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31

책모임 아르바이트 - 『객관성의 칼날』



내가 다니는 대학원에 아르바이트가 들어왔다. 어떤 기업에서 책읽기 모임을 하는데 책에 관한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책 읽기 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이 과학사 책이어서 과학사 전공자가 그 일을 하겠거니 했는데 아무도 그 일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학생조교한테 물어보았다. “얼마야?”, “OO만원.” 내가 하기로 했다.

흔히들 책모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모여서 아무 책이나 읽고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하다가 엄한 사람한테 생돈을 갖다 바치는 호구들의 사교 모임이다. 그런데 고전을 읽기로 하고 대학원에 강의 요청을 했다는 것은 참여자들이 나름대로 체계적인 독서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고객들이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직원들이 읽기로 한 책은 찰스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이다. 직원들 중에 과학사 전공자 출신이 있거나 읽을 책을 잘못 고른 것이다. 아르바이트 일주일 전, 책읽기 모임 책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의 때 그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전화를 받고 나는 감을 잡았다. 그 사람들은 책을 잘못 고른 것이다.

견적을 내보았다. 40분 강의하고 20분 동안 질의응답을 받아야 한다. 분명히 사람들은 책을 잘못 골랐다며 혼란에 빠져있을 것이다. 『객관성의 칼날』은 총 열 장으로 구성된다. 책 내용을 전부 설명한다면 책 소개를 하는데 한 시간이 필요하고 각 장을 설명하는 데 한 시간씩이 필요하니 총 열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본문 내용 소개를 최대한 줄이고 책 읽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배경 정보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40분 간 배경 정보를 설명하고 5분 간 본문 내용을 배경 정보와 연관 지어 설명했다(원래 40분짜리로 준비했는데 5분 넘쳤다). 참석자들 반응을 보면 내가 견적을 괜찮게 낸 것 같다.

나는 책모임 참석자들에게 『객관성의 칼날』을 읽을 만 했느냐고 물었다. 다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많이 읽은 사람은 1/3 정도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책모임 담당자는 서울대 권장도서 목록에 있는 책이라서 골랐는데 책을 잘못 고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권장도서라는 것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권장하는 것이지 목록에 나오는 책을 본인들이 다 읽었다는 것이 아니므로 일반인이 그대로 따라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2018.01.31.)


2018/03/30

[과학기술학] Latour (1993), Ch 1 “Crisis” 요약 정리 (미완성)



[ Bruno Latour (1993), We Have Never Been Modern, translated by Catherine Porter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11.

브뤼노 라투르, 「1장. 위기」,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17-45쪽. ]

1.1 하이브리드들의 증식 (The Proliferation of Hybrids)

1.2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다시 묶기

(Retying the Gordian Knot)

1.3 비판적 입장의 위기 (The Crisis of the Critical Stance)

1.4 1989년: 기적의 해 (1989: The Year of Miracles)

1.5 근대인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es It Mean To Be A Modern?)

1.1 하이브리드들의 증식 (The Proliferation of Hybrids)

1.2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다시 묶기

(Retying the Gordian Knot)

1.3 비판적 입장의 위기 (The Crisis of the Critical Stance)

1.4 1989년: 기적의 해 (1989: The Year of Miracles)

1.5 근대인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es It Mean To Be A Modern?)

10, 40

‘근대적’이라는 형용사는 시간에 있어서 새로운 체제, 가속, 파열, 혁명을 지칭함.

10-11, 41-42

이 글의 가설

‘근대성’이라는 말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실천을 지시하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하지만 최근에는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

집합(1)은 라투르가 연결망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

집합(2)는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른 것에 상응

11-12, 42-44

우리가 번역과 정확라는 두 가지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근대인임.

우리가 정화 작용과 혼성과 작용에 주목하기만 한다면 그 즉시 우리가 현재에 근대인임을 멈추게 되고 우리의 미래는 변하기 시작함.

결국 우리가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른 자연-문화들에 대해 유지해온 고통스러운 관계도 변형될 것임.

상대주의, 지배, 제국주의, 허위의식, 제파 혼합주의(syncretism)는 다르게 설명될 것이고 그에 따라 비교 인류학을 변형시키게 될 것임.

제파 혼합주의: 인류학자들이 ‘대분할’(Great Divide)이라는 느슨한 표현으로 요약하는 모든 문제들

12, 44-45

번역, 또는 매개 작업과 정화작용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가?

라투르의 가설: 정화작용이 번역을 가능하게 만들어왔다는 것

두 번째 질문은 탈근대인 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의 문화들과 관련됨.

라투르의 가설: 다른 문화들은 하이브리드들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의 증식을 배제했다는 것

세 번재 질문은 현재의 위기와 관련됨.

근대성이 분리와 증식이라는 이중 과제에 대하여 그렇게 효과적이었다면, 왜 우리가 진정ㅇ로 근대인이 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것일까?

우리가 근대인이기를 멈춘다면, 우리가 더 이상 증식의 작용을 정화작용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2023.12.10.)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