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5

한국 경제학사 연구는 박정희 신화 탈피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과학기술학 선생님이 최근에 하는 연구 중에 박정희 시대 국민차 선정 사업에 관한 것도 있다고 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민차”를 선정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최초의 국민차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인 것은 현대자동차의 포니와 기아자동차의 브리사이었다. 당시 국민차 선정의 주된 기준이었던 것은 ‘국산화율’이었는데, 포니는 국산화율이 80%였고 브리사는 국산화율이 60%여서 포니가 국민차로 선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선생님의 의문은 국산화율의 기준은 무엇이었는지에서 비롯된다. 포니는 엔진을 미쓰비시에서 사오고 샤시도 일본산이었던 반면, 브리사는 엔젠을 자체 제작하고 샤시도 대부분 자체 제작했다. 그랬는데도 국산화율에서는 포니가 브리사보다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왔고, 국민차 선정 사업 이후 브리사는 소비자와 정치권의 외면을 받았다. 국산화율의 기준은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왜 포니와 브리사에 대결에서 포니가 이겼는가?

과학기술학 선생님은 국산화율 기준에 대한 해답을 1970년대 상공부에서 작성한 자동차 산업 전망 보고서에서 찾았다. 그 보고서에서에 따르면, 당시 상공부는 한국의 경제 성장률과 국민 소득을 예측한 결과 1976년쯤부터 자가용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자동차를 몇 대나 생산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해야 경쟁력이 있을지도 분석했다. 상공부에서 자동차 산업 육성 전략의 주요 고려 요소로 꼽는 것은 국산화율, 가격, 생산대수다. 보고서에는 세 요소를 세 축으로 비교한 그래프도 있는데, 국산화율이 높을수록 생산단가가 높아지며 그에 대응하는 대표적인 국가가 멕시코나 인도 같은 나라라고 보고한다. 보고서의 결론은 국산화율이 아니라 국산 모델에 치중해야 내수뿐만 아니라 수출 경쟁력도 생긴다는 것이다. 이후, 보고서의 방향대로 정부 정책이 진행되었고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국민차 사업에 선정된다.

내가 그 선생님의 발표를 듣고 놀랐던 점은, 당시 상공부 보고서의 예측과 분석이 거의 다 맞았다는 것이다. 당시 상공부에서는 어떻게 그 정도 수준의 보고서를 쓸 수 있었을까? 수업에서 경제학과 선생님들에게서 1970년대 한국 경제학계의 열악함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 당시 한국 경제학계도 그 정도 보고서는 작성할 수준이 되었는데 미국에서 학위 받은 선생님들이 눈이 높아서 당시의 한국 경제학계를 저평가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국 정부의 지원 등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분석할 때 상공부의 역량을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을 비판하는 자료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호황이었고 한국에는 교육열도 높고 저축률도 높고 노동 시간도 길었음을 지적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이 박정희 개인의 역량이나 천재성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박정희 지지자들은 그런 비판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리핀이 장충체육관을 지어준 이야기를 한다. 한국보다 교육 수준도 높았고 기술 수준도 높았고 소득도 많았던 나라들이 경제 성장을 하지 못하는 동안 한국이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은 박정희의 지도력 때문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박정희 지지자들은 박정희가 김일성처럼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식의 전설을 믿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 신화의 핵심 요소는 의사결정에서의 탁월함이다. 야당이 반대해도 고속도로를 만들었다더라, 세계은행이 반대해도 포항제철을 만들었다더라 하는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언주 같은 사람들이 박정희를 천재라고 하는 것도 박정희 지지자들의 공통된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박정희 지지자들에게 당시 국내외의 상황을 말해주어도 그래도 박정희가 의사 결정을 잘 해서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는 믿음에는 흠집이 가지 않는다. 그 둘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박정희 정권의 의사 결정을 분석하는 것은 박정희 신화를 깨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 당시 한국 상공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한국보다 앞섰던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상공부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둘의 수준 차이가 난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수준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의사 결정의 결과가 왜 달라졌는지 등을 분석한다면, 박정희 정권의 역량에서 박정희 개인의 역량과 당시 한국 정부의 역량을 분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사나 과학기술학 전공자 중에 경제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있다면 그들이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

* 링크: [한겨레] “경제성장이 박정희 공로? 위험한 착각입니다”

( www.hani.co.kr/arti/culture/book/923022.html )

(2019.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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