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어부와 하버드 MBA 출신 사업가에 관한 우화가 있다. 이 우화는 다양하게 변형되어 코스타리카 버전, 인도 버전, 자메이카 버전, 서아프리카 버전 등도 있으나, 이야기의 기본 뼈대는 거의 비슷하다.
멕시코에 놀러온 사업가가 바닷가에서 빈둥거리는 어부에게 괜히 시비를 건다. 왜 일을 더 안 하고 노느냐는 물음에 그러자 어부는 그날 잡을 고기를 다 잡았기 때문에 그런다고 답한다. 그 말에 사업가는 고기를 더 잡고 돈을 모으면 더 좋은 장비를 구입하고 결국은 큰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한다. 사업가의 잔소리를 한참 듣던 어부는 반격을 시작한다. “당신은 그렇게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겁니까?”, “바닷가에서 한가하게 낚시를 할 겁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소.”
이 이야기의 교훈은 ‘행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자’ 같은 것이라고들 말한다.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이런 엉성한 우화를 듣고는 마치 이전에는 몰랐던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화 속 어부가 아니라 사업가에 감정 이입하기 때문이다.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왜 사업가한테 감정 이입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교훈을 얻는다고 보는 것이 최선의 설명이다. 어부의 눈으로 우화를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닷가에서 평생을 산 어부가 있다. 어쩌다 바다에 가야 좋은 것이지 평생 동안 허구헌날 바다만 보고 살았다고 하자. 정말 좋을까? 조선시대 유배지가 그런 곳이다. 어쨌든 어부는 사는 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어떤 사업가 놈이 와서는, 좋게 구경이나 하고 가든지 물고기나 몇 마리 잡고 갈 일이지,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어부는 생각한다. ‘네가 하버드 MBA를 나왔으면 나왔지 나보고 어쩌라고?’
농사꾼이 하루에 몇 시간 더 일한다고 해서 서산농산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고, 어부가 하루에 몇 시간 더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서 동원참치 같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증권회사 직원이 하루에 몇 시간 더 일한다고 해서 증권사를 인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시골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런데 이 사업가 놈이, 하버드 MBA를 나왔으면 나왔지, 동네 꼴을 봐도 대번에 견적이 나오는데, 물고기 한 마리 더 잡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옆에서 쫑알쫑알 떠들고 앉았다. 어부 입장에서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억세고 무식한 시골 사람의 이미지라면 충분히 “야 이 새끼야, 그게 말이 되면 늬가 이 동네 와서 물고기 잡아서 원양어선 선단 만들어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부는 점잖게 타이른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잖소”라고.
이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행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자’ 같은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런 교훈은 돈이 충분히 많지만 돈 욕심 많아 일을 더 하는 사람에게나 도움이 되지, 돈 없어서 시간을 쥐어짜내며 억지로 일을 더하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지가 달라서 그딴 교훈을 얻어 봐야 사는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이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것은 의연함이다. 시골 산다고 얕잡아보는 도시 사람이 잔소리를 늘어놓더라도, 많이 배웠다고 아는 체 하는 놈이 옆에서 날파리처럼 왱왱거리더라도, 화내지 않고 타이를 수 있는 어부의 의연함, 그런 여유를 배워야 할 것이다.
(201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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