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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1

일부 전문직 종사자들은 왜 이상한 책을 쓸까?



나는 기분이 안 좋거나 책이나 논문을 읽기 싫을 때 도서관에 가서 이상한 책을 찾아본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마치 내가 시험에 망쳤는데 옆자리 학생이 더 망쳤을 때 위안을 받는 심리와 비슷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오늘 고른 책은 인문학적 자유와 과학적 자유를 대조하는 제목의 책이다. 제목부터 인문학에 대해 뭔가 심각하게 잘못 아는 비-전공자의 냄새가 난다. 부제도 이상하다. 부제는 “의료현장에서 살펴본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 불가능한 구조에 대한 탐구”다. 책날개에 있는 저자 약력에 따르면, 저자는 의사이며 책읽기 모임 같은 것을 한다고 한다. 책 뒷면는 시인, 변호사, 건축가의 추천사가 있는데, 세 사람 모두 인문학에 대한 어떠한 안목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며 세 추천사 모두 이 책이 왜 좋은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제목, 부제, 저자, 추천사만 봐도 저자는 무언가를 알고 책을 쓴 것이 아니며 주변에 저자를 도와주거나 말릴 사람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시나 목차도 이상했으며, 약간만 읽어봤는데도 손대는 부분마다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생물학에서의 주요 담론인 진화론이 말하는 바도 이처럼 인간의 고상한 지위를 박탈”한다든지 “인문학적 사유와 과학적 사유의 첫 번째 핵심적인 차이가 진리를 말할 때 ‘내재적 진리를 말하는가’ 혹은 ‘외재적 진리를 말하는가’”라고 하는 두 문장만 봐도 이 책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의사는 왜 이런 책을 썼을까? 자기 일에 바쁜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대해 왜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책을 썼을까? 그것도 전문직 종사자가 말이다.

사업 망한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 자기가 왜 사업에 망했는지를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방심 → 작은 성공 → 사업 확장 → 폭삭 망함>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나온다. 사업을 말아먹는 연예인들은 자신이 연예계에서 성공한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며 이 능력이 사업에서도 빛을 발할 거라고 생각하여 별다른 준비 없이 사업에 뛰어들어 여지없이 망한다. 의사인 저자가 이런 책을 쓴 이유도 연예인이 멋모르고 사업에 뛰어드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소설을 써보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을지도 모르겠다.

- 1단계: 저자는 어려서부터 항상 머리 좋고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을 것이며, 의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주위에서 똑똑하고 교양 있고 박식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 2단계: 자신의 지능과 지성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는 저자는 인문학에도 손을 대었을 것이고 이 정도는 별 게 아니며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비슷한 수준의 책만 계속 보는 사람들이 빠지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 3단계: 저자는 혼자 책을 읽다가 책읽기 모임 같은 것을 조직하며 세를 불린다. 이런 모임에서 논의하는 수준은 빤하니까 전공자는 오지 않으며, 비슷한 전문직 종사자 등이 모여 자신의 여가 생활을 향유한다. 여기서는 어떤 희한한 말을 해도 누군가의 인격만 깎아내리지 않으면 좋게 좋게 넘어가고, 얼핏 들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할수록 똑똑한 사람 취급 받는다. 너 잘났네 나 잘났네를 반복하며 서로 서로 펌프질을 해준다. 몇 십 년의 떠받듦을 받은 저자는 여기서 탄력을 받아 책을 낸다.

- 4단계: 괴작의 탄생.

나는 이런 패턴이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명망 있는 의사 선생님한테 어느 누구도 “선생님, 책 그렇게 읽으면 안 돼요”, “선생님, 글 그렇게 쓰면 안 돼요”, “선생님, 그 책 그런 내용 아니에요”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책의 겉표지에는 박경철을 “이 시대의 독서가”라고 추켜세우는데, 이러한 주위의 추켜세움이 그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한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해서 다른 분야에서도 별다른 노력 없이 그 분야의 전문가 반열에 든다든지 전문가와 대결해서 대등한 위치에 오를 것이라는 자만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1990년대에 마이클 조던은 잘 하던 농구를 그만 두고 야구와 골프를 함으로써, 어떠한 운동의 최고 선수라고 해서 곧바로 다른 운동에서도 최고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것이 지적인 영역에서는 예외라고 믿는 것 같다.

(2014.12.31.)


2015/02/10

<명량>은 졸작인데 왜 진중권은 맞는 말을 하고도 욕을 먹었나



남들이 이미 다 본 <명량>을 어제 집에서 보았다. 진중권 말대로 <명량>은 졸작이었다. 왜 진중권은 맞는 말을 하고도 욕을 먹었나? 미운 놈은 맞는 말을 해도 미워 보이기 때문인가?

<명량> 관객이 천만 명이 넘었을 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명량>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다들 하나 같이 “그래픽은 좋은데 영화가 별로”라고 했다. 심지어 1년에 책 한 권 안 읽고 공부도 안 하는 과외 학생조차 “<명량>은 그래픽만 좋고 나머지는 별로인 영화”라고 평했다. 주변에서 다들 영화 <명량>이 별로라고 하는데도 언론에서는 <명량>이 연일 흥행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전했다. 왜 진중권만 빼고 <명량>을 대놓고 제대로 비판한 사람은 없었는가? 이순신은 위대하지만 CJ는 더 위대하기 때문인가? <명량>이 졸작이라면 1700만 명이나 보았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디워> 같은 영화도 800만 명이나 보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난리 났던 <디워>지만 오늘날 아무도 그 영화를 국산 CG 기술의 승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일본 수군 함대를 쳐부수었다는 것 말고 도대체 무엇을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보여주었다는 평도 있는데, 영화의 어디에서 이순신의 내면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전투 장면에서 이것저것 보여주려고 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가 이순신의 리더십에 열광하고 있다는 기사도 많이 나왔는데, <명량>에는 리더십에 참고할 만한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명량>에서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이순신이 고뇌하는 장면이 몇 장면 나오기는 한다. 아들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이순신은 “내가 죽어야겠지” 하고 답한다. 오밤중에 바다에서 회오리가 도는 소리를 들으며 뭐라고 궁시렁거리기는 한다. 그게 다다. 거기서 이순신의 무슨 내면을 볼 수 있는가?

영화 <명량>에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나오는가? 아니다. 겁에 질린 부하들을 다잡는 이순신의 지도력이 나오는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나오는가? 무대뽀 정신이 나온다. 전투 시작 전까지 부하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이순신의 행동에 놀라는 것뿐이다. 이순신 혼자 고뇌하고 이순신 혼자 결심한다. 부하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부하들과 전략을 짜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출정 전날 집을 싸그리 불태워서 부하들을 죄다 무주택자로 만든다. 한양에 압송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이순신의 정신이 이상해졌나 싶을 정도다.

주성철이 <씨네21>에 쓴 글에서 “의외로 CG를 통한 기술적 재미보다 작전과 전술을 통해 만들어지는 재미가 더 크다는 게 흥미로운 점”이라고 했는데, <명량>에 대단한 작전이나 전술이 나온 것도 아니다. 영화는 판옥선 열두 척으로 적선 130척(또는 330척)을 격파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명량>에서 전투 초기에 이순신은 적선들이 거친 물살에 흔들리자 그 틈에 화포를 발사해서 적선을 부순다. 정상적인 장면은 거기까지다. 그 다음부터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바다 한가운데 있던 이순신의 대장선이 닻을 끊고 섬 근처로 이동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전략은 좁은 길목을 막아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막는 것이었데, <명량>에서는 해류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지키던 길목에서 벗어나 섬 근처에 떠내려가듯 이동한다. 이것부터 말이 안 되는데, 일본군들의 반응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일본군들은 그 틈을 타서 해협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섬으로 가서 대장선을 포위한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섬으로 표류했고 이순신의 부하들은 겁먹고 나오지도 않을 경우,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장수라면 정예 병력을 실은 몇 척만 대장선 쪽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전속력으로 해협을 통과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구루시마 군대는 전력을 기울여 이순신을 에워싸는가? 영화에서도 구루시마는 거친 물살에 익숙하다고 나오는데 굳이 왜 그러는가? 이순신이 처절한 백병전을 모습,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대장선을 둘러싼 적선 세 척을 물리치는 장면도 말이 안 된다. 적선 세 척이 대장선을 둘러싸자 이순신은 화포를 집중하라고 한다. 그러자 멀쩡한 배의 옆구리를 뚫어놓고 대포를 겹겹이 쌓아서 한 번에 불을 붙인다. 여러 심지에 동시에 불을 붙인다고 해도 여러 화포가 동시에 발사될지 장담할 수 없을 텐데, 영화에서처럼 대포를 위아래로 겹겹이 쌓아놓고 불을 붙일 경우 정교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절대로 여러 화포가 동시에 발사될 수 없다. 불을 어떻게 붙여야 할까? 영화에는 대포에 불 붙이는 장면 없이 수많은 대포가 동시에 터지는 장면만 나온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옆구리를 뜯어낸 판옥선은 대포가 터졌는데도 무사하고, 그 대포를 맞은 적선도 멀쩡하다는 것이다. 폭발의 충격으로 판옥선과 적선들이 당구장에서 당구공 부딪치는 것처럼 되는데, 그런데도 판옥선은 멀쩡하고 배에 탄 사람도 멀쩡하다. 역사적 고증이 문제가 아니라 과학을 무시하고 상식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쇠로 만든 배라고 해도 그런 짓을 하면 가라앉는다.

이순신이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포위를 뚫으니까 구루지마는 화약을 가득 실은 배를 대장선 쪽으로 보낸다. 물살이 그렇게 세서 배들이 휘청거렸던 바다에서 화약을 실은 배는 동력선도 아니고 자동 항법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대장선으로 정확히 간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데 더 말이 안 되는 장면이 그 다음에 나온다. 말 못하는 아낙이 화약 실은 배에 자기 남편이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 배 갑판에 나온 자기 남편의 입 모양을 보고 남편이 하려는 말을 이해한다. 매나 독수리도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 눈이 좋을 수 없을 텐데, 어쨌거나 그 아낙은 남편의 말을 대번에 파악하고 자기 치마를 막 흔들어서 이순신 함대에 신호를 보낸다. 또 이순신 함대는 그 신호를 파악해서 이순신을 위기에서 구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순신의 대장선은 바로 옆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발에도 멀쩡하다. 조선 시대에 어떤 배를 만들었다는 것인가?

이순신은 구루지마를 죽이지만 대장선이 회오리에 휩쓸려 위기에 처한다. 해류를 이용하려던 이순신이 해류에 걸려 죽게 생긴 것이다. 이것만 봐도 <명량>에서 이순신이 얼마나 대책 없는 인물로 나오는지 알 수 있는데, 이걸 또 백성들이 어선을 끌고 나와 밧줄을 걸어 대장선을 구한다. 밧줄을 몇 킬로미터 밖에서 던진 것도 아니고, 당시 어선이 동력선도 아닌데 그렇게 구한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데, 이래놓고 이순신은 “천행” 같은 소리나 한다. 이순신의 아들이 이순신에게 묻는다. “백성을 두고 천행이라고 하신 겁니까, 아니면 회오리를 두고 천행이었다는 말씀입니까.” 백성이 천행이든 회오리가 천행이든 이건 마치 악당이 주인공을 쫓아가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것과 똑같다. 그 유명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명량>에서도 나온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일부 언론에서는 <명량>의 백성이니 천행이니 하는 것을 가지고 염병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이런 기적이 연이어 벌어지자 이순신의 부하들은 갑자기 용기가 생겼는지 일본군 함대로 돌격한다. 영화에서는 ‘충파’랍시고 선체로 들이받아서 적선을 부수는 것으로 나오는데, 쇄빙선도 얼음을 그런 방식으로 부수지는 않는다. 당연히 기술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영화니까 그런 것이 허용한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되면 영화는 더 이상해진다. <명량>에서 이순신과 휘하 장졸들은 거북선이 없으니 충파를 쓸 수 없다고 좌절하는데, 판옥선이나 거북선이나 껍데기만 다르지 선체는 같으니까 거북선으로 들이받는 것이나 판옥선으로 들이받는 것이나 똑같다. 섬에서 구경하던 노인네가 “구선이 부활했다!” 하고 설명충 노릇을 하는 것도 관객들에게 굳이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하들에게 “어차피 선체는 같으니까 들이받으면 우리가 이기는데?”라고 말했다면 애초에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이니 뭐니 하는 명언충 같은 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고 판옥선을 가지고 쓰리쿠션하는 성능 시험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명량>의 이순신의 기괴한 행동은 고문받아 정신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전투 장면 중간 중간에 나오는 백성들은 영화가 촌스러워지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는지 설명하지 못하니까 백성들이 섬에 올라가서 설명충 노릇을 한다. 판옥선이 어떤 배인지를 영화에서 설명하지 못하니까 할아버지가 “구선이 부활했다”고 외치고 지형이나 물살 등을 설명하지 못하고 전술도 설명하지 못하니까 또 할아버지가 “회오리다!” 하고 외친다. 전세가 뒤집혔음을 표현하지 못하니까 섬 위에서 전투를 보던 백성들이 낫을 들고 바닷가로 뛰어 내려가는 장면을 넣는다. 전투가 시골 동네 체육대회도 아니고, 그것도 육상전도 아니고 수전인데 백성들이 낫 들고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전투 끝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격군들이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걸 알까?”, “모르면 호로자식이지” 하는 소리를 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영상으로 표현하지 못하니까 대놓고 대사로 넣은 것이다. 전투 중에 격군이 “판옥선아 버텨줘”라고 하는데 1980년대에 만든 스포츠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다.

간단히 정리하면, <명량>은 개연성 없는 것을 숨기려고 CG로 쳐바른 영화이다. 전투 장면이 긴 것도 감독의 뚝심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 없어서 시각적인 효과로 땜빵하려고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명량>이 졸작이 아니라니. 동아일보 송평인은 <횡설수설>이라는 코너명대로 횡설수설이나 늘어놓는데, <명량>을 졸작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힌트가 된다는 점에서 그의 글을 읽어볼 만하다.


[...] 영화 같은 대중문화는 팝콘과 콜라를 먹고 마시면서 기분전환으로 감상하는 문화다. 재미있게 보면 그만이지 명작인지 졸작인지 따지는 것 자체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평론가는 사람들이 팝콘을 먹든 콜라를 먹든 상관없이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따지는 사람들이다. 송평인은 내가 재미있게 보았는데 명작이니 졸작이니 따지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 명량의 성공은 이순신을 그의 인간적 고뇌까지 담아 형상화한 데다 후반부의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전반부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 과잉의 비평가에게는 대중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이런 것이 잘 안 보이는 경우가 있다.


비평가가 이념 과잉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가 안 보이는 지루한 전반부와 말도 안 되는 전투에 CG만 입혀놓은 지루한 후반부를 보고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송평인이 또 다른 이념에 물들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진중권의 비판에는 오히려 그의 비꼬인 심리가 엿보인다. 디워 비판은 한국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무조건 다 칭찬해주고 본다는 식의 맹목적 애국심(쇼비니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 그가 명량에 괜한 시비를 붙는 데서도 영화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대한 적개심 같은 것이 느껴진다. 모든 애국심이 쇼비니즘은 아니다. 진중권의 시비는 한 번도 건전한 애국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특유의 심리상태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여기가 중요하다. 송평인은 “진중권의 시비는 한 번도 건전한 애국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특유의 심리상태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고 진단한다. <명량>을 재미있게 본 모든 사람들이 무비판적 애국심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송평인처럼 <명량>을 보며 건전한 애국심 같은 것을 떠올릴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이 <명량>을 보며 느낀 즐거움은 <명량>의 작품성보다는 평소 가지고 있었던 “건전한 애국심”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겠다. 그런데 그러한 애국심이 정말 건전한 것일까?

* 링크: [동아일보] 진중권의 영화 ‘명량’ 시비 (횡설수설) / 송평인

( http://news.donga.com/3/all/20140809/65656822/1 )

(2014.12.22.)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