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30

정◯◯과 괴벨스



글쓰기에서 두 대상을 비교/대조하는 것은 해당 대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설명하기 위해 두 대상에서 추출한 요소가 해당 설명에서 핵심적이거나 유관한지 여부가 글쓰기의 성패를 좌우한다.

<한겨레> 정◯◯ 기자가 쓴 “윤석열과 히틀러”라는 칼럼을 보자.(원래 제목은 “윤석열과 히틀러”였으나 이후 온라인판에서 “윤석열리스크”로 제목이 바뀌었다) 윤석열과 히틀러는 어떤 점에서 비슷한가? 정◯◯ 기자에 따르면, 윤석열은 2차 대전 독일군이 전격전을 하듯 조국・정경심 교수에 대한 수사를 전격적으로 했고, 독일 육군이 독일 공군의 지원을 받듯 언론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둘의 공통점은 이게 전부다. 검찰총장을 비판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이게 정상적인 글인가?

어떤 대상이든 무수히 많은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아무런 고려 없이 두 대상을 고르기만 해도 둘 사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공통점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두 대상의 유관하지 않은 요소만 놓고 비교/대조하기만 해도 망한 글을 기계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

“정◯◯과 이완용”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이완용이 엘리트 코스를 밟았듯이 정◯◯ 기자도 서울대 학부를 나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정◯◯ 기자가 매국노의 행보를 걷지 않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정◯◯과 김의겸”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두 사람 다 기자이고 같은 언론사 소속이었다. 정◯◯ 기자도 소속 조직의 안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도모한 인물인지 의심할만하다.

“정◯◯과 히틀러”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히틀러가 독소전쟁에서 헛발질을 하듯 정◯◯ 기자는 지면에서 헛발질을 했다. 히틀러가 총통으로서 나치 독일의 패망을 불러왔듯 정◯◯ 기자가 편집장으로서 <한겨레>의 패망을 불러올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정◯◯과 심영”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심영이 학생과 시민을 현혹하는 것처럼 정◯◯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현혹하는 글을 쓴다. 심영이 김두한 패에게 당했던 것에서 교훈을 얻어 정◯◯ 기자도 영 좋지 않은 곳에 부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대를 착용해야 할 것이다.

“정◯◯과 김대중”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여기서 김대중은 대통령이 아니라 조선일보 주필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보였지만 언론인으로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못 쓴 글을 악용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수준 이하의 글을 썼지만 지지자들에게 무비판적인 옹호를 받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가만, 이건 맞는 비교/대조인 것 같다.

하여간, 나는 <한겨레>의 “윤석열과 히틀러”을 읽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경향신문>의 “한 달 동안 쳐놀고 재난학교나 만들자”는 칼럼을 읽었을 때와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재난학교 칼럼은 신문사가 칼럼진을 섭외하는 과정에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지만, “윤석열과 히틀러”는 신문사 내부에 좋은 글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람이 뭔가 큰 권한을 가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 기자가 그 동안 글쓰기 칼럼을 연재하고 글쓰기 교육 서적도 냈다는 사실이다. 한 신문사에서 글쓰기 칼럼을 맡는 사람의 글이 이 정도라는 것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문의 위기가 과연 매체 환경 변화에만 기인한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링크: [한겨레] 윤석열과 히틀러 / 정혁준

( 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42125.html )

(2020.04.30.)


2020/06/29

접두사 ‘새-’와 ‘신-’의 차이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학파 이름 앞에 ‘새-’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경우가 있고 ‘신-’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새-’나 ‘신-’이나 둘 다 새롭다는 뜻인데, 둘의 차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두 접두사는 영어에서 new와 neo의 구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neo는 ‘신-’으로 번역하고, new는 ‘새-’로 번역한다. 신-고전학파(Neoclassical), 새-고전학파(New classical), 새-케인스학파(New Keynesian economics), 신-케인스학파(Neo-Keynesian economics)라는 번역어는 이러한 구분을 따른다.

‘신천지’에서 ‘새천지’라는 것이 나왔다고 한다. 바이러스 변종처럼 이단도 변종이 생기는 모양이다. BBC 같은 데서는 신천지의 뜻이 New Heaven and Earth라고 해설한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새천지가 신천지만큼 힘을 얻으면, Neo-Heaven and Earth와 New heaven and Earth로 구분해야 할 것 같다.

(2020.04.29.)


2020/06/28

[외국 가요] 프리템포 (FreeTEMPO)



FreeTEPMO - Sky High

( www.youtube.com/watch?v=M6liO88pir4 )

FreeTEPMO - Immaterial White

( www.youtube.com/watch?v=ISsjyWLIQcA )

(2022.11.29)


내 후배는 왜 심리학과에 진학했을까?

    

나를 보면 영감이 떠오른다고 해서 나를 ‘뮤즈’라고 부르는 후배가 있다. 대학원을 배경으로 한 각본을 쓴다고 했을 때 설마 정말 쓰겠나 싶었는데, 정말 쓸 생각인 모양이다.

   

주말에 만났을 때 후배가 내가 다니는 대학원에 대하여 이런저런 것을 물어서 나는 아는 대로 대답했다. ‘과학철학’은 과학이냐 철학이냐, 과학철학에서 과학은 철학의 수식어니까 철학이다, 철학과에 있으면 문과 아니냐, 나 빼놓고 거의 다 이공계 출신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후배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멀쩡히 과학 하던 사람들이 철학을 왜 해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궁금해서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보았었다. 취업 안 되어서 잠시 비바람 피하러 대학원에 온 사람들도 아니고, 좋은 직장을 가려고 하면 갈 수 있고 전문대학원을 가려고 하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왜 대학원에 왔나. 심지어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왜 대학원에 왔나. 몇 년 간의 현지조사 끝에 도달한 결론은 ‘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별 이유가 없다는 나의 대답에, 후배는 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대학원 가는 데 어떻게 별 이유 없이 가죠? 나도 심리학과 갈 때 『설득의 심리학』을 읽고 갔는데?” 후배는 고등학교 때 『설득의 심리학』을 읽고 심리학과에 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후배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후배는 심리학과를 다녔지만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후배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볼 때는 네가 그 책 읽고 심리학과 가게 되었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생각해봐. 네가 네 남편하고 결혼했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둘의 사정은 전혀 모르지만 아마 그런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결혼하는 데도 별 이유가 없는데, 그까짓 책 한 권 읽고 그 과에 가야할 대단한 이유가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나는 결혼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 결혼할 때 어떤 방식의 의사결정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름대로의 추론을 해보자면 이렇다. 대부분의 부부들에게 배우자가 꼭 그 남자이거나 그 여자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로맨틱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외모가 개연성인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부부들은 신랑이든 신부든 둘 다 못 생겼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취향이나 성향이 자기와 잘 맞네 어쩌네 해도, 사람 취향이나 성향이 다양해봤자 몇 종류 안 된다. 성향 맞는 것이나 신발 크기 맞는 것이나 크게 다를 리 없다. 동화에서나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신데렐라의 발에만 맞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원하는 조건과 적당히 맞으니까 결혼하는 것이지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어서 결혼하겠는가. 어차피 이놈 아니면 저놈이랑 결혼하는 것 아닌가. 남들은 경험으로 아는 것을, 나는 이런 식으로 추론해야만 한다는 것이 슬프기는 하다. 하여간 내 말을 듣고 유부녀인 후배는 자기 무릎을 쳤다. “아, 그러네. 심리학과에 갈 이유가 없었네.”

  

아마도 후배는 고등학생 때 이랬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에 가기 위해 수시 원서를 써야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다. 대학에 가야 하니까 대학에 가는 것이다. 대학에 안 가면 인생이 망할 것 같고, 대학 갈 성적도 되니까 대학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갈 것인가. 여기서 고등학생들의 자기기만이 시작된다. 어떤 과를 가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애한테 굳이 어떤 과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오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그딴 이유는 없었는데 억지로 이유를 만들다가 어느덧 정말로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어차피 나이 먹다 보면 때도 묻고 너도 속이고 나도 속이게 되기 마련인데, 굳이 어른들은 어린 학생들한테 통과의례처럼 자기기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마도, 대학 입시에서 수시가 확대되면서 그만큼 이러한 자기기만도 전국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2020.04.28.)

     

[한국 가요] 이날치 (Lee Nalchi)



이날치 - 별주부가 울며 여쫘오되 [온스테이지2.0]

www.youtube.com/watch?v=5U3gX9Qk4yk )


이날치 - 약성가 [온스테이지2.0]

www.youtube.com/watch?v=jbK68mHsLfg )


이날치 - 범 내려온다 (with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 [온스테이지2.0]

www.youtube.com/watch?v=SmTRaSg2fTQ )



(2019.12.22.)


2020/06/27

[과학기술학] Woodhouse et al. (2002), “Science Studies and Activism: Possibilities and Problems for Reconstructivist” 요약 정리 (미완성)

      

[ Agendas Edward Woodhouse, David Hess, Steve Breyman and Brian Martin (2002), “Science Studies and Activism: Possibilities and Problems for Reconstructivist”, Social Studies of Science, 32(2): 297-319. ]

  

  

  1. Thoughtful Partisanshpip in STS

  2. Why Partisanship?

  3. Research Agendas

  4. Non-Decisions And Undone Science

  5. Extending Reflexivity

  6. Making More of a Place for Reconstructive STS

  7. Who Is the Audience?

  8. Conclusion

  

  

p.297 #1

- 과학기술학에서는 정치적으로 연결된 역사가 있음.

1970-80년대 사회적 가치, 정치적 관심사와 연결되는 한편 실험실, 행위자-네트워크 등 개념적 발전도 일어남.

이러한 작업을 재구성주의자(reconstructivist)라고 함

이는 테크노사이언스가 우연적이고 사회적으로 협상된 것

그리고 더 민주적이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문명을 증진시키려면 테크노사이언스를 어떻게 재구성 할 것인지 문제 삼음

이러한 연구들은 ‘반-과학’, ‘반-기술’이 아님

과학적 탐구 프로그램, 기술 설계 등 공공의 지원이나 지적 관심


p.298 #1

practical utility와 scholarly excellence를 결합하기 위해 이러한 학문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이 논문은 스스로를 지지자(advocates)라고 정의하는 학자들이 지적 호기심 등으로 움직이는 학자들과 어떻게 생산적으로 상호작용 하는지 보일 것임


p.298 #2

과학기술학에서 새로운 강조에 대한 근거를 표현하는 방법

Patrick Hamlett의 관찰 

normative research는 사회적인 목적을 위한 탐구, 기술, 설명을 구성하는 학자들의 

deliberate efforts를 가리킬 때 씀

normative 질문 목록은?

- 어떻게 기술이 구성되어야 하는가?

- 어떤 ‘관련된 사회 집단들’이 그 과정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 기술적인 틀을 만드는 데 도덕적으로 선호할 만한 방법이 있는가?

- 해석적 유연성(interpretive flexibility)이 어떻게 종결되어야 하는가?

- 그러한 종결은 언제 어떻게 다시 열려야 하는가?


p.298 #3

‘activism’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민주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유지하는 지적⋅실천적 활동에 제한됨


p.299 #1

다양한 주제들과 학자들에 걸쳐 있으므로

재구성주의는 특정 의제가 아니라 더 일반적인 주제에 의해 정의되어야 함


■ 논문에서 다룰 내용 [p. 299]

- 과학기술학 학자들이 normative commitments로 표현한 자기 연구를 논평함

- 연구 의제들을 평가함. 어떤 연구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resulting research 사용에 영향을 미쳤는지, 두드러진 당파성을 안 보여도 연구 주제 선택이 활동가주의(activism)과 연관되었다는 것임

- 행동주의 학자들이 마주할 도전을 살펴봄

- 개별 연구자의 업무에서 사회적 실재로서의 연구자까지 살펴볼 것



  1. Thoughtful Partisanshpip in STS



p.300 #1

스펙트럼의 한 쪽 끝에는 미묘하게 규범적 접근(normative approach)이 있음

‘good science’에 대한 수사를 탈신화하하기 위하여 테크노사이언스적 논쟁이나 정책 결정을 탐구함

예) Bendectin mass toxic 소송에 관한 Gary Edmond and David Mercer의 연구

역학의 우선은 law-science lifeworld에 흥미를 가지는 변호사, 과학자, 판사를 연구하는 것

대안적인 법적 표준을 제시함


p.300 #2

행동주의 스펙트럼에서 비-극단적인 끝의 두 번째 접근

예) 컴퓨터 모델링의 기반한 이얼리(Steven Yearley)의 정책 자문


p.300 #3

이런 종류의 처방이 ‘유용한’ 연구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다.

<Cyborgs and Citadels>에서 Gary Downey and Joseph Dumit은

개입자(intervener)가 변화를 위한 운동의 지도자나 정의자(definer)가 아니라 어떤 과정의 촉매라고 주장함

왜냐하면 정치적 경험에서 한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상호작용


p.301 #1

온건한 학자-행동가 버전

participatory action research (PAR)

이들은 시민과 행동가들의 프로젝트를 엄격하게 분석하는 것이 목표

풀뿌리 운동과 학자를 연결하는 것이었는데 과학기술학 학자는 상대적으로 드묾

예) 캠퍼스 녹화와 Green City 프로젝트에 대한 Steve Breyman의 분석, Brian Marin의 ....등


p.301 #2

다른 예들

예) 시드니 하수 처리 시스템에 대한 Sharon Beder의 연구

이 연구는 주류 환경 운동의 촉매가 됨

예) 빵 제조에 신기술 도입에 대한 Todd Cherkasky의 연구

예) 직장에 신기술 도입되는 것에 대한 David Noble의 연구는 직장 생활에 대한 자본주의의 강력하고 파괴적인 영향을 보여주고...

예) Richard Sclove의 분석 – 민주주의와 기술



  2. Why Partisanship?


p.301 #3

공공연한 당파성은 몇몇 지식인들이 좋은 학문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으로 보이게 함.


p.301 #4

자원에 대한 동등하지 않은 접근 때문에, 사회적 결과를 향상시키려는 학자들은 특정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더 나은 달성의 기회를 가진다.

예) 어떤 역학자들은 공동체를 위해 무료 봉사함

그러나 이러한 타이틀 달기가 an across-the-board 전략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몇몇 학자들은 회사 중역임. 

Frank Fischer는 “테크노-코포라티즘(technocorporatism)”이라고 함


p.302 #1

사회과학 문헌들은 무산자들의 문제나 관점이 전문가들의 의제에서 under-represented된다고 함

예) 유해 폐기물 처리장은 인종적 패턴에 따라 위치함. 그 일에 책임지는 전문가가 없어서.

무산자들을 대신하는 당파적 분석은 전문 지식의 불균형을 줄일 수 있는 반면, 그 반대편의 있는 전문가들이 이미 과대 대표하는 것을 잡아내지 못함


p.303 #1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학문적인 목적에서 이끌린 연구가 끝나고 normative-activist 연구가 시작되는 깔끔한 절단면이 없다는 것

다른 비용과 이익은 다양한 접근을 동반함을 알게 되고,

언제 어떻게 당파적 학문이 연관되는지 결정하는 작업을 하는 분야에 대한 구성원을 찾게 됨



  3. Research Agendas


p.303 #2

당파성과 관련하여 학자들이 직면하는 문제: “어떤 주제가 내 관심사로 할 만한가”

이는 activist-orients scholars는 더 적용됨. 주류하고 다르게 보기 때문.

예) 무기 산업

과학기술학 연구의 풍부한 소재가 있지만, 주로 강한 것은 정치학자나 사회학자.

현대전에 탱크 도입이 어떤 기술적 전략적 변화를 이끌었는지에 대한 Chris Demchak의 연구


p.303 #3

연구가 안 된 다른 분야는 excluded group과 관련된 과학 기술 문제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대한 과학기술학 연구가 적음

Wesley Shrum은 저-개발 국가는 주류 과학기술학의 연구에서 무시당한다고 지적함


 


  4. Non-Decisions And Undone Science


 

p.304 #2

‘undone science의 문제’

어떤 분야의 총 연구 비율의 체계적 왜곡의 가능성

필요한 작업의 실패는 cultural blinders, 과학 정책 과정의 이해당사자 등에 의해 일어남

undone science에 대한 분석은 

지식 생산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시사

한 단계 더 높은 분석은

구성주의자들이 미시적 과정들을 개별 관찰들이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지식으로 변형되는 것에 의한 것으로 보는 반면, undone science는 연구 분야나 주제들의 선택에 의한 과정으로 본다는 것


p.304 #3

누구도 R&D 투자의 균형 가이드를 제공할 수 없다.

그런데도 activist-oriented 학자들은 그러한 불균형을 말함

 

p.305 #1

어떤 측면에서 activists는 이것을 쉽게 만든다. 왜냐하면 세계의 패턴이 너무 분명해서.

Daniel Sarewitz가 말하듯, 과학 정책 결정권자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북구와 남구의 R&D 의제의 말도 안 되는 불일치

다음은 undone science의 예


Green Chemistry [p. 305]

20세기 ‘brown’ chemistry는 고유의 구조보다는 경제적 맥락과 실천적 맥락에서 형성되었음

한 측면은 위험한 화학물질을 그렇지 않은 화학물질로 교체하는 것으로 산업 과정을 수정하는 것을 포함함

화학 산업의 greening은 비교적 더디게 진행됨. 부분적으로는 아무도 그린 화학 산업의 잠재성을 모르니까


Alternative Health [p. 306]

industry funding의 우위 덕분에, 합성 화합물로 인한 health risk에 대한 연구는 희박함

대체 의학에 대한 자금 지원이 별로 없어서 그러한 의학에 대한 이해는 제한됨

Nonviolent Action

무기 산업의 R&D 기금은 해양학, 항공학, 심리학 등에 제공됨


 


  5. Extending Reflexivity


p.307 #1

Steve Woolar 같은 사회 구성주의자들은 ~~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리고 과학기술학 학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위치를 위치지어야 하는가?

이는 전통적인 사고 방식

우리는 reflexivist project를 실제로 확장할 것을 제안함.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이 프로젝트가 재평가되어야 함


p.307 #2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가?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면, 새로운 지식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아닌가? (이건 전통적인 생각)

또한 확장해서 보면, 우리의 문제 설정에는 어떤 사회적 힘이 작용했는가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p.307 #3

고려할 만한 비평은

과학기술학이 과학적 연구 분야들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과학 기술 연구의 hot areas는 사회적 분석의 hot areas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과학기술학이 다른 분야들에 대해서보다 너무 많이 성찰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

이는 과학기술학이 undone science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것

또 다른 걱정은 시차

단기적으로 hot topics을 연구하는 것은 중기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


p.308 #1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연구비가 덜 들어서 기업에 휘둘릴 가능성이 적지만

논쟁이 정치적 개입이 쉬울 수 있다.

그래서 관리자는 학과나 연구자에 반대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p.308 #2

과학기술학의 애매한 지위는 전반적으로 압력에 취약함을 의미함

그러므로 과학기술학에서 성찰에 대한 질문은 

Brian Wynne가 명확하게 했듯

초기 SSK 논의의 internalist formulation에 제한된 내재적인 이유가 없다.

다양한 반성적 분석이 더 제도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설정된 성찰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과학기술학이 변하고 있다.



  6. Making More of a Place for Reconstructive STS


p.308 #3

partisanship & social activism은 과학기술학의 intellectual scholarship과 공존

과학기술학의 두 하위문화로 보임

Steve Fuller는 High Church(scholarly STS)와 Low Church(an activist-oriented STS)로 구분

Brian Martin은 과학 비판의 ‘학문화’를 애통해 함

브뤼노 라투르도 둘로 나뉘는 것을 두려워함

Langdon Winner는 ...


p.309 #1

중도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함

David Hess 진영들의 대화를 제안함

Dick Pels는 ...

Evelleen Richards는 

Sheila Jasanoff는

Sandra Harding과 Donna Haraway는 

분리가 여전히 있고 몇몇 학자들은 당파적 연구를 칭친할만한 것으로 보지만, 

우리는 구성주의자의 직관과 actiivist-reconstructivist 의제가 잠재적으로 합쳐질 것이라는 데 낙관적이다.


p.309 #2

이런 입장을 우리가 지지하는 건

이전의 예들이 보여주었듯이, 명백한 당파성이 활동가적 과학기술학 연구의 전제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주의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정책 조언이 과학기술에 대한 수사를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그럴듯한 것이고,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성주의자들은 많은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학기술적 쟁점들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많은 경제학자들도 때때로 옹호자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고교회파와 마찬가지로 저교회파도 과학기술학에 적합하다

 


  7. Who Is the Audience?


p.309 #3

activist researchers는 audience에 대한 어려운 질문에도 직면함

: 누구를 위해 쓰는가? 학문적 동료, 활동가 동료, 일반 대중?

대중 상대로 쓴 것은 학자 세계에서 무시받는 경향

Margaret Wooddell과 David Hess의 여성 암 환자 인터뷰 컬렉션


[pp. 310-311]

두 독자가 만나는 한 가지 방법은

동료 학자를 위한 출판을 한 다음 일반 대중이나 활동가를 위한 번역을 하는 것

예) New Scientist and Technology Review

유감스럽게도, 일반 독자를 위한 글쓰기에 대한 대학원 과정은 거의 준비 안 됨

아카데미의 보상 체계는 활동가적 작업에 대한 걸림돌을 만드는 경향




  8. Conclusion


p.311 #1

여전히 성찰과 구성주의의 여러 교훈은 과학기술학 작업에서 중요함

activist-oriented researchers는 그들의 당파성과 오류가능성을 인정해야 함


p.311 #2

activist-oriented researchers는 기존의 전통적인 청중인 other scholars와 policy-makers가 아닌 다른 청중을 염두에 둔 연구를 한다고 간주할 때 이 작업은 더 잘 될 수 있다.

표1

과학기술학을 구성하는 사람들: scholars, policy-makers, and activists

이 글은 activist-oriented researchers은 학술 논문이나 정책 브리핑 등의 형식을 취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cross-over books(전문가와 일반인을 모두 겨냥한 책)나 전자 매체에도 열려있다고 봄


p.311 #3

scholar-oriented STS는 정책 생산자나 활동가에게 또는 둘 다에게 유용하다고 판명될 수 있음, 우리의 사례가 제안하듯이

activist-oriented STS도 활동가보다 학자에게 더 중요할 수 있다.

인공물이 특정 관심사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결국은 다른 관심사를 serve 할 수 있으므로.


p.312 #1

우리는 과학기술학의 부상하는 새로운 측면을 살펴보았음

구성주의자의 직관과 개념은 과학기술학 분야에 통합되었고

‘committed’ scholarship과 ‘중립적’ 또는 상대적으로 비-당파적 scholarship 사이의 차이도 줄어들었음

논문이 제안하는 것은 네 가지를 더 명시적으로 연구하는 것

(i) normative, activist, or reconstructive intentions를 한 사람의 연구에 통합하는 접근의 범위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

(ii) 관심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연구, 그리고 의제 설정을 위한 더 지속적이고 정교한 과정

(iii) 진보적인 방향의 테크노사이언스를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normative, activist, reconstructive work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iv) 개념적인 기반, 출판 활동, 과학기술학의 보상 체계에 대한 성찰적 분석, 

activist-oriented STS와 다른 분야의 화해의 핵심은, 

더 현명한 테크노사이언스는 더 좋은 정치-경제적 틀에 의존한다는 것

그리고 테크노사이언스 활동은 제안되고 불러일으켜진다는 것

사회 사상의 많은 측면들은 구성주의적 작업과 관련됨

  

  

(2017.09.21.)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