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잡담 - 2020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잡담 - 2020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1/02/28

정경심 교수 1심 판결에 대한 정의당의 논평

     

     

정경심 교수가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것에 대하여 정의당은 “법원의 결정을 원칙적으로 존중”하고 “최종 판결이 아닌 만큼 재판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의당의 수석대변인이 서면 브리핑한 것이다.

 

 

 

 

나는 개인이 모든 사안을 다 알 수도 없고 모든 사안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판단력도 좋지 않으면서 쓸데없이 사안마다 죄다 관심을 가지면, 뜻하지 않게 괜히 흥분해서 핏대나 세우고 주변 사람한테 시비나 걸게 된다. 깨어있는 시민이 되기 전에 주말에 깨어있는 상태가 되도록 주중에 건전한 생활을 하는 건강한 생활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나 조국 사태처럼 사람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릴 때 굳이 남들보다 먼저 의견을 가지지 말고 이낙연처럼 사안마다 엄중하게 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15년 전 황우석 사태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는 체 하고 염병하다가 망신당했는지를 떠올려본다면, 굳이 쥐뿔도 아닌 내가 남들보다 선제적으로 의견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당은 개인과 다르다. 정당이 이낙연처럼 사안을 엄중하게만 보고 있으면 곤란하다. 개인이 불필요하게 흥분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려면, 정당이 앞장서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의견을 정리하고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일을 하라고 정당이 있는 것이지, 그저 사람들의 의견이나 모으고 앉아 있으려면 여론조사 업체를 차리든지 정치인 팬클럽이나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정의당은 이낙연보다 지지율도 낮으면서 왜 이낙연처럼 사안을 엄중하게 보고만 있는 것인가?

 

기술적으로만 가능하다면 <AI 조국>이 정의당 논평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조국 교수는 자기와 무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시의적절한 논평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사안은 조국 교수의 개인일이라 날카로운 논평을 내놓기 힘들 테니 <AI 조국>이 대신 논평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방송을 보니 생전 자료를 모아서 <AI 김현식>이 노래를 부르게 하던데, 조국 교수의 페이스북 게시글이나 트위터 글을 모아서 <AI 조국>을 만들 수는 없나?

  

    

  

  

(2020.12.28.)

     

2021/02/27

이괄의 난과 윤석열의 난

     

내가 역사학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역사에서 당장 지금 써먹을 수 있는 어떤 교훈이나 시사점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태도는 이상해 보인다. 얻어내고자 하는 교훈이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상당수의 역사 연구에서는 당장 써먹을 만한 교훈을 뽑아내기 힘들다. 정치사에서는 억지로 그런 교훈을 뽑아낼 수 있다고 치자. 어떤 왕이나 어떤 대신이 잘난 놈을 어떻게 보내고 못난 놈을 어떻게 제꼈는지 안다면 개인 처세나 조직 운영에 약간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역사학에 분야가 너무 많다. 문화사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이며, 경제사에서 무슨 시사점을 얻을 것인가? 로마 사람들이 기생충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에서 도대체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구충제를 잘 먹어야 한다는 것?
 
특히나 말도 안 되는 것은, 라디오 프로그램 같은 데서 시사를 역사로 풀어낸다고 하는 코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현실 정치에 어떻게든 한 마디 하고 싶은 사람들이 출연해서 역사 같은 소리를 하는 모양인데, 그런 소리 하는 사람 치고 역사를 제대로 살펴보거나 현실 정치에 통찰을 던져주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왕조 시대 권력 다툼이나 가지고 와서 오늘날의 정치를 논하니 권력 다툼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며칠 전에 “이괄의 난이 될 윤석열의 난”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았다. 민주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자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괄의 난과 윤석열의 난이 어떤 유사점이 있나? 영상에 따르면,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고 오만한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윤석열이 이괄이면 모든 게 이상해진다. 문재인은 인조가 되고, 촛불집회는 인조반정이 되고, 박근혜는 광해군이 되고, 최순실은 김개시가 되고, 김기춘은 이이첨이 된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욕하는 데 눈이 뒤집혀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인가?
 
역사 비-전문가들이나 썰쟁이들이나 사기꾼들이 역사에서 어떻게든 교훈을 얻어내려고 역사를 자기 편의대로 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괄의 난이 될 윤석열의 난”에서 이괄을 윤석열에 빗댄 사람은 현직 사학과 교수이다. 그 교수가 윤석열한테 쌍욕하는 영상을 찍든 윤석열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칼로 찌르든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닌데, 코 묻은 돈 털어먹으려는 사교육 강사도 아니고 왜 현직 사학과 교수가 그러느냐는 말이다. 현직 교수가 그런 식으로 역사를 대하면 역사 무식자들이 역사학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가뜩이나 역사도 모르는 놈들이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염병들을 하는 판인데 도대체 사학과 교수가 뭐 하는 짓인가. 추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2020.12.27.)
     

2021/02/25

학자들의 서프라이즈 파티



가수들이 존경하는 가수에 대한 헌정 음반을 만들 듯이, 철학자들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에 대한 비평 선집을 낸다. 해당 철학자의 업적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글을 엮어서 책으로 낸다. 그러한 책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 철학자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헌정 앨범과 달리, 비평 선집에는 해당 철학자가 동료 학자들의 비평에 대해서 그에 답변하는 글을 일일이 덧붙인다.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대한 비판하니까 그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을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하트만(Stephan Hartmann) 등이 편집한 『Nancy Cartwright’s Philosophy of Science』(2008)에는 원고 열여섯 편이 실렸고, 카트라이트는 서론을 제외한 열다섯 편에 일일이 답변을 달았다. 비평 선집인데 해당 철학자의 반박이나 해명이 없는 경우는 그 철학자가 이미 죽은 사람인 경우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경제학의 철학의 경우, 2012년에 출판된 우스칼리 매키(Uskali Mäki)의 철학에 대한 비평 선집에는 매키의 답변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 책의 서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편집자들은 매키에게서 논문에 대한 응답을 받지 않았다. [...] 가장 큰 이유는 헬싱키에서 2011년 9월 4일에 하는 <경제학 방법론에 관한 국제 네트워크 학회>(INEM Conference)가 열리기 전까지 이 책을 쓰는 것을 매키에게 숨기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가 경제학에 대한 매키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는 책을 함께 쓴다는 사실이 매키에게 뜻밖의 기쁨(pleasant surprise)을 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p. 31)

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종의 서프라이즈 파티를 하는 모양이다. 독특한데 나름대로 멋진 방식인 것 같다.

* 참고 문헌: A. Lehtinen et al. (eds.)(2012), Economics for Real: Uskali Mäki and the place of truth in economics (Routledge)

(2020.12.25.)


2021/02/22

독일 사람이지만 저도 처음 들어 봤어요



설민석이 방송에서 또 틀린 내용으로 뻥치다 걸려서 욕먹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튜브에서 해당 영상의 일부를 찾아보았다. 설민석이야 욕을 먹든 말든 상관없는데, 게스트로 나온 사람들의 행동이 유독 눈에 띤다. 어차피 모두 대본대로 말하고 반응하고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이상해 보인다. 서울대 경영대씩이나 나온 아나운서는 역사 비-전문가가 개뻥 치는 데도 너무나 격하게 동조하는 반응을 보이고, 독일 사람은 아무리 조상들이 죄를 많이 지어도 그렇지 조상이 하지도 않은 짓까지 미안해하고, 이탈리아 사람은 멀리 한국에까지 와서 로마 역사 가지고 농락당한다.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몰래카메라 코너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2020.12.22.)


2021/02/21

<조선일보>의 창의성



<조선일보> 2008년 9월 29일자 기사 중에는 이런 글이 있다.


크리스터 리젤리우스 카오스필롯 학장은 “물이 반쯤 들어 있는 잔을 보고 ‘반밖에 없네’라는 생각과 ‘반이나 남았네’라는 두 가지 생각을 모두 할 수 있는 ‘21세기형 창의적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 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1등 신문이라 뭔가 다르기는 다른 모양이다.





* 링크(1): [조선일보] 일본 이르면 내년 3월 코로나 백신 접종 시작

( www.chosun.com/international/2020/12/18/2ILI4U664BGS5OI5E5DSGJQVXU )

* 링크(2): [조선일보] 한국 빨라야 2~3월 접종... 구매 계약은 100만 명분이 전부

( www.chosun.com/national/welfare-medical/2020/12/09/NTJWDPS4NBGUNFJGGRRJLQROKE )

* 링크(3): [조선일보] “학생들 마음속 잠자는 창의성 깨우는 게 목표”

(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28/2008092800958.html )

(2020.12.21.)


2021/02/20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학과>로



내가 다니는 대학원이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학과>로 바뀐다. 이름만 바뀐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정확히 뭐가 바뀌는지는 모르겠다. 협동과정에서 정식 학과로 바뀌면 몇 가지 좋은 점이 생긴다고 들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선생님들이 알아서 잘 하셨을 것이다.

협동과정의 이름에 있던 ‘과학철학’이 빠지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는다. 교수 임용할 때 실적으로 뽑지 소속 이름으로 뽑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교수들이 다 제정신인 것은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래도 학과 이름에 철학이 안 들어간다고 임용에 문제가 생기겠는가.

협동과정을 학과로 바꾸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번번이 실패하다가 이번에 성공한 것인데, 과학정책 전공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과학정책 전공이 다른 전공보다 정부 지원을 많이 받기도 하고, 업무 처리 면에서도 다른 전공보다 능숙했을 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으로 시작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은, 이후에 과학기술학 전공이 추가되었고, 얼마 전에는 과학정책 전공이 추가로 개설되었다. 과학정책 전공이 개설되기 몇 년 전에 협동과정의 정체성에 관하여 생각해보자는 행사도 있었다. 정체성 뭐시기 행사라고 해서 나는 ‘사춘기도 아니고 무슨 놈의 정체성이야? 자기 연구나 잘 하면 됐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행사 때 나는 뒷자리 구석에서 딴 짓이나 하다가 저녁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기억하지도 못한다.

물론, 굳이 따저본다면, 정체성 뭐시기 행사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같은 소속 대학원생 중에는 과학기술학 전공 석사과정으로 입학하여 석사학위 취득 후 과학정책 박사과정으로 입학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곳에 가서 “40년 전통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기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원에서 과학정책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다”고 자기자신을 소개하면, 정상적인 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마치,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100년 전통의 <공화춘>에 함흥냉면 먹으러 갔다가 재료가 떨어져서 꼬마돈가스 먹고 나왔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협동과정이 과학학과로 바뀌어서 확실하게 좋아지는 점은 서류 작성할 때 편해진다는 것이다. 서류 작성할 때마다 소속란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라고 써야 하기 때문에 항상 칸이 넘치게 되고, 그래서 글자 크기를 줄이거나 칸 밖에 글자를 써야 했다. 이제는 소속명이 짧게 바뀌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밖의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협동과정이 과학학과로 바뀌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동안 내가 추적하던 <◯◯◯ 코드>의 비밀을 더 이상 알아내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협동과정 졸업생 중에는 자기가 쓴 책 등에 자신이 “과학사 협동과정”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쓰는 사람이 있다. 오타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번하게 나타나서 어떠한 비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일종의 코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책이나 논문의 앞부분에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하다가 중간이나 끝에서는 “과학사 협동과정”이라고 하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설마 과학철학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소속명을 그렇게 쓰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유치하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는가?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나는 <다빈치 코드>에서 착안하여 해당 졸업생의 이름을 따서 그 코드의 이름을 <◯◯◯ 코드>라고 명명했다. 협동과정에 템플 기사단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 졸업생이 일루미나티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어쨌든 어떤 메시지가 있으니 저작마다 반복하여 그런 코드를 넣지 않겠는가 추측할 뿐이다. 내가 그동안 제안한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 코드>도 정식 학술 용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코드>의 비밀을 밝히려면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한데, 협동과정이 과학학과로 바뀌면서 이제 더 이상 <◯◯◯ 코드>는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 코드>의 비밀도 미궁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과학학과”를 “과학과”나 “과과”라고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 뱀발: 내가 협동과정이 학과로 바뀌면서 <◯◯◯ 코드>의 비밀을 알아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자 동료 대학원생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 ‘과학학과’를 ‘과학사학과’로 쓸 걸요? 열두 글자에서 네 글자 빼는 것보다는 네 글자에서 한 글자 더 하는 게 더 쉽고 티도 덜 나잖아요.” 내가 이 생각을 왜 못 했을까. <◯◯◯ 코드>의 새로운 변형이 나오는지 지켜보아야겠다.

(2020.12.20.)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