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신림역 맥도널드에 가서 모닝세트를 먹으려고 기숙사를 나와 걷다가, 동료 대학원생을 만났다. 동료 대학원생은 책 읽기 모임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으니, 동료 대학원생은 이번 주에 읽는 책은 무슨 젊은 작가상을 받은 작품집이라고 했다.(동료 대학원생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서 책을 보여주며 설명했는데 내가 기억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다.) 하여간 무슨 젊은 작가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대충 보니 절반은 퀴어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20대들이 힘들다고 찡찡거리는 작품이었다. 동료 대학원생은 이러한 수상작들이 다양성의 증가를 보여주는 것인지 약간 의심스럽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어쩌다 퀴어 문학이 나와야 다양성이 증가한 것이지 죄다 퀴어 문학을 하면 뭐가 다양한 것이겠는가.
내가 한국 문학이 이렇게 저렇다 평할 입장은 아니다. 나는 소설을 잘 못 읽고 거의 안 읽기 때문에, 한국 문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한다. 다만, 왜 사람들이 궁상맞고 찡찡거리는 이야기를 왜 구태여 시간을 들여가며 읽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 세상풍파를 겪은 적 없이 곱게 자란 자제들이 20대의 가난과 아픔을 다룬 소설을 보면서 자기가 겪지 못한 세계가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고 공감하고 슬퍼한다면 대충 이해를 하겠는데, 왜 별 볼일 없는 집에서 태어나 그냥저냥 사는 사람들이 왜 소설까지도 궁상떠는 것을 읽는 것일까. 현실의 나도 가난해 죽겠는데 왜 소설 속의 주인공까지 궁상맞아야 하는 것인가. 도대체 그런 소설을 읽으면 어떤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연애에 실패한 20대 문예창작과 학생의 이야기를 연애에 실패한 20대 문예창작과 학생이 읽는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는 것인가.
학부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읽은 책이라고는 소설책밖에 없는 사람들이 소설책 좀 읽은 것 가지고 퍽이나 교양인인 척 하는 것을 보면서, 소설 같은 것을 안 읽고도 충분히 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어차피 소설로 배울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은 일반인이 전문가의 기분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얕은 지식 아닌가. 그런 깍쟁이들을 보고 엇나가서 소설을 안 읽은 것은 아니고 어차피 내가 소설을 못 읽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지금 와서 나를 돌이켜보면 지적이지도 않고 소설도 못 읽은 아저씨가 된 것 같다. 그래도 근거 없는 요상한 자신감 같은 것이 드는 것은, 아마도 허구헌날 소설만 읽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어느 종류의 글도 제대로 못 쓰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내가 소설을 못 읽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훨씬 좋은 글을 쓴다.
내가 단편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요새 흐름을 보니 퀴어물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한국의 퀴어 청년 같은 소리 해봐야 비슷한 이야기가 넘쳐나서 경쟁력이 없을 테니, 아예 다른 시대의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 16세기 일본의 상류층들은 남색을 즐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아 천한 신분 출신이라 그랬다더라 어쨌다더라 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내가 일본사는 잘 모르니까 그건 손을 못 대겠다. 고대 그리스는 어떨까. 요새 한국에서 <테스형>이라는 노래도 유행하니까 플라톤의 『향연』을 모티브 삼아서 단편소설을 써볼까. 영감이 떠올랐다. 소설 제목도 <테스형>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왜 테스형인가. 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모두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어요...”
“알키비아데스, 둘이 있을 때는 형이라고 불러...”
“아, 테스형...”
아무래도 나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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