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30

미용실 주인의 가지 모종과 방울토마토 모종



시골에 사는 사람이 모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다.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상당수는 공장이나 회사에 다닌다. 그런 사람들은 시골에 살더라도 농사지을 줄 모른다. 읍내에서 자영업 하는 사람들도 농사지을 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미용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용실 주인이 텃밭에 가지와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식구들끼리 먹을 정도만 조금 심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텃밭에 가지와 방울토마토가 너무 많이 열리는 바람에 남편하고 싸웠고, 너무 심하게 싸워서 하마터면 이혼할 뻔 했다고 한다. 많이 심어봤자 정도가 있지 얼마나 주책맞게 많이 심었길래 그렇게 심하게 싸웠단 말인가.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콩을 심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4인 가족 기준으로 가지 모종은 세 개 정도 심는 것이 적당하다. 원래는 모종 두 개만 심어도 되지만 두 개 심었다가 한 개만 살아남으면 약간 아쉽기 때문에 세 개를 심는 것이다. 세 개가 모두 살아남으면 4인 가족이 다 먹기에 너무 많은 가지가 열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된다. 방울토마토 모종도 같은 이유로 세 개 정도 심는다. 시골 사람들이 인심이 좋다고 하는데 그 배경에는 농업생산성의 향상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미용실 주인은 모종을 몇 개나 심었는가? 가지 모종 50개, 방울토마토 모종 50개를 심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100명에게 가지와 방울토마토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

차라리 모종이 다 죽었다면 미용실 부부는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모종이 죄다 살아서 어마어마한 양의 가지와 방울토마토가 매달린 것을 보고 남편은 격분했고, 결국 가지와 방울토마토를 낫으로 다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 둘은 싸웠던 것이다. 왜 이렇게 많이 샀느냐, 종묘상 주인이 이 정도 심으면 된다고 해서 샀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많이 사느냐 등등.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들으면, ‘역시나 시골 사람들은 폐쇄적이고 외지인들에게 적대적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미용실 주인의 남편은 동네 토박이이고 종묘상 주인과 중고등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시골은 그런 곳이다.

도시는 인심이 각박하고 시골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시골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시골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이 달나라에는 토끼들이 평화롭게 절구나 찧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달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2020.07.30.)


2020/09/29

저널클럽 운영원칙



동료 대학원생의 제안으로 시작된 <부에나 비스타 저널 클럽>이 1년 넘게 정상 운영되고 있다. 기말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학기 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주 한다. 그런데 가끔 뜻하지 않은 불참자가 생겨서 해당 주에 저널 클럽을 할지 여부를 두고 구성원들이 고민하는 일이 있다. 나는 그런 경우 대세를 따르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관망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널 클럽 운영 원칙을 정식으로 만들면 그러한 고민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안한 <부에나 비스타 저널 클럽> 운영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과반 원칙: 전공자 중 과반이 참여가능하면 저널클럽을 한다.


(2) 발제자 대체인력 원칙: 발제하기로 한 사람이 발제를 못하게 되는 경우, 대체인력이 있으면 저널클럽을 한다. 발제 예정자였던 사람은 대체 인력을 구하기 위한 시도를 1회 이상 한다.


(3) 분석철학 친화 원칙: 다른 분석철학 행사와 저널클럽이 겹치는 경우, 웬만하면 분석철학 행사에 참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다.


세 원칙에 대한 구성원들의 호응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 세 원칙을 “<부에나 비스타 저널 클럽> 운영 3원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강제성이 있도록 원칙(2)에 “대체인력을 구해서 한다” 또는 “대체인력을 구할 수 없는 경우 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첨가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나는 “대체인력을 구해서 한다”라고 하면 구성원들이 고통받을 수 있고 “대체인력을 구할 수 없는 경우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발제 예정자였던 사람은 대체 인력을 구하기 위한 시도를 1회 이상 한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원칙(3)은 구성원들이 다른 분석철학 쪽 행사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오늘 분석철학회 한다는데 안 가요?”, “안 갈 건데 저널클럽 하죠 뭐” 하는 상황을 막고 분석철학회 행사 등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독려하기 위해 “웬만하면”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2020.07.29.)


2020/09/28

[한국 음악] 지평권 (Ji Pyeong Kwon)

지평권 - Sad Romance (a.k.a. Sad Violin)

( www.youtube.com/watch?v=ja7JAJNe8a0 )

(2023.01.07.)

[과학기술학] 홍성욱 (2016), 4장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요약 정리 (미완성)

    

[ 홍성욱,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동아시아, 2016). ]

  

  

  1. 융합

  2. 성공적인 팀과 리더십

  

  

  1. 융합


■ 연구자 간 협동 연구의 성격을 띠는 융합 연구 [271-274쪽]

-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DNA 구조 발견

- 스탠리 코언과 허버트 보이어의 유전자 재조합

- 앤드루 파이어와 크레이그 멜로의 RNA 간섭 현상 발견

 

■ 기업에서의 융합 연구 [274-277쪽]

- 딥마인드의 CEO 허사비스: 게임 프로그래밍과 뇌 과학을 융합

- 제록스의 팰로알토 연구소에서 개발한 컴퓨터 마우스는 당시 가격 400달러.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호비-켈리 디자인 회사에 20달러 내외인 마우스 제작을 의뢰


■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융합 연구 [274-279쪽]

- 핵폐기물 처리장은 1만 년 이상 유지되어야 함

- 1만 년 뒤 후손들이 핵폐기물 처리장의 위험성을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다학제적 융합 연구를 함


■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 [279-284쪽]

- 애플의 스티브 잡스

- 미국의 엔지니어이자 철학자인 데이먼 호로위츠

- 인텔의 ‘상호작용 및 경험 연구소’

- 자동차 산업에서 요구되는 인문학 - 주의 분산 등


■ 테크노사이언스에 인문학을 접목해야 하는 필요성 [288-289쪽]

- 테크노사이언스는 비-인간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데 익숙하지만 인간 행위자에게 소홀해지기 쉬움

- 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 인류학 등 분과에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으로 인간을 해석하지만 인문학은 비-인간에 주목하지 않음

- 인간과 비-인간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



  2. 성공적인 팀과 리더십


■ 17세기에 등장하는 협동 연구의 이상 [292-295쪽]

-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에 등장하는 협동 연구

- 베이컨은 정부에 의한 과학 연구 지원을 주장함

- ‘솔로몬의 집’ 연구소에서 총 36명이 체계적인 협동 연구를 진행함

- 베이컨이 살던 시기에 이미 몇몇 과학 분야에서 협동 연구가 진행됨

예) 지도 제작자 오르텔리우스가 만든 16세기 지도책 『테아트룸』. 여행가와 지도 제작자들에게 정보를 받아 여러 번 개정판을 출판함


■ 실험실 리더십의 요소 [303-308쪽]

(1) 리더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주목해야 함.

(2) 신뢰

  

  

(2017.11.05.)

      

2020/09/27

자칭 인문학자들



인문학도 수준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자기가 인문학자나 인문학 연구자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사람들이 인문학에 그만큼 관심이 많아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다. 사람들이 인문학을 그만큼 우습게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자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모르더라도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는 감을 잡고 있다. 그래서 과학에 조금 관심이 있다고 해서 과학자를 자처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경제학자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인문학은 예외다. 개나 소나 인문학자를 자처한다. 이건 일요일에는 짜파게티 요리사니까 나도 요리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전국의 짜파게티 요리사들은 왜 요리사를 자처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요리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전문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요리를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요리 솜씨가 전문가의 솜씨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요리사와 관련하여 자격증 제도도 있고, 자격증에는 급수도 있다. 그러면 인문학은? 개나 소나 인문학자를 자처한다는 것은,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전문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널리 퍼져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자를 자처하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인문학자의 정의는 무엇인가? 얼마나 배워야 인문학자로 취급받을 수 있는가? 박사 학위가 없으면 인문학자도 아닌가? 그들은 인문학자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인문학자라고 선언하겠다고 엄포를 놓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엄포에 쫄아서, ‘어? 학자의 정의가 뭐지? 쿤의 『구조』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거 같은데?’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그들의 개수작에 휘말리게 된다.

인문학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그래서 무슨 연구를 하시는데요?” 연구 활동을 한다면 연구 대상이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추상적 대상이든 구체적 대상이든 대상이 있을 것이다. 연구 대상이 없으면 당연히 연구자도 아니다.

내가 과학자를 자처한다고 해보자.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연구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밑도 끝도 없이 “과학하는데요”라고 답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대화는 대충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까 뭘 하시는데요?”

“과학한다구요.”

“아니, 물리학이든 생물학이든 화학이든 있을 거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과학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는지 아세요? 과학 책 읽을 만큼 읽었고, 일반물리, 일반생물, 일반화학, 다 들었는데요? 저 과학자들하고 많이 친한데요?”

대화가 이렇게 흘러간다면 아무리 과학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아, 이 새끼 과학자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세상에 연구 대상도 없는 연구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자칭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은 그래도 된다고 말한다.

미친 놈 설정을 끝까지 밀고나간다고 해보자. “과학이 대학에서는 세분화되어 있지만 원래는 하나입니다. 그건 아시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은 하나다. “과학의 핵심은 과학정신, 합리성 아닙니까? 과학자들은 과학 많이 해서 과학 정신이 있나요? 매사에 합리적인가요? 실험 재현 안 되면 징크스 때문에 수염 안 깎고 안 씻는 사람 있는 것도 내가 알아요. 과학 하면 뭐합니까? 과학 정신도 없는데.” 내가 내 정신도 모르겠는데 과학 정신 같은 게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과학자가 과학이나 잘하면 되지 과학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딴 걸 왜 신경 써야 하는가. 그런데 과학 정신을 인문 정신으로, 합리성을 저항으로 바꾸면 자칭 인문학자들이 하는 말이 된다.

학자나 연구자들은 박사 학위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학위가 없어도 연구자와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문영 작가라고 한다. 이문영 작가는 『환단고기』를 비롯한 사이비 역사학이 어떻게 성립했는지 등에 관하여 연구자나 준-연구자급이라고 하며, 역사 전공자들도 이문영 작가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한다는 이야기를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이문영 작가는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정식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학위가 없다고 자칭 인문학자들을 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자가 아니니까 인문학자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2020.07.27.)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