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8

[근세철학] 데카르트, “독자를 위한 서언” 요약 정리

     

[ 르네 데카르트, 『성찰/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탐구/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
 
 
23-24
- 신과 인간 정신에 관한 문제는 이미 1637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된 『방법서설』에서 다룬 적이 있음.
- 『방법서설』에서 신과 인간 정신에 관한 문제를 자세히 다루지 않은 이유
• 한 번만이 아니라 재차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
• 데카르트가 이 문제를 논하면서 따른 길은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는 길이었고, 또 일상적인 관습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으므로, 프랑스어로 써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책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논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님.
- 위의 문제를 자세히 논하기에 앞서 주요한 반론에 답하기로 함.
   
24
- 반론(1): 인간 정신은 자신이 사유하는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본성 또는 본질(naturam sive essentiam)이 오직 사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귀결되지 않음.
• 오직(tantum)이라는 말이 영혼의 본성에 속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배제한다는 것
- 데카르트의 답변: 사물의 진리 순서에 따라 다른 것들을 배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지식의 순서에 따라 그렇게 한 것뿐임.

24-25
- 반론(2): 내가 나보다 더 완전한 것의 관념을 가진다고 해서 나보다 더 완전한 것이 현존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음.
- 데카르트의 답변: 관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님.
• 관념을 질료적으로(materialiter)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고 표상적으로(objective)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도 있음.
• 질료적으로 - 지성의 작용으로(pro operatione intellectus)
• 표상적으로 - 지성의 작용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pro re per istam oprationem repraesentata)
• 질료적인 의미에서 관념은 나보다 더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음.
• 표상적인 의미에서 관념은 비록 내 외부에 현존한다고 가정할 수 없겠지만, 그 본질로 인해 나보다 더 완전할 수 있음.
• 완전한 사물의 관념에서 그 사물이 실제로 현존함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는 나중에 설명할 것임.
 
25-26
- 이외의 비판문은 위의 문제와 관련된 근거들보다는 결론들을 공격했으며, 그것도 무신론자들의 상투적인 논증을 빌렸음.
- 무신론자들이 신의 현존을 논박하기 위해 통상 제시하는 근거
• 신에게도 인간의 정념이 있다고 날조하거나,
•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규정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우리 정신에 있다는 것
- 우리 정신은 유한한 반면 신은 파악될 수 없고 무한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의 반론은 고려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음.
 
26-27
-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알게 되었으니, 데카르트는 다시 신과 인간 정신에 관하여 고찰하고, 동시에 제일철학(primae Philosophiae) 전체의 토대를 다루어볼 것임.
 
 
(2022.02.14.)
    

2016/08/27

예비군 사격훈련 탄착군 형성



예비군 훈련에서 하는 사격훈련은 25미터 정도 떨어진 표적지(과녁으로 쓰는 A4용지 크기의 종이)에 다섯 발을 쏘는 것이다. 표적지에 탄착군이 형성되면 합격이고, 탄착군이 형성되지 않으면 교육 끝나고 추가로 사격훈련을 한다. 예비군 훈련에서는 영점이 맞지 않은 총을 쓰기 때문에 표적지의 어느 곳을 맞추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탄착군이 형성되었는지만 본다. 표적지 어느 곳이든 지름 5cm 원 안에 세 발 이상 맞은 흔적이 몰려 있으면 탄착군이 형성되었다고 간주한다.

이번 예비군 훈련에서 나는 분명히 다섯 발을 쏘았는데, 표적지에는 여섯 발이 맞은 흔적이 있었고 탄착군은 두 개가 형성되었다. 나는 내가 김일성이 된 줄 알았다.

(2016.06.27.)


2016/08/26

욕망에 충실한 할아버지



최 집사님은 요양원에서 간병인 일을 하신다. 간병인들은 노인들의 거동을 도울 뿐 아니라 대화도 하도록 교육받는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계속 말을 걸어주는 것도 치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집사님이 어떤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 집사: “할아버지, 몇 살이에요?”

- 할아버지: “어... 몰라.”

그 다음날 집사님이 그 할아버지에게 또 물었다.

- 집사: “할아버지, 몇 살이에요?”

- 할아버지: “어... 오십은 넘었나?”

- 집사: “아유, 할아버지! 내가 오십이 넘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 할아버지는 치매가 온 건 아니고 치매가 올 듯 말 듯한, 그러니까 아직은 치매가 오지 않은 할아버지다. 요양원에 있는 다른 노인들한테 집사님을 가리키며 “나, 저 여자만 보면 가슴이 떨려”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는 다른 할아버지들이 몇 살인지 다 기억해서, 집사님이 안 보이면 다른 할아버지들한테 “내가 너보다 몇 살 많은데 왜 반말이냐!” 하고 큰소리를 땅땅 친다고 한다. 하지만 집사님 앞에서는 자기 나이를 애써 숨긴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를 싫어할까봐 그런 것이다.

집사님은 요양원 할아버지들은 정말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고 하셨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을 보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2016.06.26.)


2016/08/25

얼룩고양이 꼬리를 끌어안고 자는 새끼 고양이



화천이 새끼가 얼룩고양이 꼬리를 끌어안고 잔다. 같은 집에 사는 고양이들은 피 한 방울 안 섞여도 이렇게 잘 지낸다.




(2016.06.25.)

2016/08/23

그놈의 인성 교육 타령 지겹다



<연합뉴스>는 명문대 재학생과 졸업생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진단을 전한다.


문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몰돼 인성교육이 등한시되는 교육 현실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대학 입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점차 세속적인 도덕이나 규범에는 얽매이지 않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한 성적과 균형 잡힌 인성은 완전히 별개”라며 “오히려 현재의 입시 제도 아래에서 정직함을 근거로 하는 좋은 인성은 학업 성취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예컨대 대학 수시 모집을 살펴보면, 도저히 학생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며 “결국 (사교육 등)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학생은 정직함 등 많은 가치를 포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 인성 교육을 안 한다는데 왜 명문대생들이 일탈 행위를 할까? 상위권 학생이나 상위권이 아닌 학생이나 인성 교육을 안 받는 건 똑같으니 학교 교육 자체가 학생들의 인성에 미치는 영향은 성적과 무관하다. 상위권 아닌 학생이라고 해서 입시 스트레스가 적은 것도 아니니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상위권 학생의 인성이 더 망가질 이유도 없다. 오히려 상위권 학생은 다른 학생보다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고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입는 정신적인 상처가 더 클 가능성이 높다. 입시 위주의 교육과 명문대생들의 일탈 행위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입시 위주의 교육 때문에 명문대생들이 일탈 행위를 한다고 하려면 명문대생들의 일탈행위 빈도가 비-명문대생들의 일탈행위보다 유의미하게 높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자료를 제시하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봤다. 아마도 가능성은 두 가지일 것이다. 비-명문대생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 자료 자체를 안 만들었든지, 아니면 그러한 자료를 만들기는 했는데 유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자료라서 안 보여주는 것이다.

인성 교육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히 제시하는 사람도 없다. 일종의 도덕적 성향을 ‘인성’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인성을 어떻게 특정 방향으로 형성하게 하거나 교정할 것인가?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면 될까? 음악계 비리를 보면 음악이 인성 교정에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 될까? 미술계에도 비리가 있다. 학생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면 될까? 체육계에는 비리와 더불어 구타가 있다. 예절교육을 하면 될까? 절차 따지는 개저씨는 충분히 많다. 윤리 교육을 하면 될까? 그건 몇 십 년간 해온 거라 딱히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이미 경험으로 증명되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좋고 나쁜 자체를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해야 학생들의 인성이 좋아질 수 있을까?

다른 나라에 인성 교육의 사례가 있다면 한국 언론에서 그런 걸 보도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보도를 본 적이 없다. 프랑스 초등학교에서 파업이나 노동권 같은 것을 배운다고 하는데, 그건 인성 교육이 아니라 그냥 사회 교육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를 가르친다고 한다면, 그건 인성 교육이 아니라 그냥 역사 교육이다. 정상적인 교육이라면 어느 과목이든 인성을 망가뜨릴 요소를 교육 과정에 집어넣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인성 교육이라는 게 있다면 입시 위주의 교육과 적어도 내용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똑같은 내용도 대충 설렁설렁 가르치고 등수 안 매기면 인성 교육이고 등수 매기고 경쟁시키면 입시 위주의 교육인가?

인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성 교육이라는 것 자체는 개뻥이고 허구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잘 봐줘봐야 유교적인 관습의 찌끄러기에 불과하다. 법을 잘 만들고 나쁜 놈 잘 잡아내서 법대로 처리하면 되는 거지 조선시대도 아니고 21세기에 무슨 놈의 인성 타령인가?

* 링크: [연합뉴스] 도 넘은 명문대생들의 일탈… “입시 위주 교육이 원인”

( 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21/0200000000AKR20160621147200061.HTML )

(2016.06.23.)


[교양] Wilson (1998), Consili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dward Osborne Wilson (1998),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Alfred A. Knopf).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