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9

사기꾼이나 나치를 연구하여 창의성이나 상상력의 원천을 찾는다면?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왜 창의성이나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철학이 필요하고 인문 교양이 필요하고 예술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철학과 학생이 다른 과 학생보다 더 창의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하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나로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분명히 나는 똑똑한 철학과 학생이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는 것도 보았고 똑똑한 물리학과 학생이 철학과 교수가 된 사례도 보았다(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교수가 되어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런데 왜 경제학도 아니고 물리학도 아니고 철학인가? 임상 실험을 한 것도 아니고 fMRI를 찍어본 것도 아니면서, 왜 다른 학문도 아닌 철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철학자가 경제학자나 물리학자보다 더 창의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철학자가 다른 모든 분야의 학자들보다 창의적이라고 가정하자. 창의적이니까 연구 성과를 내고 교수가 되었겠지. 그런데 그건 교수들 사정이고 그런 교수들에게 배우는 것이 창의성이나 상상력을 돋게 만드느냐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철학을 배우는 것이 창의성과 상상력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분명히 나를 가르친 사람들은 대부분 훌륭한 사람들인데, 왜 나는 이 모양인가? 그리고 나 말고도 다른 비실비실한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된 것인가?

냉정하게 말하면, 내가 보기에 비실비실한 철학과 학생보다는 비실비실한 공대생이 훨씬 창의적인 것 같다. 철학과 학생 중 비실비실한 부류는, 마치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듯이, 그야말로 똑같은 유형의 개소리를 한다. 다종다양한 개소리를 하면 듣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진부하게 틀린 소리를 한다. 반면, 공대생 중 비실비실한 부류는, 비록 자기 과에서는 비실비실할지언정, 뭔가 제각각 그럴듯한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 내가 자연과학을 잘 모르니까 공대생들이 하는 말을 들어봐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맞는데, 어떻게 여기에서 저런 결과물이 뿅 하고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는 사람한테 과학인 것이 모르는 사람한테 마술로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 눈에는 비실비실한 철학과 학생보다 비실비실한 공대생이 훨씬 창의적이다.

예술의 경우도 비슷하다. 나는 어차피 봐도 잘 모르니까 어떤 게 창의적이고 어떤 게 안 창의적인지 잘 모르겠다.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만든 사람이 재주가 좋은가보다 할 수는 있겠는데 그게 곧바로 창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게 미술학원 몇 달 다녀서 되는 수준인지 그 이상의 재능이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보거나 들으면서 ‘아, 대충 좋은 건가 보다’ 하는 것은 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그게 왜 예술이 창의성에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작품 해설을 쓴 것을 보면, 대개는 밍숭맹숭한 말이거나 그냥 개소리가 아닌가 싶은 것들이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가 보다 할 수 있겠지만, 학위논문을 보면 내가 무식해서 작품 해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의심할 만하다. 냉정히 말하자면, 내가 읽은 한국어로 된 예술 쪽 학위논문 쪽에서 멀쩡하다 싶은 건 거의 없었다.

물론, 예술 작품을 만드는 활동 자체는 창의적일 수도 있겠다. 예술하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모아 순간 뽝 하고 표출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영역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게 창의성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예술가 본인들은 창의적이라고 치더라도, 그걸 감상한 사람들이 창의적이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또한, 철학과 학생 중 비실비실한 학생들이 전혀 안 창의적인 것처럼 예술하는 사람 중 비실비실한 사람들도 안 창의적인 거 아닌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학이나 예술을 창의성이나 상상력과 결부 짓고도 지금껏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을 본다면, 철학이나 예술이 창의성이나 상상력의 원천이 맞기나 한지, 원천이 된다고 해도 일반인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도달해야만 창의성이나 상상력 발휘에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둘 중 어느 경우라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창의성이나 상상력 향상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수준 높은 교양을 즐기며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겠으나, 그게 마치 창의성이나 상상력과 직결되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건강기능식품을 의약품인 것처럼 속여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눈여겨보지 않은 곳에 창의성이나 상상력의 원천에 관한 답이 있을지 모른다. 내가 제안하는 후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기꾼이고, 다른 하나는 나치이다.

사기꾼들의 창의성과 상상력은 놀랍다. 어떻게 저렇게 한정된 자원에서 저런 사기 수법을 뽑아내는 것일까? 그들 중 상당수는 학력도 낮다. 철학 같은 건 근처에도 안 가보았다. 그들 중 취향이 고급스러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예술 같은 것과도 상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그들은 놀라운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을까?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항상 화내고 꾸짖는 어떤 독문과 교수는 뻑 하면 독일 이야기를 하며 한국 교육은 반-교육이고 나치 시절 독일 교육과 다를 바 없어서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성을 죽인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나치 독일만큼 창의적인 시대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미친 건 미친 거고 창의적인 건 창의적인 것이다. “마빡에 도장 찍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기상천외한 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창의적인 전략을 짰을까? 어떻게 그렇게 웅장하고 예술적인 군중 동원 행사를 기획할 수 있었을까?

창의성과 상상력을 키우는데 왜 인문학이나 고전이나 예술이 필요하냐고 진부하게 짝이 없게 물어봤자 답은 안 나올 것 같다. 차라리 사기꾼과 나치를 연구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2023.11.29.)


2024/01/28

택시 타려다가 지하철 타고 귀가한 유부남을 보고



아르바이트 하는 회사에서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어떤 분이 회식이라 차를 놓고 왔으니 택시 타고 집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마침 그 분 휴대전화로 전화가 왔다. 그 분의 휴대전화를 일부러 본 것이 아니라 얼결에 슬쩍 보게 된 거라서 화면에 정확히 뭐라고 써있었는지는 잘 모르나 대충 약간 유치하면서도 긴 애칭 같은 것이 써있었다. 그 분이 통화를 마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 씨, 부인이 택시 타지 말고 지하철 타고 오라네?”

그렇게 그 분과 함께 지하철 역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마침 역 안에서 상무님도 만나서 셋이서 같은 객차를 탔다. 그 분이 상무님한테 자기가 원래 택시 타려고 했는데 부인이 지하철 타고 오라고 해서 지하철 타고 간다고 말했다. 그 때의 얼굴을 보았는데 표정이 매우 밝았다. 아까는 어두운 곳이라서 밝은 목소리만 듣고 표정은 보지 못했는데 객차 안은 밝아서 그 분의 표정까지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중간에 내렸고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로 갔다. 기숙사로 가면서 택시 타고 귀가하지 말고 지하철 타고 귀가하라고 해도 웃으면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하고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그 분의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3.11.28.)


2024/01/25

[한국 가요] 장필순 (Jang Pillsoon)



장필순 -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

( www.youtube.com/watch?v=HCjr0F_tzqQ )

장필순 - 그대로 있어주면 돼

( www.youtube.com/watch?v=uI3Tdockmlc )

장필순 - 어느새 [온스테이지 플러스]

( www.youtube.com/watch?v=OQkvF_JKiyM )

장필순 - 그런 날에는 [온스테이지 플러스]

( www.youtube.com/watch?v=L0GT938DAxA )

장필순 -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

( www.youtube.com/watch?v=AQoaUBoKPnM )

장필순 - 낡은 앞치마 [온스테이지 플러스]

( www.youtube.com/watch?v=o_aaQlwuU9w )

(2024.01.27.)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