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는 학위를 받으면 학위 논문을 제본해서 주변 사람에게 주는 풍습이 있다. 예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논문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공개되지만 여전히 학위 논문을 제본해서 나누어주는 풍습이 남아있다. 어떤 행동 유형이 관례로 자리 잡으면 그 자체로 관성을 지닌다.
논문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이 학위 논문을 안 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받는 사람도 본인이 그 논문을 안 읽을 것임을 안다. 그래도 졸업하면 서로 논문을 주고받는다. 학위 논문은 결혼식 청첩장과 비슷해서, 받으면 부담스러운데 안 받으면 서운하다. 학위 논문은 책장에 일정 기간 꽂혀 있다가 책장을 정리하거나 이사하거나 학계를 떠나거나 할 때 1순위로 버려진다.
원래 나는 제본된 학위 논문 대신 학위 논문 모양으로 만든 다크 초콜릿을 나눠주려고 생각했다. 카카오 함량은 학위 논문의 급에 따라 다르게 하고(e.g. 석사 논문은 카카오 함량 56%, 박사 논문은 카카오 함량 72%나 99%), 논문명 등은 식용 색소로 쓰는 것이다. 안 읽고 자리나 차지하다 버려질 논문을 주느니 토코페롤을 함유한 다크 초콜릿을 주는 것이 여러모로 더 좋다. 그런데 이런 것을 만들어주는 업체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나도 남들처럼 논문을 제본했다.
논문을 주기 전에 논문 속표지에 감사 인사를 쓰는 것이 관례다. 어떤 글을 써야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쓰면 별로 감사하는 마음이 안 느껴진다. 사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데 구체적인 사건을 떠올리려고 하니까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하다. 내 논문을 받는 사람들이 하는 일마다 행운이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문구 가지고는 그런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논문은 엉터리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진짜인데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논문을 줄 때 논문 속표지에 이런 글을 써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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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논문>
이 논문은 ◯◯대학교 6동 307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논문을 받은 사람은 국내 학술지나 해외 학술지에 학술 논문 일곱 편을 7년 안에 게재해야 합니다.
이를 지킨다면 7년 간 행운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3년 간 불행이 있을 것입니다.
미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과학입니다.
이 논문을 버리거나 낙서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학술 논문 일곱 편입니다.
이 논문을 받은 사람에게 행운이 깃들 것입니다.
7년의 행운을 빌면서.
◯◯◯ 드림
(201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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