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8

보드카는 마음이 묻어나는 술

철학 전공자와 맥주를 마셨다. 메뉴판에서 보드카가 눈에 들어왔다. 보드카는 증류할 때 숯과 모래가 들어간 증류탑을 이용하는데 이러한 증류 과정에서 맛과 향이 제거된다. 예전에 <시사인>에서 읽었던 칼럼이 떠올랐다. “〇〇형, 보드카는 향과 맛이 없잖아요. 그래서 마실 때 그 사람의 마음이 느껴진대요.”


대륙철학 전공자였으면 내 말에 맞장구를 쳤을지도 모르지만 분석철학 전공자인 그 형님은 내 말을 의심했다. “과학철학 한다는 놈이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말이 되나?”, “아, 저는 보드카를 잘 모르는데 여행 작가인가 누군가가 그렇다던데요.”


그 형님은 보드카를 두 잔 시켰고 각자 한 잔씩 마셨다. “마음이 느껴지냐?” 나는 보드카를 잘 모르지만 독특한 숯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무슨 숯인지는 모르겠지만 숯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약간 텁텁하면서도 화한 맛이 나는데... 마음까지는 모르겠어요.”


그 형님은 보드카를 한 잔 더 시켰다. “이번에는 어떠냐?”, “어... 아까랑 이거 비슷한 건가... 아닌가... 아, 마음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한 잔 더 먹어야 하나?”


그날 나는 마음을 읽기 전에 정신을 잃을 뻔 했다.



* 링크: [시사인] 보드카는 맛없음의 미학을 간직한 술 / 탁재형

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36 )



(2016.04.28.)


2016/06/25

왜 학부생들은 글쓰기 수업에서 자아분열 하는가

     

나는 학부생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교양수업에서 과제물을 첨삭하고 있다. 설명문을 쓸 때는 나름대로 괜찮게 썼던 학생들인데 에세이를 쓰라고 했더니 죄다 자아분열 하는 글을 쓴다. 그런 글을 수십 편 읽다 보니 내 정신도 분열되는 것 같다. 과제는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읽고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무임승차를 막는 방법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를 토대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를 논하는 에세이를 쓰는 것이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자연에서 나타나는 이타적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 교양서적이다. 상대방이 협조전략(이타적인 행위)을 구사할 때 내가 배신전략(이기적인 행위)을 취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라면, 배신전략을 구사하는 개체만 남고 협조전략을 구사하는 개체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는 인간을 포함하여 협조전략을 구사하는 종이 존재한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는 여섯 가지 가설(혈연선택 가설, 반복-상호성 가설, 유유상종 가설, 값비싼 신호 보내기 가설, 의사소통 가설, 집단선택 가설)을 소개한다. 이 여섯 가설은 모두 이타적인 행위가 개체의 생존이나 유전자 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 기반하여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논한다면, 올바른 행위가 개체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된다고 결론내리기는 쉬워도 올바름 그 자체가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주장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글의 완성도를 고려한다면 ‘생존과 무관하게 올바름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전략적으로 좋다. 그런데 학생들 대부분은 어떻게든 ‘생존이나 이익과 무관하게,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본론 중반부까지는 책의 내용에 기반해서 글을 쓰니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 그딴 거 없다’는 식으로 글을 쓰다가, 자기 주장을 쓰는 부분에서는 느닷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글의 내용을 뒤집는다. 게임이론을 언급하던 글에서 갑자기 “인간의 양심”과 “올바른 가치관의 중요성”과 “맹자의 성선설”이 등장한다. 글 중간에 이런 대격변이 일어나니 글이 망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고등학생 때 전국 최상위권에 속했다. 대면 첨삭 때 맞춤법이나 어법을 지적하면 어떤 학생은 해맑게 웃으며 “아, 제가요 맞춤법을 잘 못해요. 수능 때도 이런 거 틀렸어요”라고 한다. 이 말은 수능에서 언어영역을 거의 다 맞고 맞춤법 문제 하나 틀렸다는 말이다. 이들이 추론 능력이나 이해 능력이 부족해서 글을 이렇게 쓰는 건 아니다.
  
담당 선생님이 수업에서 특정 결론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억지로 결론을 끼워 맞추려다 글이 망하는 것도 아니다.(게다가 선생님은 니체 전공자다.) 나는 학생들이 약아서 그러는 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왜 그럴까? 학생들의 글쓰기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받았을 교육이 어떠한 것인지를 고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10년 전 학부 수업에서 어떤 철학과 선생님은 대학입시 논술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대학이 고전에서 일부분을 따와서 논술 문제를 출제하고 이를 두고 언론은 논술 문제의 난이도가 너무 높다고 비판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논술 시험을 전혀 다른 측면에서 비판했다. 대학에서 논술을 채점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논술 문제를 잘 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은 인문계열 전공자를 채점자로 동원했다고 한다. 지원자만 수천 명이라 교수뿐만 아니라 강사와 대학원생까지 탈탈 털어서 채점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철학 전공자는 극소수고 대다수는 어문계열 전공자인데, 그 선생님 말씀으로는 어문계열 전공자들한테 채점을 시키면 논증을 따지는 게 아니라 문장이 예쁘고 내용이 익숙한 글에 좋은 점수를 주고, 논증을 멀쩡히 잘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결론을 내린 글에는 “논리가 비약되었음” 하고는 감점했다고 한다. 어문계열 전공자에 대한 철학 전공자의 불신이 뿌리 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논술이 제대로 운용될 환경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글쓰기 평가도 안 되는 상황에서 글쓰기 교육이 가능할리 없다.
  
내가 학부 때 수강했던 글쓰기 교양 수업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어문계열 교수는 학생들이 해온 과제물을 보고 글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면서 화를 냈고, 그 다음 시간에 학생들은 모두 교수의 구미에 맞게 글을 고쳐왔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와서야 그 교수가 잘못 가르쳤고 오히려 교수 지도 전의 과제물이 더 정상적인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의 글쓰기 지도가 그 정도 수준이었으니, 교사들이 사범대 같은 데서 받는 글쓰기 지도 연수 같은 것도 별반 특별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교육이라고 해서 딱히 더 낫다는 보장도 없다. 논술 학원 강사 중 상당수는 대학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학부생이고 그들이 배운 것이라고 해봐야 대학 들어오기 전에 받은 사교육과 대학에서 받은 교양수업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받은 교양교육이란, 앞서 말했듯 멀쩡한 글을 매끄럽게나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논술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에 도움이 되어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다. 고등학교 때 나는 음악 감상문에 “음악회가 별로였다”는 솔직한 감상을 쓰고 최하 점수를 받았다. 음악 교사에게 글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 평가는 내가 이후 글을 쓰는 데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석차가 뒤바뀌는 경험을 해왔을 최상위권 학생이 내가 겪은 일을 겪는다면 (잃을 게 없는 나와 달리)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어쩌면 주위에서 나 같은 사람이 최하 점수를 받는 것을 보며 저러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대학에 올 때까지 학생들은 글쓰기 교육을 거의 못 받거나, 받는다고 해도 내용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매끄럽게나 쓰면 좋아하는 수준의 사람들에게 지도를 받는다. 이러니, 사회통념에 맞지 않는 결론이 도출되는 글을 쓸 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면 첨삭 때 보면, 자기가 글을 제대로 썼는지, 이상한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학부생들이 종종 있다. 다음 번 대면 첨삭 때 학생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 “글에서 꼭 착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조영남이나 마광수처럼 글을 쓸 필요는 없지만요”라고.
  
  
(2016.04.25.)
      

2016/06/24

[글쓰기] 요리에 비유한 글쓰기 - 노무현 대통령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은 글쓰기를 음식에 비유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1. 요리사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듯, 글 쓰는 사람도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물론 너무 욕심 부려서도 안 되겠지만.
   
2.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가 좋아야 하듯, 글쓰기도 재료가 좋아야 한다.
   
3. 먹지도 않는 음식이 상만 채우지 않도록 군더더기는 다 빼야 한다.
   
4. 글의 시작은 에피타이저, 글의 끝은 디저트에 해당한다.
   
5. 핵심 요리는 앞에 나와야 하듯, 글은 두괄식으로 써야 한다. 다른 요리로 미리 배를 불리면 정작 메인 요리는 맛있게 못 먹는다.
   
6. 메인요리는 일품요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저것 다 나오는 게 아니라 한 메시지에 집중해서 써야 한다.
   
7. 양념이 많이 들어가면 느끼하듯, 과다한 수식어나 현학적 표현은 피하는 게 좋다.
   
8. 음식 서빙에도 순서가 있듯, 글도 순서가 있다. 오락가락, 중구난방으로 쓰면 안 된다.
   
9. 식당 분위기를 파악하듯, 글의 대상을 잘 파악해야 한다. 일식당인줄 알고 갔는데 짜장면이 나오면 황당하다.
   
10 요리마다 다른 요리법이 있듯이 글마다 다른 전개방식이 있다.
   
11. 요리사가 장식이나 기교로 승부하려고 하면 곤란하듯, 글도 진정성 있는 내용으로 승부해야 한다.
   
12. 간이 맞는지 보듯, 글도 퇴고를 해야 한다.
   
13.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처럼, 글도 그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 출처: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메디치, 2016), 22-23쪽.
  
  
(2015.12.29.)
     

2016/06/23

자고 있는데 흙냄새가 나서

자고 있는데 흙냄새가 나서, 나는 내가 죽은 줄 알았다. 온 방 안에서 흙냄새가 났다. 간밤에 황사가 몰려오는 줄도 모르고 창문을 열고 잤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학부 선배의 전화를 받고서야 잠에서 깼다. 선배는 원래 주말에 산에 오르려고 했는데 황사가 너무 심하니 등산은 건너뛰고 오후에 삼겹살을 먹자고 말했다.

잊을 만 할 때마다 화성 이주 계획 같은 야심찬 기획이 언론에 등장한다. 화성에 사람이 거주하려면 몇 년이 걸린다고 하고, 그러려면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게 계획대로 가능한지도 확실하지 않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 비용대로 될지도 의문이고, 도대체 화성에 가서 뭐 하려고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것보다 이미 사람이 사는 곳에서 더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쪽이 비용이 적게 들 것이다. 인간이 화성에 정착하기 위해 얼마나 들지는 가끔씩 언론에 나오지만, 황사를 해결하기 얼마나 필요한지는 언론에서 거의 못 본 것 같다. 황사 관련 테마주가 뜬다는 뉴스는 매년 나온다.

(2016.04.24.)

2016/06/22

온 지구가 내 연애 걱정

나는 만 30세다. 30년 간 연애를 못했다.

눈도 높지 않고 취향도 까다롭지 않은데 연애를 못했다.

멀쩡한 사람도 연애하고 안 멀쩡한 사람도 연애하는데 연애를 못했다.

무생물도 아니고 자웅동체도 아닌데 연애를 못했다.


내가 30대가 되자 내 연애를 걱정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난다.


철학박사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사회운동가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정당인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노무사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군무원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언론인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엔지니어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농업인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자영업자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종교인도 내 연애를 걱정한다.


이러다 온 지구가 하나 되어 내 연애를 걱정하게 되나 싶다.



(2016.04.23.)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