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2

북뽕



1980년대 후반, 미국의 어느 영화사에서 미국 경찰과 소련 경찰이 공조해서 범인을 잡는 영화를 기획한다고 해보자. 미국 경찰과 소련 경찰이 범인을 잡기 위해 공조한다는 것을 기본 설정으로 하고, 소련 사람들이 서구 문화를 어설프게 아는 것을 이용하여 약간 코믹한 상황을 가미할 수도 있다. 이 때 미국 경찰과 소련 경찰 중 누가 더 멋지게 나와야 할까?

<쟈니 잉글리쉬> 같은 코미디물을 만든다면 두 나라 경찰이 모두 후지게 나와도 되겠지만, 버디 영화를 만든다면 소련 경찰이 미국 경찰보다 더 멋지게 나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 체제가 소련 체제보다 우월하고 세련된 체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소련 사람보다 유・무형의 자원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경찰이 소련 경찰보다 멋있기까지 하면 두 캐릭터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체제는 미국이 나으니 개인 역량은 소련 경찰이 더 낫게 설정해야 두 캐릭터의 균형이 맞는다. 1988년에 개봉한 영화 <레드 히트>(Red Heat)에서는,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소련 경찰 역할로 나왔고 제임스 벨루시가 미국 경찰로 나왔다.

이것을 한국에 대입해 보자. 남・북한의 특수 요원이 공조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든다고 하면, 두 나라 요원 중 누가 더 멋지게 나와야 하는가? 당연히 북한 요원이 멋지게 나와야 한다. 그래야 두 캐릭터의 균형이 맞는다. 초반에 티격태격하다가 공동의 위기를 둘이 협력해서 돌파하고 결국 둘이 우정을 쌓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두 캐릭터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균형이 안 맞으면 티격태격하지도 못하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끌려간다. 후진 체제에서 온 요원이 키도 작고 깡마르고 얼굴도 새까맣고 못 생기고 힘도 없고 머리도 나쁘기까지 하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세계는 미국이 구하고 한반도는 남한이 구한다는 체제 선전 영화를 만들지 않으려면, 캐릭터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문학이나 영화에 관한 소양이 없더라도, 정상적인 판단 능력과 최소한의 미적 감각만 있다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북한 군인이나 요원들이 멋지게 나오는 것을 보고 “북뽕”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북뽕이라고 부를 정도인 사람은, 미적 감각이 후지다고 하기 전에 일종의 강박증세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 중에 미적 취향도 괴상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점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같이 보도했다.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백두산’도 북한 무력부 소속 리준평(이병헌)이 주인공이다. 남한 특전사 대위인 조인창(하정우)이 허둥지둥하는 것과 달리 리준평은 매섭고 날렵하다. 일부에선 이를 ‘북뽕’(북한에 취했다는 뜻)이라고도 부른다. [...]


재작년 개봉한 영화 ‘공조’에선 현빈이 북한 형사를, ‘강철비’에선 정우성이 북한 정예요원을 연기했다. 2013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선 김수현이 북한 간첩을, 같은 해 개봉한 ‘용의자’에선 공유가 북한 정예요원을 연기했다. 드라마 평론가 공희정씨는 “흥행을 위한 것이겠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어디로 향하는지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링크: [조선일보] “살 까는 중입네다”… 안방도 극장도 접수한 ‘북뽕’ 판타지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31/2019123100101.html )

(201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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