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1

[강연] 임혁필 (개그맨)



[세바시] 297회. 행복한 상황으로 반전시켜라 / 임혁필 (개그맨, 샌드아티스트)

www.youtube.com/watch?v=585-nrgBjkc )


[세바시] 226회. 개그에서 배운 인생 / 임혁필 (공연연출가, 개그맨)

www.youtube.com/watch?v=LZas_SD4sRI )



(2021.02.08.)


2021/01/30

[중세철학] 안셀무스의 『인간이 되신 하느님(Why God Became Man)』 1권 요약 정리

  

[ 영어 판본

Oxford에서 출판한 Oxford World’s Classics 시리즈 중 하나인 『Anselm of Canterbury – The Major Works』 260~356쪽

  

한국어 판본

『인간이 되신 하나님』, 안셀무스 지음, 이은재 옮김, 한들출판사 펴냄 ]

  

  

머리말


다루는 주제에 따라 책 제목은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가”라고 붙였다. 1권은 기독교가 이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여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주장과 이를 반박하는 주장을 실었다. 2권에서는 사람의 본성은 몸과 영혼이 전체인 불멸성을 갖도록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제1장. 이 글 전체가 다루는 질문


  우리 신앙의 교리에 대한 증거를 써주어야 한다는 요청이 있었다. 논의가 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유나 필연성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으며, 왜 그분이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 다시 생명을 선사했는가? 하느님이 다른 인격체(천사나 사람)를 통해 이 일을 하거나, 단순히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여 이 일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 주제에 교부들이 이미 충분한 설명을 했지만 나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답해주어야 한다.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진행하는 탐구방식은 이해하기 쉽다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보소(Boso)가 묻고 안셀무스(Anselmus)가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한다.

- 보소: 하느님은 전능한데 무슨 필연성과 이유 때문에 사람 본성의 천함과 연약함을 입고 사람의 본성을 새롭게 하려고 했는가?

- 안셀무스: 이 주제를 다루는 어려움이 있다.

(1) 내 능력을 벗어난다.

(2) 힘, 필연성, 의지 등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는데 이를 고려해야 한다.

(3) 이 주제는 중요하며 동시에 사람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대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주제를 건방지고 경멸적인 언어로 다루게 될까봐 걱정이다.



제2장.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

- 안셀무스: 이렇게 받아들이기 원한다. 어떠한 더 높은 권위로 뒷받침하지 않는 무언가를 말한다면, 하느님이 나에게 더 나은 것을 보여주기 전까지 그렇게 보겠다는 것으로만 간주하기 바란다.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



제3장. 불신자들의 항변들과 신자들의 답변들


- 보소: 불신자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인 근거를 찾으며 신자들은 믿기 때문에 그 근거를 추구한다. 그들과 우리가 찾는 것은 동일하다.

  불신자들은, 하느님이 여인의 자궁 속에 잉태되어 그 여인에게서 태어나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으며 성장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우리를 비난하며 기독교의 단순성을 조롱한다.

- 안셀무스: 우리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인류를 적절하게 회복시킨 것이다.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하여 사망이 인류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생명이 회복되어야 했고(롬 5, 19; 12), 우리를 저주받게 한 죄가 한 여인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우리의 의와 구원을 이루어낼 분이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합당하고, 악마가 사람을 유혹할 때 나무 열매의 달콤함으로 사람을 정복했으므로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악마가 정복되는 것이 합당하다.



제4장. 이 같은 답변들이 불신자들에게는 타당성 없는 듯이 보이며 동시에 흡사 그림 같이 여겨진다.


- 보소: 불신자들이 이를 믿기 위해서는 진리의 견고하고 합리적인 근거, 즉 하느님이 낮아져야만 했다는 사실이 합당하며 가능한 일임을 증명하는 필연성이 반드시 먼저 제기되어야만 한다.

- 안셀무스: 하느님의 소중한 작품인 인류가 타락했지만 그들을 모두 없애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어긋난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계획은 하느님이 실행한 것이다.



제5장. 인류의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존재로만 가능하다.


- 보소: 하느님이 아닌 다른 인격체(천사나 사람)를 통해 이러한 해방이 성취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잘 납득할 것이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했던 것처럼 죄 없는 사람을 창조하여 구원을 이루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안셀무스: 만약 어떤 존재가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해 낸다면 사람은 마땅히 그의 종이 된다. 사람은 하느님 한분만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점에서 선한 천사들과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눅 20, 36). 그러한 사람이 하느님이 아닌 누군가의 종이 된다면, 원래의 존귀한 상태로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제6장. 하느님이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했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했으며, 우리를 위하여 악마를 정복하러 왔다고 할 때 불신자들은 이를 어떻게 비판하는가?


- 보소: 하느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지옥과 악마의 권세에서 구출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다시 소유하게 했고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었다.

  불신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창조했는데, 이 모든 일을 단순히 명령으로 성취할 수 없다면 신은 무능력하다. 명령으로도 할 수 있었으나 합당한 이유 없이 그렇게 온당치 않는 일을 기꺼이 겪었다면 신은 지혜롭지 않다.

  하느님이 인류의 죄를 벌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죄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될 것인데, 순수한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말은 하느님의 지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하느님이 그 길을 통해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었다는 주장도 정당하지 않다.



제7장. 악마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 그가 그러한 정당성을 가진 것처럼 보였는가? 왜 하느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을 해방시키셨는가?


- 보소: 하느님이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힘이 아니라 정의로써 악마와 싸운다면, 하느님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고 악마가 하느님을 죽였을 때 악마는 인간에게 행사하는 파괴력을 잃어버려야 한다. 하느님이 악마에게 부당하게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그것은 악마가 인간을 소유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1) 악마는 사람을 폭력으로 가로채지 않았고 사람이 스스로 악마에게 넘어갔다는 주장이 있다. 

악마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게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게 속해 있다. 하느님은 자신의 종을 벌주려고 했다. 한 종이 다른 종을 꼬드겨 자신들의 주인을 배반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한 것은 한 도둑이 다른 도둑보고 자기 자신을 훔쳐오라고 한 것과 같으며 이런 의미에서 둘 다 도둑이다.

(2) 하느님이 인간을 부당하게 붙잡고 있던 힘에서 그를 구출하고 소유하는 일이 정당한데, 이는 인간이 악마에게 고통당하는 것이 마땅해도 악마가 인간을 괴롭히는 일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3) 악마가 인간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악마가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마땅하며 하느님이 이를 허락했고 그래서 악마가 이 일을 정당하게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일이 다양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정당하기도 하고 부당하기도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을 부당하게 폭행했을 때, 가해자는 폭행을 당해도 할 말이 없으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러한 방식에서 보면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나 악마가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정당하다고 하려면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에 의해 징벌 당할 때이다.

(4)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무효가 된 “판결문서”(골 2:14)를 근거로, 악마가 인간에 대하여 정당한 권리(소유권)를 갖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악마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린 것으로, 그 내용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죄를 범하였으니 그가 죄를 짓거나 그에 따른 형벌을 받는 일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악마가 인간을 괴롭힐 정당한 권리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즉, 하느님은 악마에 맞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제8장.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부여하는 비천한 일들이 그분의 신성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신자들은 그것들을 그분의 인간되심에 돌리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긴다. 왜 그들은 인간인 이분이 자원해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보소: 성육신과 관련하여, 지존한 분이 비천한 일을 하고 스스로를 낮추었다는 것과 전능한 분이 엄청난 수고를 했다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 안셀무스: 예수는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이고, 두 본질로 된 한 인격이다. 비천함이나 연약함을 당한 것은 신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 실체의 연약함이다. 이는 하느님의 인격과 인간의 인격이 동일한 한 인격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성육신은 하느님이 비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고양된 것이다.

- 보소: 죄인의 잘못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의로운 사람이 죽는다면 정의롭지 않다. 누군가 죄인을 놓아주기 위해 죄없는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풀어준 사람도 벌을 받아야 한다. 의로운 사람에게 죄주지 않고서는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면 하느님이 전능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지혜와 공의를 변호할 수 없다.

- 안셀무스: 성부는 성자를 죽게끔 강요하지 않았고 성자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감수했으므로 성부 하느님은 죄인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지 않았다.

- 보소: 성자는 성부의 뜻에 동의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반한 것은 아니더라도 성부 하느님의 명령으로 강권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하는 성서 구절

빌 2:8, 히 5:8, 롬 8:32, 요 6:38, 요 14:31, 요 18:11, 마 26:39, 마 26:42



제9장. 그분은 자발적으로 죽었다. “그분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그러므로 하느님은 또한 그분을 높이셨다”(빌 2:9), "나는 나 자신의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다“(요 6:38)는 말과 ”하느님이 그분 자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 하셨다“(롬 8:32),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의 의미는 무엇인가?


- 안셀무스: 너는 그리스도가 복종했기 때문에 행한 일과 계속해서 복종했기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느님은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 그것(그리스도의 삶과 민중을 통한 진리와 정의)을 요구하시며 피조물들은 순종의 표시로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인자(예수)”는 성부 하느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 보소: 죽음이 그리스도에게 닥쳐온 것은 그리스도가 순종하는 가운데 인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며 그에게 죽음이 요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안셀무스: 하느님은 복을 주기 위해 의롭게 창조한 피조물을 아무 잘못 없이 불행하게 되도록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리스도가 죽도록 강요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스스로 기꺼이 죽음을 당했다. 그리스도는 순종하기 위해 생명을 포기한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의를 지키기 위해 순종했다.

  “그분이 배우셨다”(순종을 배우다)는 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배우게 하셨다”는 말을 대신해서 쓴 것이다.

2) 그리스도가 지식(의지)으로 이미 알던 것을 몸소 겪어 배웠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성부가 모든 것을 이미 그리스도에게 주었기 때문에, 순종의 대가로 그리스도가 높여졌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성자가, 성부와 성령과 함께, 그분의 죽음오로 그분의 전능하심을 온 세상에 나타내려고 했다. 어떤 것이 그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결정되었으며 실제로 그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면, 그 일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로 하고 그 일을 위해 먼저 일어나는 일이 다른 것을 행하도록 계획된 것이 있다고 하자. 이때 먼저 일어나기를 바란 일이 내 생각대로 이미 발생했다면 먼저 일어난 일은 나중에 하려고 한 일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ex) 강을 건너는 일, 성찬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 높아지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음을 감수하여 높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서 지혜와 은혜가 더했다”(눅 2:52)는 말은 정말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예수가 “나는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낸 분의 뜻을 행하러 왔다”(요 6:38)거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다”(요 7:6)는 말은 예수가 가지고 있던 올바른 뜻은 예수의 인성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에서 왔음을 뜻한다.

  예수가 성부의 뜻을 말하는 것은 성부가 성자의 죽음을 원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죽음과 같은 위대한 일을 인간이 행하지 않고서는 인류를 회복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가 죽지 않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는 세상과 화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뜻에서 성부는 성자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고, 성자는 성부의 뜻을 이루기 원하므로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ex) 촛불 비유

  성부가 성자의 죽음을 원했던 것은 성자 이외에는 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자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성부 하느님이 죽으라고 명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제10장. 동일한 일에 대하여 또 다른 올바른 해석도 가능하다


- 안셀무스: 다른 올바른 해석도 가능하다.

(1) 성자에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죽으려고 한 의지가 있었고 성부는 이를 통하여 성자에게 명령했고 성자가 죽기를 원했다. 성자는 죽기까지 순종했고 그가 당한 일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다.

  성자는 기꺼이 죽으려는 의지, 위대한 선을 이루려는 의지를 성부에게서만 받았다. 성부가 사람들에게 의지를 주어 그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성부가 사람들을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부가 성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주어서 성자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성자는 성부에게 받은 의지를 지켜 죽기까지 순종했고, 그가 받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이성적인 존재가 하느님에게 받은 의지를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은 참된 순종이다. 성자가 배운 것은 순종을 통하여 얼마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2)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뜻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이 뜻하는 바에 동의하는 것도 그가 그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ex) 어떤 사람이 어떤 선한 것을 성취하려고 고통을 감수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의 고통이 아니라 그의 의지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가 막지 않은 그 일을 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부는 성자의 고통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음을 감수하는 것을 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자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지나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가 죽음을 피하고자 해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감수하기로 결심했음을 뜻한다. 이는 강제가 아닌 자유의지로 죽었다는 바를 나타낸다.

- 보소: 성자가 그것을 원했다고 해도 하느님이 그것을 허락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취할 행동으로 적절하지 않다.

  하느님은 왜 인간을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하지 않았을까, 만약 할 수 있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이 인간을 이러한 방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며, 그 죽음이 인간의 구원에 유용한지 명확하지 않다.

- 안셀무스: 당신이 불신자들의 입장에 서 있다. 나는 하느님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사소한 논증도 배제하지 않겠다.

- 보소: 나도 이 전제(합의)를 따르겠다.

- 안셀무스: 지금 논의의 대상은 하느님의 성육신과 하느님이 취한 인성에 대한 것이다. 일단 하느님의 성육신과 인간인 그에 대한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사람은 복을 받기 위해 창조되었지만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한 복을 받을 수 없고 더 나아가 죄 없이 삶을 살 수 없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필연적으로 믿어야 할 다른 요소들도 전제로 하자. 인간이 복을 누리기 위해 죄 사람을 받아야 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제11장. 죄를 짓는다는 것과 그 죄를 보상한다-죄에 대해 죄과를 치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안셀무스: 하느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지 알기 위해 우선 죄를 짓는 것과 죄를 만족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자.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천사와 인간이 하느님에게 지는 빚은,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의 의지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빚을 지불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며 지불하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유일하고 온전한 영광이 이것이다. 이 유일한 의지를 행할 수 있을 때에만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한다.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탈취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한 채무 상태로 남아 있게 되며, 그 대가로 치르는 것은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되돌려야만 한다.

ex) 건강, 명예



제12장. 인간이 모든 채무에 대해 지불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이 오직 자비로써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성품에 합당한가?


- 안셀무스: 인간이 하느님의 명예를 빼앗고서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하느님이 자비로만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타당하지 않다. 죄에 대하여 벌을 주지 않으면 공정하지 못하게 된다. 하느님 나라에서 무언가가 공정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는 것은 하느님에게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이 죄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어울리지 않다.

  죄를 짓고 벌 받지 않고 용서받는다면 죄인이나 죄 없는 자나 모두 하느님과 같은 관계에 있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의 성품에 어긋난다.

  인간의 의가 법아래 있으므로 하느님이 죄에 보복하는 정도는 정의의 크기(정의가 요구하는바)에 의해 결정된다. 죄가 자비를 통해서만 용서된다면 불의는 자유보다 더 자유로운 것이 되는데, 이는 매우 부당하다.

- 보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완전히 용서하자고 했으면서(마 6:12) 그 자신은 그렇게 하기 원치 않는 것은 모순되는 일이다.

- 안셀무스: 이는 하느님 한 분에게만 속하는 것을 우리가 우리 것인 것처럼 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니 모순되지 않다. 만물의 주인인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복수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롬 12:19) 지상의 권세들이 공정하게 이를 처리할 때 그들을 세우신 하느님이 실제로 그것을 한다.

- 보소: 하느님은 자유로워서 어떠한 법이나 판단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매우 선하기 때문에 하느님보다 더 선한 존재는 없다. 하느님이 뜻하는 것 외에는 공정하거나 적절한 것이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도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하는데, 하느님 자신이 받은 부당함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 안셀무스: 자유는 유익하고 적절한 쪽으로만 나아가며, 하느님에게 적절하지 못한 그 어느 것도 선이라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이 부적절한 어떤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것이 공정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ex) 거짓말, 불과 물

  하느님이 부당하거나 무질서하게 어떤 일을 행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자신이 탈취한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려주지 않는 죄인을 벌주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 선함, 의지에 속하지 않는다.



제13장. 이 세상의 질서 가운데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그것을 되돌려 드리지 않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 안셀무스: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되돌려 주지 않는 것은 사물의 질서 속에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용납하는 것은 가장 부당한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존재인 하느님의 영광을 유지하는 것은 가장 정당하다. 하느님의 영광을 탈취당하도록 내버려두고 가로챈 자에게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존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강탈된 영광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마땅하다.



14장. 죄인을 벌함이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인가?

- 보소: 죄인에 대한 징벌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주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 죄인이 가로챈 것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징벌만 할 뿐이라면 지금까지 말한 것과 모순된다.

- 안셀무스: 죄인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기꺼이 치르거나 하느님이 죄인에게서 대가를 받아내기 때문에, 하느님이 자신의 영광을 상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산 사람이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가 죄를 저지르지 않았든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느님은 그를 괴롭게 하여 하느님에게 복종시킨다.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 속한 것을 가로채는 것처럼 하느님이 인간을 벌하여 그에게 속한 것을 빼앗는다. 인간은 훔친 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만 하느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하느님은 죄인에게서 그것을 박탈했다는 사실을 통해 영광을 회복한다. 이를 통해 하느님은 죄인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입증한다.



제15장. 하느님은 자신의 영광에 조금이라고 손상이 가는 일을 허용하는가?


- 보소: 하느님은 왜 영광이 조금이나마 손상당하는 것을 허용하는가? 어떤 방식으로든 훼손당하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완벽하고 온전하게 보존되는 게 아니다.

- 안셀무스: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영광을 주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영광을 빼앗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 하느님은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 역자주)

 하느님은 결코 파괴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영광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은 더해질 수도 없고 감소될 수도 없다. 어떤 특정한 피조물이 그것에게 배정된 분수와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은 하느님에게 순종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이 법칙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이해하는 이성적인 본성에 주어진 것이다. 이성적인 본성이 하느님에게 무언가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기꺼이 하느님의 뜻과 인도함에 복종하고 우주 만물의 질서와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천구 속에 있는 존재들이 하늘에서 달아나려고 해도 그들은 하늘에서 달아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나 사악한 천사가 하느님의 뜻과 질서를 따르지 않으려 해도 하느님의 주권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하늘에서 그들에게 배정된 어떤 측면이 멀어질수록 그 반대부분에 더욱 가깝게 가는 것처럼, 그들이 하느님의 의지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그들은 그들을 징계하는 하느님의 의지의 능력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하느님은 그 존재의 비뚤어진 의지나 행동을 우주만물의 질서와 아름다움 속으로 다시 인도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자발적인 보상이나 대가를 치룰 수 없는 자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우주 속에서 그 질서의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신적인 지혜가 이 같은 요구를 부과하지 않았다면 우주 만물의 아름다운 질서가 손상되어서 추악할 것이며 이는 하느님이 이 세계를 안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적절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므로, 모든 죄가 대가를 치르거나 벌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다.



제16장. 타락한 천사들의 숫자가 인간들 중에서 보충되어야 하는 근거


- 안셀무스: 여기에 덧붙일 말이 있다. 타락한 천사들의 숫자를 하느님이 죄 없이 만든 인간에서 취하고자 계획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느님은 이성적인 본질이 존재할 것을 예견했다. 하느님이 어떠한 수만큼 창조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지 모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만큼 천사를 창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천사들은 하느님이 창조한 천사 수에 포함되거나 필연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그들은 그 숫자 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숫자 안에 포함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숫자가 보충되지 않는다면 완벽한 숫자로 예견되었던 이성적인 본성은 불완전한 숫자로 남는다. 다른 가능한 자원이 없기 때문에 그 숫자는 인간으로 보충해야 한다.



제17장. 다른 천사들은 그들을 대신할 수 없다


- 보소: 타락한 천사 스스로 회복되거나 다른 천사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는가?

- 안셀무스: 타락한 천사가 회복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때문에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천사들이 그들을 대신하면 첫 창조의 완전함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타락한 천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선한 천사들은 죄에 대한 징벌을 알게 되었는데, 죄에 대한 징벌을 아는 존재와 알지 못하는 존재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를 대신할 수 없다. 선한 천사들이 타락한 천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공로를 통하여 확증 받았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선한 천사가 다른 이의 타락을 통해서 확증되어야만 한다면 어느 누구도 확증 받지 못하거나 누군가 타락하여 다른 자들이 확증될 수 있도록 벌을 받아야만 하는데, 이는 터무니없다.

- 보소: 타락한 천사들보다 그들을 대체할 인간이 더 많을 수 있는가?



제18장. 악한 천사들보다 더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존재할 것인가?


- 안셀무스: 천사들 중 일부가 타락하기 전에 천사들이 완전한 숫자로 존재했다면, 인간은 그 숫자 이상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완전한 숫자가 모든 천사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다면 잃어버린 숫자와 본래 부족했던 숫자를 모두 인간으로 채워야 하며 유기된 천사들보다 선택받은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 이 경우, 인간은 소멸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완전하지 못했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이 창세기를 이해하듯 인간이 사악한 천사들이 타락한 이후에 창조되었다면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를 입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완전한 수로 창조되었고 인간이 그 후에 모자란 숫자를 채우기 위해 창조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이 그 숫자를 완전히 채우는 것을 연기해서 하느님이 뜻한 때에 인간을 창조하려고 계획했을 수 있다. 이 두 경우 하느님은 불완전한 수를 완전하게 하거나 그것이 감소했을 때 다시 채우기만 하면 된다.

  만약 모든 창조가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면, 필연적으로 일부 천사들이나 인간들이 타락하거나 천상의 도시에는 완전한 수보다 더 많은 자들이 거주해야 한다. 이때 천사들과 최초의 두 사람은 불완전한 수로 존재했어야 하며, 만약 어떠한 천사도 타락하지 않았다면 부족한 숫자만큼만 인간으로 보충되었을 것이며, 누군가 상실되었다면 상실된 수만큼만 대체되었을 것이다.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옳음을 변호하고 악마를 반박한다. 인간이 천사보다 약하기 때문에 인간이 올바른 상태를 유지했다면 악마가 자신이 연약해서 타락했다고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타락해도 선택받은 인간은 악마가 상실한 그 위치보다 더 귀한 위치로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옳음을 변호한다.

  이러한 이유로 천사들은 천상의 도시를 완전히 채울 수 있는 완벽한 숫자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천사와 인간이 동시에 창조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는 가능하고, 천사와 인간이 동시에 창조되었다면 이는 필연이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의 완전함이 개체의 숫자보다는 본질의 숫자로 이해한다고 해도, 인간의 존재는 그 완전함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그 자체에 대한 하느님의 고유한 목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며 단순히 다른 본질로 된 개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천사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은 천상의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소유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천사들은 일부가 타락하기 전에도 완전한 숫자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천사가 완전한 수였다면 사람이나 천사 중 일부가 반드시 타락했을 것이고 완전한 숫자 외에는 천국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천사가 반드시 타락하지 않았어도 되었다는 말 같음)

  천사들이 완전한 숫자로 창조되었고 인간이 타락한 천사들을 대체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면, 천사들이 타락하지 않는 한 인간이 축복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천사의 타락 때문에 높아진 선택받은 인간들이 기뻐한다면 이러한 비뚤어진 기쁨을 변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다른 존재의 타락을 기뻐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이 이러한 결점을 갖고서도 축복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하느님이 이러한 결점 없이 타락한 천사를 인간으로 대체한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 보소: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신앙을 버렸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경우와 비슷하지 않은가?

- 안셀무스: 아니다. 유대인들이 믿었다고 해도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공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이 받을 만한 자이다.(행 10:35)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간 것은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 보소: 누군가 그 위치에서 탈락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서 있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믿게 되면, 각자는 다른 존재의 타락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 안셀무스: 그렇다면 이러한 확실성이 없다면 다른 존재가 타락하여 벌 받는 것을 기뻐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만약 타락한 존재들보다 그들이 훨씬 더 많다면 그들은 그러한 확실성을 가졌을까?

- 보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이 잃어버린 숫자를 보충하기 위해 창조되었는지, 천상의 도시를 구성하기 위해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천상의 도시를 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숫자 중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천상의 도시를 완성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 안셀무스: 버려진 천사들보다 선택받은 사람이 더 많다면 그렇지 않았을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적당한 결론이 뒤따르지 않게 되며, 천상에 도시에서 미래에 부적절한 것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천사들은 완벽한 수로 창조되었을 수 없으며, 따라서 타락한 천사들보다 축복받은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

  우리는 물질적 구조가 더 나은 세계를 위하여 갱신될 것을 믿는다.(벧후 3:13, 계 21:1) 이러한 일은 선택받은 백성의 수가 다 차고 천상의 도시가 완성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 모든 완성 이후에는 더 이상 지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느님은 둘 다(천상의 도시와 지상의 존재) 완전하게 하려고 의도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느님을 인지할 수 없는 보다 열등한 존재는 결코 완전해지지 못하며 위대한 존재의 완전한 가운데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하는 방식으로만 그와 함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지도에 따라 의식 없는 피조물도 본성적으로 합리적 존재 속에서 의지가 자유롭게 행하는 일을 보여줄 것이다. 이 견해는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해도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고대했던 숫자가 완성되기 전까지 천상의 도시의 완성을 미루었을 것이며, 인간들 자신이 그들 육체가 썩지 않는 불멸성으로 변환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지지된다. 그러므로 낙원(에덴동산)에서 그들은 죽지 않을 능력을 소유했는데, 그들이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은 불멸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이 처음부터 이성적(영적)이고 축복된 천상의 도시와 지상의 인지할 수 없는(비합리적인) 존재를 동시에 완성하고자 했다면, 다음의 세 가지가 가능하다. (1) 사악한 존재들이 타락하기 전에 천상의 도시를 완성하지 못하겠지만, 천사들의 수는 하느님이 물질 세계의 본질을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킬 때의 숫자를 인간으로부터 완성하기 위해 기다렸다. (2) 숫자는 완전했을지 모르나 그 숫자의 최종 확정은 완전하지 않았고, 그 숫자 중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도 세계의 갱신이 있기까지 그 확정은 연기되어 있을 수 있다. (3) 그 확정이 더 이상 연기될 수 없었다면, 세계의 갱신을 서둘러서 이 확정과 동시에 일어나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이 방금 새로 만든 세상을 즉시 갱신하고 사물들을 왜 창조했는지 명백해지기도 전에 갱신 이후에 존재하지 않을 사물들을 곧바로 멸하기로 했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천사들은 완벽한 숫자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확정은 오랫동안 지연될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 경우 새 세계의 갱신이 즉각적으로 발생해야 하는데, 이는 적합하지 않다.

  하느님이 세상을 미래에 갱신할 때까지 이러한 확정을 연기하기를 원했을 것이라는 견해는 조리에 맞지 않다. 만약 최초의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이 죄를 짓게 되었던 시기에 하느님이 선한 천사를 확정했던 것처럼 그들을 확정했을 것이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든 후손과 함께 확정되었을 것이며 더 이상 죄 지을 가능성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의 도시는 천사들의 처음 숫자로 완성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들을 통하여 완성되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타당하다면 버려진 천사들의 수보다 선택받은 인간들이 더 많다는 결론이 나온다.

- 보소: 하느님이 이스라엘 자녀들의 수에 따라 민족들의 경계를 정했다는 말(신 32:8)의 뜻은 무엇인가?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수가 선한 천사들의 수와 상응한다고 이해하여 이스라엘의 자녀라는 말을 하느님의 천사라는 말로 대신해서 읽곤 한다.

안셀무스: 인내한 천사들의 숫자만큼 천사들이 타락했는가 하는 문제가 확실하지 않는 한, 이것은 이전에 했던 진술과 반대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천사들과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선한 천사들만을 나타내거나, 선택받은 백성들만을 나타내거나, 선한 천사들과 선택받은 백성들 모두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또는 하느님의 천사들로 거룩한 천사들만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자녀들로는 오직 의로운 사람들만을 뜻할 수 있거나, 또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천사들만을 나타내며 하느님의 천사들이 의로운 자들만을 뜻할 수 있다. 선한 천사들을 이 두 표현을 통하여 나타낸 것이라면 이는 하느님의 천사들이라는 용어로 사용된 것과 같지만, 이 표현이 천상의 도시 전체를 언급한 것이라면 민족들(선택받은 사람들의 수많은 무리들)이 천상의 도시로 올라갈 것임을 의미하거나 또는 천상의 도시를 채우기로 예정되었으나 아직 채우지 않아 완전히 채워질 때까지 오랫동안 이 세상에 민족들이 존재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나중에 하자. 보소도 빗나간 주제라고 한다.)

  


제19장. 인간은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르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 안셀무스: 하느님은 타락한 천사들의 자리를 사람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 자리를 대체하는 사람은 선한 천사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락한 자들의 위치는 대체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이 시작한 선한 역사를 완성할 수 없거나 하느님이 선한 역사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두 가지 모두 터무니없다.

  선한 천사는 죄를 범한 적이 없는데, 죄를 범하고서 하느님에게 자기 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이 그 천사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죄를 지은 사람을 취하되 대가를 받지 않고 타락한 천사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이 천사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느님은 사람을 죄 짓기 이전에 누렸던 상태로 회복시켜야 한다.

ex) 진주의 비유

- 보소: 하느님이 계획했던 것을 실행할 수 없거나 선한 계획을 후회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 안셀무스: 그러므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즉 인간이 기꺼이 자신의 채무(죄책)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죄를 벌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고 죄인이 축복에 도달하게 할 수도 없다. 

- 보소: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마 6:12)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빚진 것을 갚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우리가 갚을 수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헛되다.

- 안셀무스: 지불하지 않는 자가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헛되지만, 지불하는 자가 기도하는 것은 기도 자체가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의 일부분이다. 하느님은 다른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게 빚을 지고,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협상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이는 지금 대답하지 않겠다.



제20장. 죄의 분량에 따라 대가를 치러야만 하며, 인간은 스스로가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


- 안셀무스: 죄의 분량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당신은 죄에 대하여 하느님에게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

- 보소: 회개,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시 51:19), 금식과 모든 종류의 육체적 수고들, 남에게 나누어주며 용서하는 자비, 그리고 순종을 그 대가로 주겠다. 이를 통해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려준다.

- 안셀무스: 당신이 언급한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당신은 하느님에게 빚을 지고 있다. 사랑, 갈망, 고통, 두려움이 없다면 당신이 그것(누리도록 창조되었던 그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자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남에게 주는 것에 대하여 그 행동이 당신이 빚진 것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주는 것을 받는 사람과 당신은 모두 하느님의 종이며 당신이 주는 것도 당신 스스로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에게 준 것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당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며 당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당신이나 모두 하느님의 종이며 하느님이 무에서 만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복수를 한다면 당신은 만물의 심판자인 하느님에게만 합당한 권한을 당신에게 있는 것처럼 교만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에게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무엇을 줄 수 있는가?

- 보소: 내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죄를 안 짓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빚지고 있다면, 나는 하느님에게 죄값을 치를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 안셀무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보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갈 5:6) 구원받을 수 있다. 불의한 자가 그의 불의함을 돌이켜서 의를 행하면(겔 18:27) “그의 모든 불의한 일들은 용서받을 것이다”(길 18:22, 33:16)라고 된 구절이 있다.

- 안셀무스: 이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기 전에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가 온 후에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구절이다. 우리는 오직 이성으로만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기로 했으므로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앙이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가정하자.


    

제21장. 죄는 얼마나 무거운가?


- 안셀무스: 만일 온 세계가 하느님이 아닌 모든 존재가 멸망하고 무로 돌아가게 된다거나, 아니면 하느님 뜻에 반대하여 그러한 일을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 보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무게는 너무 무거워서 어떠한 손실과도 비교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의 소유물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의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때도 있는데 이때 비난을 받지 않는다. 나중에 그 사람은 우리가 그의 의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을 기뻐한다. 

- 안셀무스: 이러한 일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가 잃어버리는 것을 보충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하지만 하느님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만물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들을 다시 보충할 수 있다.

- 보소: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해도 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항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안셀무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항하여 의도적으로 행하는 일은 어떠한 일이든지 모두 무거운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면전에 있으며,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죄의 크기에 따라 그 대가를 요구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할 의무의 원인이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무엇을 지불하지 않는 한 보상하도록 행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죄의 빚을 지고 있는 누군가를 축복할 수 없는 이유는, 마땅히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22장.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악마에게 정복당하도록 내어 주었을 때 하느님이 얼마나 모욕이 되었으며 이러한 죄과를 위해 치를만한 대가-만족-는 없다


- 안셀무스: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인간은 죄를 지으라는 악마의 유혹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악마를 정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악마는 누군가의 유혹을 받지 않고도 하늘에서 죄를 지었다. 악마는 인간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이보다 약한 인간이 땅에서 죄의 유혹을 거절하기만 하면 그 행동은 하느님의 의를 나타내고 영광을 돌리며 악마를 부끄럽게 했을 텐데, 인간은 그 행동을 쉽게 할 수 있었고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았는데도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악마의 뜻에 따라 내놓아 하느님의 뜻과 명예에 맞서게 되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저지른 죄를 여전히 품고 있으면서 먼저 악마를 정복하여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과 화목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다. 승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강한 불멸의 존재였을 때 악마의 유혹을 쉽게 받아들여 사망의 벌을 받았는데, 이제 인간이 약하고 죽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통하여 악마를 정복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첫 번째 죄의 상처 때문에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나기 때문에(시 51:7) 그렇게 할 수 없다.



제23장. 죄를 지었을 때 인간은 무엇을 하느님에게서 가져갔으며, 그리고 그것을 돌려줄 수 없음에 대하여


- 안셀무스: 악마가 인간을 정복했을 때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두고 계획했던 모든 것이다. 엄격한 정의는 인간이 악마에게 정복당했을 때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가져갔던 것을, 인간이 악마를 정복하여 하느님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인간이 정복당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악마가 하느님에게 속했던 것을 훔쳐간 것처럼, 인간이 악마를 정복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악마는 훔쳐간 것을 잃어버리고 하느님은 다시 얻게 된다.

  인간이 그가 하느님에게서 가져갔던 것 모두를 다시 되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하느님이 그에게 주려고 계획했던 것을 얻을 수 없고 또한 얻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악마에게 정복당한 그 사람(아담)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본성이 부패했고 죄에 오염되었으며, 하느님은 죄에 얼룩진 그 누구도 천상의 도시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악마를 정복하는 그 사람을 통하여 천상의 도시에 들어오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죄인이 죄인을 의롭게 만들 수 없으니, 죄인인 우리 인간은 이러한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



제24장. 인간이 하느님께 빚진 것을 되돌려주지 않는 한, 그는 축복받을 수 없고, 무능함이 그의 핑계가 될 수 없다


- 안셀무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되돌려주지 않아 그 사람이 의롭지 않다고 한다면 하느님에게 빚진 것을 갚지 않는 사람은 더욱 의롭지 않은 사람이 된다.

- 보소: 그런데 그가 갚을 수 없다면 어떻게 그를 의롭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 안셀무스: 그의 무능력이 자기 자신 때문이라면 부분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무능력 속에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무능력은 죄를 경감시키지 못한다. 

ex) 주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구덩이에 빠진 종의 비유

- 보소: 그는 무능력의 원인을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 일은 그의 죄를 증가시킬 뿐이다. 그는 그가 명령받은 것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지 말도록 명령받은 것을 행했기 때문에 이중으로 죄를 범했다.

- 안셀무스: 인간은 기꺼이 죄를 저질렀는데 그 죄값을 치를 수 없었으며 그 자신의 잘못으로 무능력을 가져왔기 때문에 인간 역시 용서받지 못한다. 그래서 죄를 짓기 전에 지었던 빚(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지불할 수 없고 죄 때문에 얻게 된 빚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무능력 그 자체도 죄책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가지는 것도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르지 못하는 무능력도 그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변명의 구실이 될 수 없다. 죄의 결과는 이를 초래한 죄의 변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애원하는 사람에게 그가 빚진 것을 용서해준다. 그가 그것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할 때 그 애원하는 자는 두 가지 중 오직 하나만을 용서받을 수 있다. (1)하느님은 인간이 기꺼이 지불해야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처벌을 취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이것이 그 사람이 그것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하느님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용서해준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느님의 자비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모욕이다. (2)만약 하느님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인간에게서 빼앗아 내려고 하는 것을 면제해준다면, 하느님이 처벌을 면해주고 인간의 죄 때문에 그에게 축복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인간이 가지지 말아야 할 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무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신적인 자비”는 하느님의 정의와 정면으로 상충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에 대하여는 오직 처벌만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정의를 수행함에 있어 자비를 베풀어서 하느님 자신에 대해 상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느님이 빚진 것을 갚지 않는 사람에 대해 그가 대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용서한다고 가정하자. 그는 대가를 치르기를 원할 수도 있고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도움을 받아야 하며,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불의한 자가 된다.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처지에 있거나 불의하다면 그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 한 그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

- 보소: 하느님이 정의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인간은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비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안셀무스: 하느님은 자비롭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현세의 삶 이후에 인간에게 복을 주는 가장 최종적인 자비다. 이러한 축복은 용서받은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으며, 이 죄 사함은 죄의 크기에 따라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렀을 때에만 주어진다.



제25장. 필연적으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 보소: 인간이 자신의 죄의 대가를 갚지 않으며 이를 치르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모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 정도로 풍요로운 자비를 가진 하느님은 자신의 자비로서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엡 2:4)고 주장해야 하는가?

- 안셀무스: 불신자들도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입증해 온 것은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거나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거나 아니면 전혀 구원을 받지 못하거나 이 중 하나인데, 구원을 받는 것이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필연적으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 보소: 만일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인간이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지만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정하자. 그에게 우리가 무엇이라고 답변해야 하는가?

- 안셀무스: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이 필연적인데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 보소: 하지만 우리는 그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그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 안셀무스: 하느님이 어떠한 인간을 얼룩진 상태로 놓고 원래 의도했던 얼룩 없는 상태에서 얻게 될 결말로 인도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똑같은 부적절함 때문에 그 아무도 하느님이 계획한 복된 결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류의 죄의 대가가 기독교 신앙 외부에서 발견되거나 기독교 신앙 속에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연적인 이유를 어떤 것이 참되다고 결론 짓는다면, 그것이 왜 그러한 지에 대한 근거를 알지 못해도 우리는 그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 보소: 내가 당신에게 온 것은 신앙에 대한 나의 의심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입증해 달라고 온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더욱 깊은 것들을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2017.08.08.)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