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30

나도 에세이집이나 낼까



개도 쓰고 소도 쓰는 에세이, 나도 에세이나 써볼까? 요즘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이 잘 팔린다고 한다. 내 책 제목은 『그만두고 싶지만 학위는 받고 싶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그런 책을 내면 대학원을 정말 그만두게 될 수가 있으므로 에세이집을 내지 않기로 했다.

(2019.04.30.)


2019/06/29

시멘트 귀퉁이를 베고 자는 화천이 새끼



화천이 새끼가 마당 한 구석에서 시멘트 귀퉁이를 베고 잠을 잤다. 잘 곳도 많은데 푹신한 곳을 두고 굳이 딱딱한 시멘트 귀퉁이를 베고 있었다. 아직 날이 더운 것도 아니라서 시멘트로 체온을 식힐 필요도 없었는데 화천이 새끼는 그렇게 잤다. 꼭 할아버지들이 목침 베고 낮잠 자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2019.04.29.)

2019/06/28

구원에 대한 확신



목사님이 어떤 세미나를 가셔서 오전 예배 때 어느 신학대학교 교수님이 대신 설교하셨다. 교수 겸 목사님은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복음서 중 마태복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를 설명하셨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설교하는 부분은 다섯 번 등장하는데 이는 구약의 모세 5경과 연관된다고 한다. 신기했다. 어떤 목사는 자영업자처럼 설교하고 또 다른 목사는 영업왕처럼 설교하는데, 교수 겸 목사님은 교수처럼 설교하셨다.

예배가 끝나고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 중에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목사님은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도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라서,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사람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종 극성스러운 개신교인들이 구원받았다고 주책 떨고 다니는데 그러면 안 된다.

이치를 따져 봐도 목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논문을 아무리 잘 썼다고 하더라도 논문이 통과될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을 뿐이지 이미 논문이 통과되었다고 선포하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 심사 통과 여부는 심판의 날 이후 논문 심사 결과를 받아본 다음에야 알 수 있다.

(2019.04.28.)


2019/06/27

관심종자 고양이



기숙사에서 사람들이 붐빌 때 제일 붐비는 곳에 고양이가 누워있다. 항상 같은 고양이다. 그 고양이를 보고 어떤 사람은 사진을 찍고 어떤 사람은 만지고 지나간다.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 고양이는 제일 붐빌 때 그 곳에 누워있다. 고양이들은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기 마련인데 그 고양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관심종자 고양이인 모양이다.











(2019.04.27.)


2019/06/26

공정에 민감한 20대들의 맹점



20대 남성을 분석한 <시사인> 기사를 며칠 전에 읽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기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기사 내용은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것이었는데, 무엇과 무엇이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원 수업에서 읽는 논문도 아니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죽 훑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전 세대에 걸쳐 능력주의와 경쟁에 친화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인들은 왜 능력주의와 경쟁에 친화적인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주의를 숭상하고 경쟁력 있는 사람이 경쟁에 익숙한 건 이해하겠다. 그런데 한국인 중에 능력 있고 경쟁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길래 다들 그렇게 능력주의와 경쟁에 친화적인가?

20대가 ‘공정’에 민감하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어떤 것인가? 적어도 그들의 공정은 사회정의와 밀접한 것 같지는 않다. 그동안 여러 대학교에서 청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최저 임금 받으며 하루 종일 고되게 일하면서 휴게 시설도 없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만 했던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한 것이다. 20대들이 그렇게 공정에 민감하다면,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학생들도 꽤 많았을 법하다. 저임금에 고된 일을 하는 청소 노동자들이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상당수 대학의 학내 여론은 파업에 부정적이었다. 노동자들의 월급을 올려주면 자기들이 등록금을 더 내야 한다며 학생들이 노동자들의 파업을 방해하는 학교도 있었다. 취업하기 힘든 현실에 분노하는 20대는 많지만, 비정규직이 차별받는 현실에 분노하는 20대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비정규직이 되는 것은 분노할 일이지만, 누군가가 비정규직이 되어 차별 받는 것은 분노할 일이 아닌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20대가 말하는 공정이 공무원 시험이나 대학 입학시험 등 매우 한정된 영역에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지만 내가 뛰어든 경쟁에서 반칙이 허용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 20대의 공정이다. 남에게 들이대는 남에게 들이대는 공정의 잣대와 나에게 들이대는 공정의 잣대가 달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20대들의 공정은 능력주의를 전제하는 공정이어서 그렇다는 대안적인 설명도 가능하다. 공정한 규칙대로 경쟁하여 능력에 따라 결과물을 차지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20대들이 공유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공무원 시험이나 대학 입학시험 등의 공정성에 그렇게 민감하게 구는 것은 물론이고, 차별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무관심이나 적개심도 설명된다.

내 해석이 옳다면, 20대들이 말하는 공정은 전 세대에 걸친 능력주의와 경쟁을 조금 예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20대들의 공정은 사회정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밥그릇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내가 내 능력껏 밥그릇을 확보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홍준표 식 표현으로 옮기면 “개도 밥그릇을 빼앗으면 주인을 문다” 정도 될 것이다. 20대들이 공정 같은 소리 하니까 언론에서 그대로 받아적는 모양인데, ‘공정에 민감한 20대’라고 하면 안 되고 ‘경쟁 상황에서 합의된 규칙이나 통용된 규칙의 엄수 여부에 민감한 20대’라고 해야 오해의 여지가 줄어들 것이다. 파시스트들이 자기 자신을 ‘애국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을 애국자라고 불러서는 안 되듯이, 20대가 공정 같은 소리를 입에 담는다고 해서 그들이 공정에 민감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페어 플레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페어 플레이가 아름답다면 왜 아름다울까? 과정이 공정한 것 자체가 어떠한 가치를 가져서? 그렇지 않다. 누구나 경쟁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에서만 과정의 공정함이 빛을 발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참가자들이 그 규칙을 숙지하고, 또 그 규칙을 준수하기로 합의하고, 실제로도 잘 지켜서 무사히 경기가 끝났다고 하자. 그런데 규칙대로 경기하고 나서 미리 합의한 대로 진 사람의 손모가지가 날아간다고 해보자.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다. 페어 플레이를 했는데도 왜 아름답지 않은가? 공정하게 져서 손모가지가 날아가든 반칙에 져서 손모가지가 날아가든, 손모가지가 날아간다는 결과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 먹고 늙은 사람들은 살던 대로 살다 죽는다고 치자. 20대들은 남은 날이 많으니 판단을 잘 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능력주의를 숭상할 만큼 능력이 있는가? 나는 경쟁에 친화적일 만큼 경쟁력이 있는가? 과정만 공정하다면 경쟁에서 남들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근거가 있는가? 두 눈 뜨고 공정하게 져서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될 판인데 20대들은 패배의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연대와 협동이 애초에 글러먹었다고 생각한다면, 공정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빵과 서커스를 요구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2019.04.26.)


2019/06/25

하이먼 민스키 모형으로 보는 석사 논문 작성 과정



‘하이먼 민스키 모형’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반쯤 정신이 나가있을 때 신문에 하이먼 민스키 모형이 나왔다. 민스키의 책이나 논문을 본 게 없어서 그 모형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모형이 말하는 것이 꼭 석사 논문 진행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석사 논문을 쓸 때도 그랬고 요즈음 주변 사람들 석사 논문 쓰는 것도 이것과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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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가격 이륙: 석사 논문 주제를 잡고, 자료를 모으고 읽고 분석하고, 개요를 작성하고, 초고를 집필하기 시작함.

- 1차 현금화: 초고 완성

- 언론보도 증가 및 1차 하락: 사람들에게 초고 발표를 하고 까임.

- 열정: 초고를 수정하며 시간과 노력을 투입함.

- 탐욕: 대단한 석사 논문을 쓰고야 말겠다는 탐욕

- 환상: 졸업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

- 새로운 논리 탄생: 이렇게 하면 논문이 심사를 통과하겠다는 논리가 떠오름.

- 2차 하락: 주변 사람들에게 수정된 원고를 보여주고 또 까임.

- 현실 부정: 주변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함.

- 공포: 논문 심사장에서 심사위원들의 공격을 받음

- 투매: 정신을 놓음

- 좌절: 아, 내가 뭘 한 거냐.

- 정상화: 정신을 수습하고 논문을 수정함.

(2019.04.25.)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