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1

수업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망치는 방법



동료 대학원생이 고등학교에서 강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면서 나에게 그런 아르바이트의 꿀팁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꿀팁 같은 것은 없고 그냥 상황 봐서 그냥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되는데 학교에서 자기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면 약간 난감할 수도 있다고는 했다.

동료 대학원생은 수업 중 학생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법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나는 학생의 참여 같은 것은 유도할 필요가 없고 강사가 말을 재미있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학생이 수업 중에 답변 좀 한다고 퍽이나 능동적인 학습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학생이 능동적으로 뭘 하게 하려면 학생들이 스스로 수업 전에 어떤 작업을 하게끔 애초에 수업 설계를 다르게 해야 하는 것이지, 똑같은 수업에서 입 벌리고 몇 마디 한다고 능동적인 학생이고 말 안 하고 있다고 수동적인 학생인 것이 아니다.

동료 대학원생은 이런 질문도 했다. “학생을 지목해서 질문하는 것이 수업 분위기를 좋게 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강사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수업 분위기에 도움이 되냐고?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교수나 강사들이 수업 중에 왜 그렇게 쓸데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는지.

수업 분위기가 우중충하다고 하자. 학생들 중 한 명을 지목해서 질문을 하면 그 학생이 답변을 똑바로 할까? 아무나 질문을 했는데 답변을 똑바로 할 상황이었다면 애초에 수업 분위기가 우중충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중충한 수업에서 학생에게 질문을 하면 분위기가 더 나빠진다. 그나마 진행되던 수업의 흐름은 끊길 것이고, 학생들은 침묵하거나 질문을 외면하거나 모른다고 잡아뗄 것이고, 그나마 수업에 집중하던 학생들도 산만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으면 다른 학생을 지목해서 질문하면 된다. 그러면 학생들은 강사의 시선마저 피하기 시작할 것이다.

정 그렇게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아내고 싶으면, 학생들이 답변할 준비를 시켜놓고 질문을 해야 한다. 분위기가 좋아질 때까지 학생에게 질문을 하지 말고 차라리 강사가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 낫다. 이상해보이지만 이상하지 않은 질문을 하고 이상해보이지만 이상하지 않은 답변을 하고 이게 왜 이상하지 않은지를 설명하고, 이런 식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몇 번 하다보면 학생들이 약간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오, 내가 한 마디 멋지게 해서 저런 이상한 이야기를 안 하게 하고 싶다’고 학생들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질문을 하면, 학생들이 얼마나 멋진 대답을 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업 분위기는 나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인 교양 강의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다. 정규 교과목 같은 데서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정규 교과목에서는 정해진 내용이나 그냥 꾸역꾸역 가르치고, 학생들이 문제를 잘 푸나 못 푸나 확인하고, 잠깐 정신 놓아서 흐름을 일시적으로 놓친 학생이 흐름 따라잡게 신경 쓰면 되는 것이지, 굳이 수업 중에 쓸데없는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2020.10.31.)


2020/12/30

석사학위논문 초고 발표회



동료 대학원생이 협동과정에서 열린 석사학위논문 초고 발표회에서 발표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대학원생이 해당 대학원의 학위논문 초고 발표회에서 발표를 하는 것이 왜 이례적인 일인가? 그동안 과학철학 전공 대학원생들은 관련 전공자들만 참석하는 초고 발표회를 해왔기 때문이다.

초고 발표회 며칠 전에 발표자가 전공자 단체 카톡방에 질문을 올렸다. “과정 조교가 초고 발표회 때 발표할 거냐고 물었는데 어떻게 하죠?” 나는 발표자가 발표하고 싶어 하는데 아직 확신이 없어서 그런 질문을 한다고 판단하여 바람을 잡았다. 결국 해당 발표자는 과정 단위의 초고 발표회에서 발표하기로 했다.

나는 초고 발표회에 관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논문 초고가 이미 나왔고 문제없이 통과될 것이었다. 어려운 건 다 끝났는데 비-전공자들 앞에서 20분 동안 이야기하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전공자 앞에서 말하는 것이 어렵지 비-전공자 앞에서 말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어차피 비-전공자들은 해당 내용을 전혀 모를 것 아닌가. 그런데 연구실에 가서 보니 발표자의 얼굴빛이 안 좋았다. 발표자가 나에게 물었다. “구조적 실재론을 어떻게 20분 안에 설명하죠?” 이건 제한 시간 내에 논문 서론을 설명하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다. “아, 관찰불가능성을 설명하는 것부터 문제인데...” 이건 슬라이드 한 쪽을 설명하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다. 상황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그때서야 알았다. “논문 내용을 설명할 자신이 있어서 그때 단체 카톡방에서 물어본 거 아니에요?”, “아닌데요, 그냥 과정 조교가 발표할 거냐고 물어봐서 그냥 물어본 건데요.” 내가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다.

발표자는 이렇게 발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전공 하는 사람들한테 20분 동안 설명해봤자 석사 논문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모를 것이고 그러면 10분 동안 질문 받아봤자 소용없는 거 아니냐, 그런 발표는 다른 사람들의 시간만 빼앗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요즈음은 다들 80-90살까지 사니까 30분 정도는 빼앗아도 돼요.” 발표자는 이 개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저 원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근심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발표자와 대화하면서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았다. 바로, 청중들에게 논문의 내용을 이해시키겠다는 그런 학자적 태도, 교육자적 태도가 문제였다.

해당 전공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20분쯤 듣고도 유의미한 질문을 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천재이거나 해당 분야가 전문성이 결여된 미성숙 분야인 것이다. 해당 전공에 대해 거의 모르는 사람에게 20분 동안 설명해서 그 사람이 논문 내용을 이해하게 만들라는 것은 사기를 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사기를 치면 되는 일 아닌가? 해답은 간단하다. 사기를 친다. 끝.

그동안 과학철학 전공자들이 전공자들끼리만 초고 발표회를 했던 것은 과정 단위의 초고 발표회에서는 제한된 시간(발표 20분, 질의응답 10분) 동안 논문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고 유의미한 질문이나 의견도 받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공자들끼리 초고 발표회면 충분하지 굳이 힘들여서 소득도 없을 별도의 발표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다들 생각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다. 그런데 이는 초고 발표회의 목적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초고 발표회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초고 발표회라고 해도 어디서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 목적이 다르다. 전공자들끼리 하는 초고 발표회는 논문 초고의 결함을 찾고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하여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는 자리다. 그러면 다른 전공자들과 함께 하는 초고 발표회는? 우리 전공이 이렇게 가치 있는 연구를 하는 분야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자리다. 비유하자면, 전공자들끼리 하는 초고 발표회는 ICBM 연구자들이 성능을 개선하고 결함을 줄이기 위해서 하는 세미나 같은 것이고, 다른 전공자들과 하는 초고 발표회는 그렇게 개발한 ICBM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열병식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핵무기에 경외감을 가지는 것은 핵 물리학에 정통해서가 아니라 핵무기의 강력한 위력에 놀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고 발표회에서는 세세한 내용에 신경 쓸 것 없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논의 구도가 잘 짜여있다는 것과 그러한 논의 구도에서 해당 논증이 강력하다는 인상만 받게 하면 된다.

그러면 왜 이런 대외적인 작업을 해야 하는가? 우선, 과정에서 과학철학과 과학사, 과학기술학, 과학정책과의 접점이 별로 없다. 신입생들이 필수 과목을 같이 들을 때를 빼고는 같은 수업을 듣지도 않는다. 그래서 초고 발표회 같은 공동 행사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당장은 과학철학 대학원생이 다른 전공자들과 하는 학문적인 교류나 협력이 거의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공동 작업할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리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공동 작업을 하는 데 동업자들이 철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할 법한 오해를 하면 작업 능률이 떨어질 것이므로, 그런 오해의 여지도 미리 제거해야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말장난이나 하거나 하고 밑도 끝도 없이 근본 없는 단어나 만들어 내거나 브레인스토밍이나 하는 것이 철학인 줄 안다. 그런 나쁜 풍토에 인접 분야 전공자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미리 방역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고, 그래서 미리 과학철학의 위용을 드러내고 논증의 강력함을 강조해야 한다.

이렇게 발표자에게 자신만만하게 발표자에게 말을 해놓았지만 여전히 발표자는 불안해했다. 나는 해당 논문 초고의 내용을 20분 안에 설명하려면 마법이 필요할 테니 마법을 부려보마 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막상 기숙사에 돌아와서 논문 초고를 다시 읽으니 막막해졌다.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닌데 내가 부추겨서 발표를 하게 되었으니 나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다. 통과가 불투명한 논문도 아니고 뻔히 통과될 논문인데,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읽어야 하는가.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왜 남들이 하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굳이 하겠다고 우기다가 낭패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렇게 울면서 후회하고 또 다짐했는데, 왜 나는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나? 그런데 그랬어야만 했다.

논문 초고를 읽다 보니 방법이 보였다. 어차피 다른 전공자들은 우리 쪽 석사 논문 초고를 읽지도 않고, 읽는다고 해도 짧은 시간에 이해하지 못한다. 초점을 맞출 부분은 두 가지다; 논의 구도가 탄탄해보이는가, 논증이 강력해 보이는가. 그렇게 보이게 하려면, 우선 그래야 청중이 발표 시간 내내 이해를 못 해도 기분이 안 나쁘게 만들어야 한다. 해당 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가 그 발표에 대한 인상을 좌우한다. 전공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리에서 신경 써야 할 것은 논리이고,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리에서 신경 써야 할 것은 기분이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참석자들이 기분이 나쁘지 않아야 하고 어떨 때는 상쾌함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한다.

전공자 모임용 파워포인트 자료에는 글자가 너무 많다. 비-전공자용 파워포인트 자료에는 단어 수를 확 줄여야 한다. 발표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 설명 같은 것은 별도의 자료로 만들어서 발표 전에 배포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의 글자 수를 줄여야 슬라이드를 볼 때 짜증이 덜 난다.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파워포인트에서는 공간적 배치가 중요하다. 정보량이 적은 발표에서는 연관성은 낮더라도 예쁘고 신기한 사진이나 보여주면서 슬라이드를 휙휙 넘기면서 별 내용 없는 이야기나 해도 되지만, 정보량이 많은 발표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논의 구도를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구도가 어떻게 된 것인지, 누구와 누가 싸우는지, 누가 더 센지, 발표자는 누구 편인지를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설사 발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뭔가를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논의를 따라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발표를 듣고 곧바로 기억이 휘발되어도 발표자의 탓으로 여기지 않고 기분이 덜 나쁘다. 논쟁 구도를 전쟁사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전장도처럼 표현내야 한다. 그렇게 나는, 해당 논문 내용에 관한 전장도, 그림, 표 같은 것을 몇 개 그려서 발표자에게 보여주었고, 발표자는 이를 일부 참고하여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발표는, 일부 미진한 점은 있었지만,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발표가 끝나고 나는 같은 전공자들에게, 해당 발표가 발표자에게는 작은 한 걸음일 뿐이지만 협동과정에는 큰 도약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반-농담 반-진담으로 말했다.

첫 발표가 무사히 끝났으니 큰 문제가 없는 이상 다음 주자도 과정 단위의 초고 발표회에 참석해야 할 것이다. 사실, 다음 주자도 이미 발표를 결의했다. 다음 석사논문 초고는 계산주의와 메커니즘을 주제로 할 예정이다. 발표 난이도는 이번보다 약간 더 높은 편이지만, 이번에 발표를 도우면서 발표를 돕는 노하우를 약간 터득하게 된 거 같으니, 다음 학기 발표도 이번 학기 발표보다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2020.10.30.)


2020/12/29

자존감이 그렇게 중요한가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과연 이게 정상적인 일인지 모르겠다. 무슨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허구헌날 자존감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가?

한국어 단어 ‘자존감’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는 ‘self-esteem’이다. 그런데 ‘자부심’도 ‘self-esteem’이고, ‘자존심’도 ‘self-esteem’이다. 영어권 사람들이 자존감과 자부심과 자존심이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퉁 쳐서 self-esteem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영어권 사람들이 self-esteem이라고 대충 퉁 치는 것을 한국 사람들이 굳이 세세하게 자존감과 자부심과 자존심을 구별하며 느끼는 것인가.

기분이 좋으면 기분이 좋은 것이고, 화가 나면 화가 나는 것이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마조마하며 신경 쓰는 것은 과연 정신건강에 좋을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못 생겼다고 하자. 정상적인 경우라면 거울을 보고 “아이씨, 못 생겼네” 하고 기분 좀 나쁘고 말면 그만이다. 여기에 자존감이 개입한다고 해보자. 거울 보고 기분이 좀 나쁘고 말 것을 ‘나는 자존감이 떨어졌다’로 이어지고 ‘못 생겼다고 자존감이 떨어지다니 나는 자존감이 낮아서 문제야’ 라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낮으니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존감이 고양되었다고 자기암시를 하고, 그래도 거울을 보면 나는 여전히 못 생겨서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자존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원래는 하나만 문제인데, 자존감 같은 소리에 현혹되어서 결국 문제가 두 개가 된다.

정상적인 심리학자나 심리상담가가 자존감에 대한 언급이나 처방을 한다면 또 모르겠다. 자존감 같은 소리를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무자격자인 자기계발 강사들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지고 삶이 나아진다면 무자격자여도 괜찮은 것 아닌가? 안 괜찮다. 기분 좋은 것은 순간이고 결국 안 좋은 감정을 자가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마약상이 돈을 버는 것과 비슷하다. 마약중독자들은 마약을 할 때만 기분이 좋고 마약을 안 하는 내내 기분이 안 좋게 되어서 결국 마약상에게 계속 돈을 가져다바치게 된다. 허구헌날 책 같지도 않은 자기계발서적 읽고 말 같지도 않은 자기계발 강사들 강의나 듣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자존감 타령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는 자존감을 내내 입에 달고 다니는 자기계발 강사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강사가 강연에서 직접 하고 다니는 이야기다. 그 강사는 그렇게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해놓고도 아들이 고등학교를 자퇴하자 세상이 망한 듯 슬퍼했던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자존감이 중요하다면서, 아들이 감옥에 간 것도 아니고 안구나 고환을 잃은 것도 아닌데, 그깟 고등학교 자퇴한 것을 가지고 자기계발 강사는 그렇게 상심했다. 고등학교 자퇴하고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으로 상심하는가? 해당 사례는 자존심을 고양하든 자존감 강화훈련을 하든 개인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데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2020.10.29.)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