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8

Readings on Laws of Nature (2004) by John W. Carroll (ed.)


John W. Carroll (ed.) (2004), Readings on Laws of Nature
: 자연법칙에 관한 선집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August 2004


Introduction / John W. Carroll 

1. Laws of Nature / Fred I. Dretske
(from Philosophy of Science 44 (1977): 248-68.) 

 2. The Nature of Laws / Michael Tooley
(from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7 (1977): 667-98.)

3. Do the Laws of Physics State the Facts? / Nancy Cartwright
(from Pacific Philosophical Quarterly 61 (1980): 75-84.)

4. Confirmation and the Nomological / Frank Jackson and Robert Pargetter
(from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10 (1980): 415-28.)

5. Induction, Explanation, and Natural Necessity / John Foster
(from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83 (1982-83): 87-101.)

6. Armstrong on Laws and Probabilities / Bas C. Van Fraassen
(from Australasian Journal of Philosophy 65, 3 (1987): 243-60.)

7. Confirmation and Law-likeness / Elliott Sober
(from Philosophical Review 97 (1988): 93-98.) 

8. The World as One of a Kind: Natural Necessity and Laws of Nature 
/ John Bigelow, Brian Ellis, and Caroline Lierse
(from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43, 3 (1992): 371-88.)

9. Natural Laws and the Problem of Provisos / Marc Lange
(from Erkenntnis 38 (1993): 233-48.)

10. Humean Supervenience / Barry Loewer
(from Philosophical Topic 24 (1996): 101-27.)

11. Ceteris Paribus, There Is No Problem of Provisos
/ John Earman and John Roberts
(from Synthese 118 (1999): 439-78.)

12. The Non-Governing Conception of Laws of Nature / Helen Beebee
(from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61 (2000): 571-94.) 


(2015.04.27.)


 


 


2015/04/25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작년 말에 우연히 사회운동단체 활동가와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은 분이었다. 그 분이 나에게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견해를 물어서 나는 평소 생각대로 말했는데, 그 분은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강한 영남 억양으로 “캬, 정확하네!”라고 하셨다. 마치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나오는 “살아있네!”와 같은 억양이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그 분에게 “정확하네!”라는 말을 스무 번쯤 들은 것 같다.

그 분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씨는 본인이 맑시스트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분은 내가 내 입으로 스스로 맑시스트임을 인정했으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주의자”나 “-ist”라고 불리는 사람은 어떤 이념을 웬만큼은 제대로 알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가령, 기회주의자는 기회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책 몇 권 읽었다고 ◯◯주의자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도 잘 모를 뿐 아니라 실천은커녕 그냥 대학원에서 찌질이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 분은 나보고 “그래도 맑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고 물었고 나는 “관심이 있고 나중에 여력이 되면 관련 문헌을 찾아보겠지만, 아직은 맑시스트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러 번 실랑이를 했다. 그 분은 어떻게든 내가 맑시스트라고 실토했으면 했고 나는 끝까지 맑시스트가 아직 아니라고 했다. 그분은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페이스북을 보니,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헤시태그를 달아놓는 모양이다. 나는 이걸 매우 좋게 보지만 막상 내가 하려니 남사스럽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실천은커녕 여전히 대학원에서 찌질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적합한 문구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는 아니고 “나는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페미니스트가 될 겁니다” 정도인 것 같다. 언젠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고 있다.

(2015.02.28.)

2015/04/24

고양이들의 자율 배식

몇 주 동안 고양이들이 이상했다. 예전에는 아침마다 고양이들이 현관 앞에 모여서 밥 달라고 울었는데, 요새는 고양이들이 얌전히 있었다. 예전에는 고양이 소리가 나서 현관문을 열면 화천이가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곧바로 사료 포대에 머리를 박았는데(다른 고양이들은 어머니를 무서워해서 현관에 못 들어온다), 요즈음에는 고양이들이 사람을 봐도 멀뚱히 누워있다.

고양이들이 왜 그러는지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았다. 어머니는 화천이가 새끼를 배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고양이는 새끼를 배면 사료를 더 먹는다. 나는 계절이 바뀌어서 그러나 했다. 그런데 고양이들이 계절 타는 건 본 적이 없다.

오늘에야 고양이가 달라진 이유를 알았다. 고양이들이 창고에서 뛰어노는 것이 이상해서 창고 2층에 올라가 살펴보니, 2층에 둔 고양이 사료 포대 한 구석이 터져있었다. 고양이들은 포대에 구멍을 뚫고 심심할 때마다 사료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자율 배식을 하고 있었다.

(2015.02.19.)

2015/04/22

여백이 있는 글쓰기 - 영화 <역린>은 왜 구린가

글쓰기 교육 전문가 이강룡은 여백이 있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여백이 있는 글은 엉성한 글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글이다. 그러한 글을 쓰려면 주장을 줄이고 근거를 늘려야 하고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대신 그러한 감정을 느낄 여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강룡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민속촌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과제를 하게 했다. 어떤 학생이 한눈을 파는 사이, 지나가던 말이 그 학생이 손에 쥐고 있던 유인물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놀란 학생은 자신의 인쇄물을 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애들은 모두 그걸 보며 웃었고 그날 학생들의 일기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오늘 민속촌에 소풍 갔는데 말이 ◯◯의 종이를 뜯어먹었다. 참 재미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유인물을 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쓴 그 학생이 쓴 일기는 달랐다. “나는 말에게 종이를 빼앗기지 않느라 고생했다. 왜냐하면 종이 끝에 스템플러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강룡은 그 학생의 일기 같은 글이 여백이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나 자신이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역설하는 것보다 그러한 여백이 더 강한 힘을 가지며 그 학생의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생각만큼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 중에도 이런 걸 잘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여백이 뭔지 아예 모르는 부류다. 이들은 대놓고 감정 상태를 기술한다. 그런 글을 쓰는 저자는 혼자 감동받지만 그런 글을 읽는 독자는 차분해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강유는 몹시 제갈량을 안타까워했다. ‘불쌍한 분...’

작가는 제갈량이 안 됐다는 것을 강유의 입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으니까 독자 입장에서는 제갈량이 불쌍하다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 출판한 권수로만 놓고 보면 중견작가 축에 끼는 사람 중에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종종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여백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경우다. 이들은 심심하면 말 줄임표를 붙여서, 무형의 여백을 만드는 대신 문장 안에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얼마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영화 <역린>의 각본을 소설화한 책을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소설에 있는 거의 모든 대화마다 말 줄임표가 있었다. 큰따옴표 안에 말 줄임표가 반드시 하나 이상 있었다. 이런 식이다.

“상선은... 어디 있느냐.”, “나는 편전이... 이러이러해서... 좋구나”

나는 <역린>을 보고 현빈이 몸만 좋지 연기를 못한다고, 저게 무슨 목우유마 같은 연기냐고 욕했었는데, 그건 내가 오해한 것이었다. 현빈은 각본대로 연기를 충실하게 했을 뿐이다. 어쩌면 현빈 또한 그러한 각본의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2015.02.10.)

2015/04/21

나를 외국인으로 오인한 한국인에 대한 배려

기숙사에서 어떤 한국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고 같은 층에서 내렸다. 나는 그 사람보다 앞서 건물에서 나오며 유리문을 열었고 그 사람이 유리문에 부딪치지 않도록 손잡이를 잠시 잡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에게 “Thank you”라고 했다.

그 사람이 (교포든지 해서) 영어가 편해서 자기도 모르게 영어를 쓴 것 같지는 않다. “감사합니다~” 하는 한국어 억양 그대로 “Thank you~”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가 외국인인 줄 알았나 보다.

그 사람이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면 민망해 할 까봐, 나는 “Thank you”라는 말을 듣고 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그 사람한테 고개만 꾸벅 숙였다.

나의 배려는 아무 것도 아니다. 김창옥은 택시를 타서 택시기사한테 행선지를 말하니 택시기사가 “외국분이 한국말을 정말 잘 하시네요!”라고 감탄하더란다. 김창옥은 택시기사가 민망해 할까봐 “캄샤함미댜(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2015.02.06.)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