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산으로 간다. <한겨레> 기자는 숙명여대 총학생회보고 꼰대라고 했다.
“먼저 숙대 축제의 의상 논란은 크게 3개의 다른 결이 있습니다. 바로 (i) 대학까지 스며든 선정성과 성상품화 등 천박한 자본주의 논란 (ii) 노출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남성 중심적 담론을 숙대 총학이 받아들였다는 퇴행적 결정 논란 (iii) 성인에게 복장 규정을 강제한다는 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겨레> 기자는 자신이 (iiI)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사는 (iii) 뿐만 아니라 (ii)와 관련된 허점도 같이 보여준다. 그는 “남성들의 모멸감과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는 것도 꼰대의 논리”라고 주장한다. 숙대 총학의 규정안에는 그러한 논리가 없다. 굳이 따진다면 “안전하고 건전한 축제”라는 문구를 꼬투리 잡을 수 있겠지만 이 또한 그러한 논리의 근거는 아니다.
“어떠한 것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것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경우 그 책임이 너에게 있다”는 뜻을 함축하지 않는다. “차 조심 하라”라는 말은 “어떤 차가 너를 치었을 경우 그 사고는 너의 책임이다”라는 말이 아니며, “돈을 너무 많이 가지고 다니지 마라”는 말은 “누군가 그 돈을 훔쳐가도 그 원인은 너에게 있다”는 말이 아니다.
노출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지만, 성폭력 가해자들은 노출을 성폭력의 빌미로 삼는다. 성폭력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책임이 있지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피해자가 입은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축제기간 중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는 게 총학생회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이걸 가지고 남성 중심적 담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숙대 총학의 규제안에서 의상 규정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규제안의 대부분은 주점 운영과 관련된다. 규제안은 축제 기간 중 교내에서 축제를 즐기는 ‘개인의 옷차림’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나 동아리에 운영하는 주점에서 ‘단체로 맞추어 입는 옷’을 규제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개인이 자유롭게 입을 권리 vs. 총학의 규제’로 모는 것은 억지다. ‘주점의 선정적 운영 vs. 총학의 규제’로 보는 것이 맞다. 숙대 총학은 개인이 야한 옷을 입을 권리를 침해한 적이 없다. 그러니 숙대 총학을 꼰대라고 할 수 없다.
사실 이런 편향은 한겨레신문 기자 뿐 아니라 “쿨함”을 떠받드는 상당수의 남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김어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파파이스>에서, 마치 짠 것처럼 한겨레신문 기자가 기사로 쓴 것과 똑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그들은 무지를 “쿨함”으로 포장한다.
여성의 노출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 그런데 이들 쿨한 남자들은 그런 맥락은 무시한 채 여성의 노출이 여성의 권리이며 여성의 노출을 제한하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엉성한 도식에 매몰되어 있다. 한겨레신문 기자가 축제 규정안의 의상 규정을 두고 “너무나 단정하게 입는 아랍의 경우 성범죄가 없을까요?”라고 묻는 것은 괜히 뜬금없는 소리를 한 것이 아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은 테니스를 칠 때도 땅에 질질 끌리는 치마를 입었다. 이들은 수많은 투쟁을 하고서야 겨우 반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이 경우, 여성 노출의 증가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관련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 아이돌이 반쯤 입고 반쯤 벗은 채로 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이전 시대보다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 아이돌은 자유로운 대중예술인로서 스스로 의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연예 사업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 기획사의 수익을 위해 의상을 강요받는다. 이 경우, 여성 아이돌 노출 규제를 주장하는 것을 무조건 엄숙주의나 꼰대짓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표현의 자유는 그 사람의 자기결정권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자기결정권을 넘어서는 표현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상충되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기획사 사장의 표현의 자유’와 ‘아이돌의 자기결정권’이다.)
아시아나 항공에서 승무원의 복장을 규제하는 것이 빅토리아 시대의 규제와 비슷하다면, 숙대 총학의 규제는 아이돌에 대한 규제와 비슷하다. 아이돌이 기획사의 수익을 위해 선정적인 의상을 입듯, 대학 축제의 학생들은 주점 수익을 위해 선정적인 의상을 입었다. 한겨레신문 기자가 아시아나 항공의 복장 규제와 숙대 총학의 복장 규제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한 것은 그러한 사회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노출=자유’, ‘노출 제한=억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주점에서 노출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노출이 자기결정권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다. <한겨레> 기자가 지적한 세 가지 논의 지점에서 (ii)와 (iii)은 허구적인 쟁점이며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i)에만 초점을 맞춰도 될까 말까인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이건 이미 망한 논의인 것 같다. 한겨레신문에서 해명 기사랍시고 이렇게 멍청한 소리나 늘어놓은 것을 보면 다른 언론은 볼 것도 없다. 다른 언론들은 대학 축제가 선정적이라고 하면서 적정 수준의 자극적인 사진이나 보여줄 테니 말이다.
* 링크: [한겨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대 축제 ‘드레스코드’는 ‘꼰대스럽다’
( 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7557.html )
(201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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