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5

오타쿠는 왜 좋은 연구자(또는 교수)가 못 되는가

   
협동과정 격언 중에 “오타쿠는 좋은 연구자(또는 교수)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왜 오타쿠는 좋은 연구자가 되지 못하는가. 그 격언을 말해준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그 사람도 그 이유까지는 몰랐다.
  
얼핏 보았을 때는 오타쿠나 연구자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나는 오타쿠가 좋은 연구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오타쿠는 이미 알려진 지식이나 정보에 만족한다. 자기가 알고 있든 다른 사람이 알고 있든, 세상에 이미 알려진 것까지만 관심이 있다. 아무리 잡다하게 많이 알아도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그런지 오타쿠들을 보면 하나 같이 신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하나를 알아도 좋고 둘을 알아도 좋고 마냥 좋다. 오타쿠들끼리 누가 더 오타쿠인지 대결을 벌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알고 있는 것에서 자족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즐거워 죽겠으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물고 빨고 좋아하기나 하지 그 이상을 나아가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연구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서 시작된다. 이미 알려진 것이 맞는 것인지, 알려진 것 사이에 빠져있는 빈 칸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아무리 흥미로운 것이어도 남들이 뻔히 아는 것을 모아놓기만 하는 것은 연구가 아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알아내야 연구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연구자들에게는 오타쿠들에게서 보이는 위험해 보이는 흥분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답이 무엇인지, 답이 있기는 있는지 모르는 판에 그런 이상한 흥분을 느낀다면 무언가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열 개를 알아도 답이 안 나오고 열한 개를 알아도 답이 안 나오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답이 안 나오면 연구가 아니다. 어쩌다 가닥이 잡히나 싶으면 잘 나가는 놈이 와서 그거 아니라면서 훨씬 좋은 논문을 내놓아서 쓰던 논문을 엎어버리게 만드는 판이다. 그래서 웬만큼 잘 나가지 않는 이상 마냥 좋아하기도 힘들 것이다.
  
오타쿠처럼 어떤 것에 대해 과한 관심이나 애착을 보이다가 연구자가 되는 경우도 있기는 있겠지만, 관심과 애착이 강해지기만 한다면 정상적인 연구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것을 잘 모으다 보면 다른 연구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을 모으는 것 자체가 연구는 아니다. 몇 년 전에 어떤 대학원생이 젠체하며 좋은 연구자가 되려면 오타쿠가 되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개소리인 것 같다. 그 대학원생은 연구를 잘 하고 있으려나.
  
  
* 뱀발: 내가 예전에 고등학교에 아르바이트하러 가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왜 오타쿠는 좋은 연구자(또는 교수)가 되지 못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학생들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내가 생각한 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답변을 하거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답변을 하면 책 한 권을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나는 학생들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시작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어떤 학생이 내가 생각한 것과 거의 비슷한 대답을 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주변 학생들이 말해주었다. 그 학생이 오타쿠라고. 그 다음 시간에 나는 약속대로 그 학생에게 책 한 권을 주었다. 그 학생이 좋은 연구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타쿠의 한계를 직시하는 좋은 오타쿠가 될 만한 학생이었다.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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