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5

고등학교 독서활동지를 보고



아르바이트 하면서 난감한 경우 중 하나는 고객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없을 때다. 고객이 대략적인 얼개를 주고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 받은 돈에 비례하여 양심껏 일을 하겠는데, 고객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라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도 모르면 난감하다. 받은 돈에 비해 일을 적게 해도 찜찜하다. 아마도 내 마음 속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상도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간, 이번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학교에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총 3주차 수업 중 2주차에서야 학교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책 한 권을 읽고 토론한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를 원한다. 어떤 방식으로 기록을 남겨야 하느냐고 물으니 담당 교사는 내가 편한 방식대로 하면 된다고 한다. 아마도 담당 교사는 내가 학생들 토론시키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기 수업에 참고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담당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과에서는 토론 수업을 많이 한다던데 선생님은 철학과니까 토론 수업에 대해 잘 아실 거고…….” 나는 철학과에서 토론 수업을 많이 하는 건 맞지만 토론 수업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학교는 몇 개 없다고 답했다. 다른 과 학생을 만나서 철학과에서는 토론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학부생들이 있는데, 학생들이 그 정도로 아는 것도 없고 분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담당 교사는 내가 진행하는 토론 수업에 관심을 보였다.

1주차 수업 때도 담당 교사는 내가 소개하는 토론 기법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당시 나는 학교 측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토론 수업에 대한 논문에서 적당히 내용을 추출해서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에서 나는 대학에서 하는 토론 수업도 이 모양이니까 고등학교에서 하는 토론 수업이 이상하더라도 이상한 제도를 만든 놈을 욕하고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담당 교사가 내가 소개한 토론 기법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토론 수업 관련해서 서울시 교육청에서 연수를 받는 중인데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준 독서활동지를 활용하여 마지막 주 수업 때 토론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독서활동지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이 있다.

Q1. 글과 관련하여 질문하기

(1)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

(2) 내용을 분석하는 질문

Q2. 나의 관점에서 질문하기

(3) 내용을 평가・논평하는 질문

(4) 삶에 적용하는 질문

삶에 적용하는 질문? 담당 교사에게 물어보았다. “(4)는 선생님이 넣으신 건가요?” 담당 교사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준 서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학생들이나 일반고의 현실을 감안해서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담당자가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삶에 적용할 수 있나? 『고변호사의 주식강의』이나 『숀리 다이어트』? 물론, 고전에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읽으면 자식에게 섣불리 재산을 증여를 함부로 했다가는 노년에 비참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서울시 교육청의 담당자가 현실을 감안해서 독서토론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이런 식으로 독서지도를 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 학생들은 읽은 척 하고 교사들은 속아주는 척 할 것이다. 학생도 시간 낭비, 교사도 시간 낭비다. 왜 교육청에서는 교사들한테 쓸데없는 것을 시켜서 그들의 역량을 소모하는가?

독서 토론 같은 거 시켜봐야 독서도 못하고 토론도 못한다. 차라리 실효성 없는 독서 토론 같은 것을 시키지 말고 책에서 일부를 발췌해서 자료 해석을 하고 추론을 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발췌된 글에서 어떤 부분이 무엇을 함축하는지, 이 부분과 저 부분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을 분석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을 것이고, 발췌한 글과 연관성 있는 다른 책을 발췌해서 분석하는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책을 일부분만 읽을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책 안 읽고 읽은 척 하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제대로 읽고 분석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교사 한 명이 기존의 일을 하면서 새로 교재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중등교사가 25만 명이나 있다. 이들의 교사들의 노동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기만 하면 웬만한 사교육 업체는 다 이겨먹을 수 있다. 교사는 충분히 많이 때문에 책 한 권을 가지고도 충분히 다층적인 분석을 하는 자료를 만들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독서 지도 자료를 만든다고 해보자. 어떤 교사는 20세기 전체주의와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어떤 교사는 포드주의와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어떤 교사는 인디언 보호구역과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어떤 교사는 플라톤 『국가』와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하는 식으로 한다고 해보자. 국어 교사 열 명만 잘 동원해도 교재 한 권은 나온다. 그런데 교사는 25만 명이나 된다. 학교 일이 많으면 교육대학원을 다니는 교사를 쥐어짜도 된다. 방법은 충분히 많다. 이렇게 만든 자료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각 학교에서 쓰든지, 학생이나 학부모가 쓰는지 알아서 하라고 하자. 시원치 않은 학원들은 망할 것이고, 살아남은 학원들은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 교사의 노동력을 활용해서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많아 보이는데, 왜 교사의 노동력을 소진하는지 모르겠다.

요즈음 담당 교사는 학생들 자기소개서를 봐주느라 바쁘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생들이 대학 가는 데 자기소개서 같은 것이 왜 필요한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크립키나 파인만 같은 고등학생들이나 소개할 것이 있지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소개할 것이 뭐가 있다고 그런 것을 쓰게 만드는가? 그런 소모적인 업무만 줄여도 공교육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2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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