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30

『쿤의 주제들: 비판과 대응』 출판의 뒷이야기



『쿤의 주제들: 비판과 대응』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인 조인래 선생님이 편역한 책이다. 쿤의 작업과 관련된 논문을 번역한 국내에 몇 안 되는 책으로, 이화여대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조인래 선생님은 이화여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는데 그 책은 왜 이화여대출판부에서 출판되었을까? 책의 머리말에는 이화여대 철학과 선생님의 제안으로 책이 시작되었다고만 간략하게 써있다. 내가 책의 출판에 관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것은 조인래 선생님 정년퇴임 강연 자리였다.

두산인문관에서 조인래 선생님의 정년퇴임 강연 및 퇴임식이 끝난 후 호암교수회관에서 저녁식사 자리가 있었다. 식사에 앞서 조인래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때 책의 머리말에 언급된 이화여대 철학과 선생님도 참석하셨다. 그 선생님은 19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쿤에 관한 연구가 잘 되어있지 않았다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 그 당시 제가 어디에 쿤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에 어떤 자리에서 조인래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이 ‘정 선생님, 그거 틀렸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쿤을 잘못 이해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 그래요? 그럼 어떡하죠?’라고 했어요. 그렇게 제가 조인래 선생님한테 쿤을 연구한 논문을 모아서 책을 내자고 제안했는데, 당시에 쿤을 다룬 논문이 국내에 많지 않았고 또 수준이 고르지 않다고 생각해서 쿤에 대한 외국 논문을 번역해서 책으로 내기로 했고 [...]”


그렇게 그 선생님이 주선해서 책을 이화여대출판부에서 출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약간 놀랐다. 웬만한 사람은 자기 주장이 틀렸음을 알게 되면 숨기거나 뭉개려고 한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자기 주장이 틀렸음을 지적한 사람에게 쿤 연구서를 낼 것을 제안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에 자기가 쿤을 잘못 이해했다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당시에 한국의 쿤 연구 수준이 높지 않았다고만 말했어도 되는데도 그런 것이다. 그 선생님이 인격자라는 이야기는 여러 군데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뒤 『쿤의 주제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전에는 번역된 책을 읽으면서 예전 선생님들의 수고에 빚지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그 책을 보면서 지적 정직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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