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다. 다른 대학원생들한테 물어보니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 때 읽고, 어떤 사람은 군대에서 읽었다고 했다. 남들이 다 읽은 책을 나만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안 읽은 것이다. 책 읽기 모임 같은 데서 애먼 놈한테 돈 갖다 바치면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돈 벌려고 책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면서 참고 읽었다.
『멋진 신세계』는 총 열여덟 장으로 구성된다. 15장까지는 그냥 참고 읽었다. 문명국이 이상해보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만 고치면 충분히 괜찮은 곳인데, 작가는 독자들이 거부감을 가지게 만들려고 일부러 기괴한 요소들을 넣은 것 같았다. 아마도 야만인 존과 대비가 되라고 문명국을 그렇게 이상해보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멋진 신세계』를 읽고 기계 문명의 폐해 속에서 인간성을 지키려고 하는 존의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휴대전화 없으면 하루도 못 살고 시골 내려가면 죽는 줄 아는 사람들이 기계 문명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은 좀 웃긴 것 같다. 그러면 존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사람이 어려서 너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면 나중에 커서 좋은 것을 가지게 되어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잘 생겨서 매력적인 여성이 애정을 표현하는데도(역시 사람은 잘 생기고 볼 일이다) 존은 연애도 못한다. 차별받고 자라면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은 경험이 없으니, 래니나가 좋아한다고 들이대는데도 존은 사자 껍데기 벗기는 소리나 한다.
하여간 15장까지 참고 읽다가 16장을 읽으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멋진 신세계』의 문명국이 사실은 플라톤 『국가』에 나오는 이상 국가였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자식 낳으면 좋은 환경에서 키워야겠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반전이 있나. 설민석의 <책 읽어드립니다>에서는 『멋진 신세계』를 소개할 때 플라톤의 이상 국가 이야기는 쏙 빼고 소마 처먹는 이야기나 하고 수면 학습이 어떠니 유전자 조작이 어떠니 하는, 정말 쓸데없는 소리나 했는데, 이 것이 모두 예비 독자를 위한 배려였던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설민석이 존이 조선의 철종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한 것부터 이상하다. 존과 철종이 비슷하려면, 존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듯이 철종이 『주자어류』 같은 것을 읽어야 하는데, 실제 철종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래도 설민석이 여느 때처럼 아무 소리나 한 것 같다. 하여간 『멋진 신세계』을 읽고 우리 생각보다 고대 그리스의 영향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는 며칠 전에 “한국 맥락에 맞추어 이해하기도 힘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전문가들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며 “그리스 철학자들을 숭배하는 한국 교수들보다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훈아가 더 철학하는 자세에 가까이 있다”고 하는 생물학 박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생물학 박사는 아마도 두 가지를 모르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철학이든 문학이든 역사든 고대 그리스와 관련된 전공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생물학 박사는 얄팍하게 기업 강의하는 사람을 보고 소크라테스 전문가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것만 보아도 생물학 박사에게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한국 맥락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이미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일상에서도 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영화 <헤드윅>에 나오는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도 플라톤의 『향연』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나훈아의 <테스형>은 이 경우 그렇게까지 적절한 사례는 아닌 것 같다.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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