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1

진작 그 말을 하지

   
동료 대학원생 중에 학부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아는 사람 중에 뇌 과학 연구자가 있는데 철학 논문을 읽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의심이 들었다.
  
- 나: “과학 하는 사람이 철학 논문을 읽어요? 그냥 취미 생활로 그러는 게 아니라 연구 때문에 그렇다는 거잖아요? 혹시 뇌과학이 과학으로서 덜 정립되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 대학원생: “그런 건 아닌데 [...] 그 분이 심리학과 철학을 같이 전공했어요.”
- 나: “못 믿을 사람이구만. 심리학을 해도 못 믿겠고 철학을 해도 못 믿을 판인데, 심리학에 철학을 같이 했다면 더 못 믿을 사람이구만.”
- 대학원생: “그 분이 세 번째로 쓴 논문이 <사이언스>에 실렸어요.”
- 나: “아, 내가 모르고 오해했네요. 진작 그 말을 하지.”
  
뒤에서 대화를 듣던 다른 대학원생이 배를 잡고 웃었다. 라투르 책에 등장한 사례와 거의 똑같은 대화를 눈앞에서 보니 웃음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라투르의 『젊은 과학의 전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갑(예전 논쟁을 재개하는 듯이 대화한다): “왜소증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이 있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 을: “새로운 치료법? 어떻게 알아? 그냥 네가 지어낸 거잖아.”
- 갑: “잡지에서 읽었다고.”
- 을: “설마! 컬러판 부록에 있었나 보구나.”
- 갑: “아니, <타임스>(The Times)였고, 기사를 쓴 사람은 기자가 아니고 박사 학위 소유자였어.”
- 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은 RNA와 DNA의 차이도 모르는, 어쩌면 직장을 못 구한 물리학자일 수도 있어.”
- 갑: “그렇지만 그 사람은 노벨상을 받은 앤드류 섈리와 동료 여섯 명이 <네이처>(Nature)에 쓴 논문을 인용했어. 그것은 국립보건원(NIH)과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같이 거대 기관들의 지원을 받은 대규모 연구였어. 그 논문은 성장 호르몬을 분비하는 호르몬의 염기 서열이 무엇인지를 밝혀냈어. 이건 의미 있는 일 아닌가?”
- 을: “어, 그럼 처음부터 네가 그렇게 말했어야지. 그렇다면 달라지지. 그래, 뭔가 의미 있는 일이겠네.”(68-69쪽).
  
라투르가 글을 개떡 같이 써서 그렇지 통찰력 있는 연구를 한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한다.
  
  
* 참고 문헌: 라투르, 『젊은 과학의 전선』, 황희숙 옮김 (아카넷, 2016).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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