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1

독일에서도 푸코 식 글쓰기 비판



일부 대륙철학 ‘애호가’들의 통념과는 달리, 내가 대학원에서 만난 대륙철학 ‘전공자’들은 글을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예전에 대학원 연구실에 혼자 있던 어떤 들뢰즈 전공자는, 내가 연구실에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혼잣말로 쌍욕을 하고 있었다. 외모부터 순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성격이 순한 사람인데 왜 쌍욕을 하고 있었을까. 그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 “들뢰즈는 미쳤어요. 글이 정상이 아니에요.” 애호가들은 내용 없는 글을 말도 안 되는 게 쓰면서 좋아하지만, 정작 전공자들은 한 문장 한 문장 힘들게 독해하며 어떻게든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려고 한다. 글쓰기 수업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글을 쓰는 학생들 때문에 분개하는 대륙철학 전공자도 가끔씩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영미 식 글쓰기와 대비되는 유럽 고유의 글쓰기 방식이 있다면서 이상한 글쓰기를 고수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외국어도 못하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어서 외국 사정은 잘 모른다. 다만 유럽 학자가 쓴 글쓰기 책 중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살펴보자면, 유럽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상한 글쓰기를 즐겨하는 글 변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토 크루제는 『공포를 날려버리는 학술적 글쓰기 방법』에서 부적절한 학술어가 사용된 사례로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1981)을 든다. 설명을 위해 크루제가 발췌한 부분(p. 9)은 다음과 같다.


수십 년 전부터 역사가들은 마치 정치적 전환점과 그 부수적 사건들 속에서 확고하고 방해하기 어려운 균형, 돌이킬 수 없는 과정, 한결 같은 규정, 몇 백 년 동안 지속하고 나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 멸망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현상, 축적운동과 완만한 포화, 전통적 보고의 복잡함이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은폐시켜 버린 거대하고 고정되어 있는 조용한 토대를 내보이기 위해, 시작하려고 하는 것처럼 특별히 긴 시기에 주의를 기울여 오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시작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때로는 인용 수단, 때로는 손수 만든 수단, 예컨대 경제성장 모형, 물품 흐름의 양 분석, 인구 증가와 감소 곡선, 기후와 기후변화 연구, 사회적 상수 산출, 기술적 조절의 보급과 지속의 수단이 있어야 한다.(100쪽)


여기에 대한 크루제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학술어의 간단명료함에 대해 언급했던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푸코는 언어는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는 견해를 전형적으로 추종하는 인물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첫 번째 문장에는 복잡하게 얽힌 다섯 개의 부분 문장이 들어있고, 두 번째 문장에는 역사가가 손수 작성해서 끼워넣어야 하는 수단이 계속해서 여섯 개나 열거되어 있다. 모든 문장에는 아주 정교하게 짜인 지식 조직이 주요 진술 주위에 화환 모양으로 엮어져 있다. 비록 텍스트에는 정확함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핵심 진술을 찾아내기 위해 화환을 풀어 헤치도록 독자들에게 아주 많은 분석적 작업을 요구한다.


이런 서술 방식은 오늘날 학문에서 훌륭한 문체로 선전하지만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부르디외나 푸코는 그와 같은 서술 방식을 사용할 특권이 있었다. 매력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나쁜 선구자들이다.(100-101쪽)


크루제의 말대로, 마르크스, 프로이트, 부르디외나 푸코는 그와 같은 서술 방식을 사용할 특권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도 맞는 말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고대철학 전공자라고 해도, 제1저자와 교신저자가 대화를 나누는 논문을 쓰지는 않는다. 성리학에 심취한 동양철학 전공자라고 해도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처럼 글을 쓰면 욕먹는다.

오토 크루제는 학술적 글쓰기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 간단하고 유려한 언어: 학술어는 무조건 복잡한 문장을 요구하지 않으며, 주문장과 종속문장 한두 개로 제한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장은 여러 문장으로 해체해야 한다. [...] 명사가 많이 나오는 구문은 동사구문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


- 정확한 개념: [...] 학술적 텍스트에서는 늘 동일한 개념을 사용한다. 문체적 이유에서 동의어를 사용하는 변주는 의미 없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


- 정확한 표현: [...] ‘비교적 많은’이라는 표현 대신 가능하면 퍼센티지 숫자가 나와야 하고 ‘어떤 성향’이라는 표현 대신 그것이 무엇인지 명명해야 한다. '뜻밖의 전략'이라고 말하지 말고 그것이 어떤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 완전한 문장: [...] ‘시골교사는 학교에 갔다. 혼자서. 책이 가득 든 배낭을 메고’와 같이 이야기 텍스트에나 어울리는 표현 방식은 [...] 순서 나열이나 도표를 제외하고는 학술적 텍스트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 의식적 은유 사용: [...] 학술적 텍스트에서는 새롭게 만들어진 은유를 기피해야 하고 사용한다면 은유라고 지칭해야 한다.


- 객관적 서술: 학술적 텍스트는 기분, 자신의 삶에서 온 이야기, 미학적 판단, 시적 표현방식과 같은 사적 정보를 기피한다. [...]


- 사소한 것 근절: 학술적 텍스트는 (소설처럼 여러 주제가 아니라) 오직 한 주제만 추구하고 모든 부차적인 사고를 단념한다. [...] 특히 인문학에서는 부차적인 생각은 각주로 보내 텍스트 흐름이 방해받지 않도록 한다. [...]


- 주도적인 시제는 현재: 학술 텍스트는 대개 현재형으로 쓴다. 역사적 서문에서는 앞선 시간을 나타내기 위하여 텍스트가 종종 현재완료가 과거 시제로 바뀌지만 입장을 표현해야 하는 경우에서는 [...] 현재로 쓴다.(102-104쪽)


참고로, 대학에서 철학(철학박사)과 심리학(심리학석사)을 전공한 오토 크루제는,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10년 동안 글쓰기 문제와 글쓰기 능력 상담 전문가로 활동하고,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글쓰기 센터를 운영했다. 현재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교 응용과학과 교수이며 글쓰기 센터의 소장이며, ‘유럽 학술적 글쓰기 교수협회(EATAW)’와 ‘학술적 글쓰기 포럼’의 공동발기인이기도 하다.

* 참고 문헌

오토 크루제, 『공포를 날려버리는 학술적 글쓰기 방법』, 김종영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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