냥 뭐.. 어떻게 알게 됐어.”
  
‘선생님은 신문을 보고 안 게 아니다. 우리 중에 밀고자가 있다.’
  
  
#3 대학원생 연구실
  
“한식씨, 나 이번에 도봉구청에서 아르바이트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난 번에 봤잖아. 우리 중에 밀고자가 있어요.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요.”
  
“경태씨, 이번에 서초구청에서 아르바이트가 들어왔는데...”
  
“원호씨, 강남구청에서...”
  
“병기형, 혹시라도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요. 이번에 양천구청에서...”
  
  
# 4 교수 연구실
  
- 교수: “덕용이 이번에 또 어디서 뭐 한다면서?”
- 덕용: “아, 들으셨습니까.”
- 교수: “어디였다던가... 어...”
  
덕용은 지도교수의 입술을 본다. 지도교수는 입술이 가운데로 모은다. ‘도봉구청을 말하려는 건가. 한식이 그렇게 안 봤는데. 이런 씨...’ 입술이 미묘하게 움직이더니 이렇게 말한다.
  
- 교수: “음... 음... 아, 양천구청? 맞지?”
  
‘잡았다!’
  
  
- 끝 -
  
  
(2018.12.07.)
    

2019/02/05

글의 통일성을 해친 사례 − 김우재 박사의 “목사 다음 교수”

글쓰기에서 정말 기초적이고 당연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키지 않는 것 중 하나는, 글 한 편에서 한 가지 주제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짧은 글일수록 이 점에 더 신경 써야 한다.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겠다고 엉뚱한 내용을 섞으면 글이 망한다. 굳이 두 대상을 글 한 편에서 다루고 싶다면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어떻게 한 범주로 묶이는지, 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겨레>에 실린 “목사 다음 교수”라는 글을 보자. 글쓴이에서 첫째 문단에서 부도덕한 목사들의 사례를 나열한 뒤, 둘째 문단에서 부도덕한 교수들을 나열한다. 글쓴이가 제시한 사례만 놓고 보면 두 사례 사이에는 부도덕성 이외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왜 부도덕한 목사를 부도덕한 스님이나 부도덕한 의사나 부도덕한 공무원하고 묶지 않고 부도덕한 교수와 묶는지를 설명해야 정상적인 글이 된다. 교수도 싫고 목사도 싫은데 마침 글 한 편에서 한 방에 둘을 욕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답한다면 글이 망한 것이다. 글쓴이는 두 집단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목사와 교수 모두 본인의 도덕성과 상관없이 무작위 대상에 대한 도덕적 권위를 획득한다. 목사는 학벌, 설교 등을 기준으로 교회에 임용되고, 목사의 도덕성은 교회의 성장이라는 기준에 밀린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박사 학위는 도덕성을 가르치는 과정이 아니다. 도덕성 검증도 받지 않고, 전문직으로 임용된 이들이, 연구실의 왕이 되어 학생들을 다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교수 모두 신자와 학생에게 도덕적 기준을 강요한다. 말도 안 되는 구조다.


둘째, 비리가 터질 때마다 그들 모두 일부의 일탈이라고 변명한다. 그 변명은 교계와 학계에 받아들여지고, 징계는 가볍다. 그들은 시스템의 승리자다. 또한 암묵적 공범자인 교계와 학계의 네트워크가 그들을 보호해줄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이런 범죄는 절대 뿌리 뽑힐 수 없다. 언론이 매일 목사와 교수의 범죄를 발견해 대서특필해도 마찬가지다. 그건 검찰과 사법부의 비리가 벌써 반세기 넘게 언론에 의해 폭로되었어도, 여전히 그들이 한국을 지배하는 현실과 같다.


안타깝게도, 글쓴이는 교수도 싫고 목사도 싫은데 마침 글 한 편에서 한 방에 둘을 욕하고 싶어서 글을 이렇게 썼다고 실토하고 만다. 글쓴이의 주장과 달리 “목사와 교수 모두 본인의 도덕성과 상관없이 무작위 대상에 대한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이 그러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런 기대치는 정도만 다를 뿐 유치원 교사에게도 있고 신부에게도 있고 공무원에게도 있다. “비리가 터질 때마다 그들 모두 일부의 일탈이라고 변명”하고 집단에서 용인한다는 점은 글쓴이도 말하듯이 “검찰과 사법부의 비리”에도 공통된다. 이는 교수와 검사가 묶이는 것이 아니라 교수와 목사가 묶여야 하는 이유가 할 이유가 없었음을 글쓴이가 스스로 밝힌 것이다.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둘 다 나쁜 놈이니 둘 다 존경하지 말고 둘 다 욕하자는 것뿐이다. 글쓴이가 교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겠으나 이런 식으로 욕하면 욕의 효과가 반감된다. 관련 없는 두 대상이 글 한 편에서 엉키니 글의 통일성이 떨어져서 글쓴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련 없는 두 대상을 글 한 편에서 동시에 욕하는 것보다는 한 대상을 욕하는 글을 두 편 쓰는 것이 낫다. 물론, 그보다 더 나은 것은 그런 수준 낮은 글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이다.



* 링크: [한겨레] 목사 다음 교수 / 김우재

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0889.html )



(2018.12.05.)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