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8

[외국 가요] 프라텔리 (The Fratellis)

  
The Fratellis - Henrietta
  
The Fratellis - Chelsea Dagger
  
  
(2015.08.18.)
   

제2의 맹기용이 될 뻔 했던 나의 아버지

3주 전 주말에 집에 갔을 때, 아버지는 냄비에 희한한 걸 담아오셨다. 냄비 안에 있는 건 회색빛이 도는 걸쭉한 액체였다. 마치 양생해놓은 시멘트 같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국그릇에 담아 밥상에 놓으셨다. 영화 <신세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신세계>의 첫 장면에는 범죄조직이 어떤 남자에게 강제로 시멘트를 먹인 후 드럼통에 담아 바다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물었고 아버지는 닭과 장어를 함께 삶은 것이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친정인 해남에 간 사이에 아버지는 몸살이 났고, 아버지는 보양식으로 그러한 괴상한 음식을 만든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맛 또한 처음 접한 맛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맛이었다.

맛도 맛이었지만 장어 가시가 온 국그릇에 퍼져 있었다. 장어 가시는 생선 가시치고는 굵고 억센 편이다.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장어 가시를 하나 이상 뱉어야 했고, 그러다 결국 장어 가시가 목에 걸렸다. 화가 났고, 너무 화가 나서 순간 치미는 화를 못 참고 “아오, 안 먹어!”하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화가 났다. 내 기억으로는 열한 살 때도 밥 먹다가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음에는 베주머니로 가시를 걸러 내야겠네”라고 했다. 아직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 나: “이걸 왜 만드셨어요?”

- 아버지: “그냥.”

- 나: “아니, 이걸 만든 동기가 있을 거 아니에요. 어디서 뭘 봤다든지.”

- 아버지: “없는데.”

- 나: “어디 음식점을 갔더니 이런 걸 만들더라 하는 것도 없어요?”

- 아버지: “없어.”

- 나: “그러면 텔레비전에서 무슨 맛집에서 이런 걸 만들더라 이런 것도 아니구요?”

- 아버지: “몰라.”

닭은 닭대로 삶아 먹고 장어는 장어대로 구워 먹으면 될 텐데 왜 이런 실험적인 음식을 만들었지는 모르겠다. 어머니는 친정에서 돌아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네 아버지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냐?”

그래도 아버지는 장어의 비린 맛을 없애기 위해 미나리를 넣었다. 맹기용이 식빵에 꽁치를 넣은 맹모닝을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고 내가 놀랐던 건, 요리연구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생선의 비린 맛을 없애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기괴한 음식이나 만드는 나의 아버지도 비린 맛을 없애려고 미나리를 넣는데, 요리연구가라는 사람이 그조차도 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사회적인 성취를 남겼다면, 내 집안이 으리떵떵한 집안이었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꽤 많이 훨씬 더 잘 생겼더라면, 아버지는 케이블에 출연해 요리사들의 혓바닥을 능욕하고 방송을 농락하고 시청자들을 우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결정적인 몇 가지 조건이 받쳐주지 못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그러한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고 그저 내 목구멍에 장어 가시가 걸리게 만들 뿐이었다.

* 링크: [허핑턴포스트] ‘맹장고’ 좀 치워주길 부탁해

( www.huffingtonpost.kr/daymoon-/story_b_7583402.html )

(2015.06.28.)

2015/08/24

초년 성공은 왜 위험한가 - 청년 진보논객들의 사례

인생에 세 가지 위기가 있다고 한다. 초년 성공, 중년 상처, 말년 빈곤이 그것이다. 중년에 부인을 잃고 말년에 가난한 것이 위기인 것은 알겠는데 초년에 성공하는 것은 왜 위기인가. 몇몇 청년 진보논객들의 사례는 초년 성공이 왜 위기가 되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내 기억으로 10년 전 그들은 재기 있는 청년이었다. 몇몇 언론에서도 이들에 주목했고 진중권 같은 사람들이 그들과 같이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젊은 나이에 불멸의 업적을 쌓거나 오래 지속되는 성과를 남겨서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다. 20대에 칼텍 교수가 된 폴링 같은 사람이나 학사학위까지만 받고 (대학원을 건너뛰고) 대학 교수가 된 크립키 같은 사람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청년 진보논객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또래보다 조금 나은 글을 썼을 뿐이다.

폴링이나 크립키 같은 사람들에게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이 있다. 청년 진보논객에게는 그러한 업적이 없다. 그들은 자기 또래보다 조금 나을 뿐이니 자기를 다듬으며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들을 칭찬하니 필요한 것을 더 연마하지 않고 자기 능력을 소진해버린다. 똘똘했던 청년들은 그렇게 성장이 멈추고 평범한 아저씨가 된다. 천재가 일탈하면 천재성의 발현으로 미화될 수도 있지만, 평범한 아저씨가 일탈을 하면 그냥 개저씨가 될 뿐이다.

데이트 폭력 논란에 휘말린 논객 ㅎ는 거의 끝난 것으로 보인다. 논객 ㅎ의 재주가 아까우니 새 사람 되어서 빨리 돌아오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내가 대학원에서 사람들을 만나본 바로는,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만 ㅎ를 대체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1년에 몇백명 이상은 쏟아지는 것 같다. ㅎ에게 대체 불가능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 논객 판에 사람이 적어서 대체가 안 되는 것뿐이다.

논객 ㄴ가 쓴 글에 대한 악평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가 경향신문에 쓴 <페미니즘을 위하여>라는 글을 보니 사람들이 왜 그런 악평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이 글에서 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갈등과 화해 속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도 안 하고 애를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그런 이들이 객석에서 떠들고 있는 한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합창곡은 울려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묵묵히 연대하자.

여자들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을 그리는 동안 남자들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를 표하며 가만히 있자고 하는, 이상한 글이다. 학부 때 페미니즘 세미나 같은 데에서 1, 2학년 학생들이 수줍게 “남성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할 수 없는데 남성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은 귀엽기라도 하지, 30대 석사 학위 소지자가 종합일간지에 이런 글을 쓰는 건 귀엽지도 않다.

아마 ㄴ이 19세기 영국에 태어났다면 이렇게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방직기에 실 한 번 안 꿰어보고 아동 노동도 해본 적 없는 주제에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가 뭔지 가르치려 드는 자본가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 ‘진정한 공산주의’를 위해 자본가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그런 글을 읽고 엥겔스는 시무룩했으려나.

10여 년 전 청년 논객이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람들 중, 한 명은 데이트 폭력 가해자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글 못 쓰는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다른 논객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재능 있는 청년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겠으나, 언론이나 주변의 소모적인 관심은 그들의 성장에 오히려 독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2015.06.24.)

2015/08/22

‘우리 안의 〇〇’이라는 구호

욕 먹을 짓을 하면 욕 먹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 안의 ◯◯’ 같은 소리나 하면서 초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그러는가? 그들이 그렇게 성숙하고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어서 그런가?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른 것을 보고 그렇게 양심에 찔려죽겠으면 ‘내 안의 ◯◯’이라고 하면 된다. ‘우리 안의 ◯◯’이라니 다른 사람 안에 ◯◯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는가? 들여다보기라도 했는가?

‘우리 안의 ◯◯’이라면서 설레발 치고 다니면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비난이 희석된다. 특정 개인들의 잘못을 사회 구성원 대부분에게 떠넘기면서 너도 나쁘고 나도 나쁘고 우리가 모두 나쁘니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 하겠느냐는 식으로 귀결된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을 두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한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사람들은 ‘우리 안의 ◯◯’ 같은 소리나 하면서 찔찔 짜는가? 왜 시키지도 않은 유사-간증을 하며 염병하는가? 남들에게 인격자로 보이고자 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그런 찡찡은 위선자들의 몸부림에 불과하다. 정말로 인격자여서 자신의 허물을 되돌아보느라 그러는 것이라면, 애초에 ◯◯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 같은 것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이므로 굳이 공개적으로 그런 찡찡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염병하는 사이에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은 비난을 안 받게 되거나 덜 받게 된다.

대표적인 구호가 “우리 안의 일베”다. 이 구호는 어떠한 일베충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런 구호 때문에 반성할 정도라면 애초에 일베충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반성하고 싶으면 “우리 안의 일베”라고 할 게 아니라 “내 안의 일베”라고 하면 한다. 차라리 자신의 일베짓을 공개 반성하는 게 낫다. 특정 지역 사람들을 차별했다든지, 특정 인종을 비하했다든지, 사회적 약자를 모욕하는 것을 즐겼다든지, 그런 행위들을 고백하고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 그런데 막상 그러는 사람도 없다. “우리 안의 일베”라고 하면서도 그 “우리” 안에서 자기는 쏙 빠진다.

한때 청년 논객으로 불리던 한◯◯, 박◯◯이 애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의혹이 나오니까, 이제는 “우리 안의 한◯◯”, “우리 안의 박◯◯”라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반성은 혼자서 하는 것인데 왜 다른 사람에게 반성하라고 하는가? 자기가 애인을 때렸으면 우리 안에 ◯◯이 있다고 하지 말고 자기가 그런 놈이라고 하면 된다. 왜 괜히 “우리”라는 말을 쓰면서 가만히 있는 사람까지 끌고 들어가는가? 나는 애인을 때린 적이 없다.

(2015.06.22.)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