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7

책 열 권 릴레이



동료 대학원생 ㅊ〇〇씨가 책 열 권 릴레이에 나를 추천했다.

규칙에는 나에게 영향을 준 책을 고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책이 나에게 영향을 얼마나 주었는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아마도 나의 행동이나 의사결정을 얼마나 바꾸었는지가 적절한 기준일 것이다. 그에 비하여, 어떤 책을 읽고 모르던 것을 조금 알게 된다던가, 그래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든가, 잘난 척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든지 하는 것은, 적절한 기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책 한 권 때문에 인생이 바뀌는 것은, 얼핏 보면 대단히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물론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바뀌는 사람도 있기는 있을 것이다. 흄의 저작을 읽고 독단의 선잠에서 깼다고 하는 칸트라든지, 어렸을 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자가 되기로 한 앤드류 와일즈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는 대신 나의 행동이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 책 열 권을 고르고 그 책이 어떤 행동 변화를 이끌었는지를 말하기로 했다. 추천도서 목록은 널리고 널렸으니 내가 굳이 그런 목록을 하나 더 만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규칙: 이 글을 보시고 나서 몇 분 동안이나 너무 오래, 그리고 복잡하게 고민하지는 마세요. 꼭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문학 저작만을 고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든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들을 고르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저를 포함한’ 친구 열 명을 태그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여러분의 리스트도 볼 수 있게 말이죠.]

1. 김해경, 『주여, 사탄의 왕관을 벗었나이다』 (홍성사, 1993) / 아홉 살

무당이자 단군교 교주였던 김해경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단군교를 접게 된 과정을 기록한 자서전이다. 무당끼리 하는 작두 배틀 하는 이야기 등 신기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 책을 읽고 더 자극적인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2. 전인권, 『편견 없는 김대중 이야기』 (무당, 1997) / 열세 살

<한겨레신문>에 나온 책 광고를 보고 사서 읽은 책이다. 김대중의 활용가치를 제시하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는데, 나는 이 책을 읽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커서 정치인이 되어야겠다고 한때 생각하기도 했다.

3. 김용옥 『노자와 21세기』 (통나무, 2000) / 열여섯 살

나는 한때 도올 김용옥의 팬이었다. EBS에서 하는 김용옥 강의를 보면서 김용옥처럼 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장래희망을 정치인에서 학자로 바꾸었다. 학문에 관심이 있어서 학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 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학자가 되면 김용옥처럼 되는 줄 알았다.

4. 홍성대, 『수학의 정석』 / 열일곱 살-열아홉 살

아이들이 책을 안 읽어서 사고력이 떨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청소년기에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 중에 몇 권이나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스럽다. 청소년기에 제대로 된 책을 읽기는 쉽지 않고, 고전을 읽어봐야 이해 못하므로 역시 도움이 안 된다. 아인슈타인이 중학생 때 『순수이성비판』을 읽어서 아인슈타인이 된 게 아니라, 아인슈타인이라서 중학생 때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릴 때 짜잔한 책을 읽느니 그 시간에 『수학의 정석』에 읽는 문제 하나를 더 푸는 것이 더 인생에 도움이 된다. 돌이켜 보면, 청소년기에 접한 책 중에 『수학의 정석』만큼 인생에 도움이 된 책이 없다. 공부를 잘 해서 『수학의 정석』이 인생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못하기는 했지만 청소년기에 읽은 책이 죄다 쓸모없으니 그나마 『수학의 정석』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5. 이종관, 『과학에서 에로스까지』 (철학과현실사, 2005) / 스물한 살

학부에서 수업교재로 썼던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i) 다수의 의견을 믿지 않게 되었고 (ii) 예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쓰면 그의 지적능력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으며 (iii) 교육을 통해 사람이 나아질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게 되었고 (iv) 사람을 현혹하는 것은 정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6. 맨큐, 『맨큐의 경제학』(3판), 김경환・김종석 옮김 (교보문고, 2005) / 스물한 살

나는 학부 때 경제학을 복수전공하기는 했으나 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소중한 교훈을 얻었는데, 그 중 하나가 철학 전공한다고 유세 부리지 말고 다른 학문이 하는 말을 겸허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걸핏 하면 철학 같은 소리나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는데, 사회 현상에 관한 그런 사람들의 견해는 죄다 헛소리였고 경제학원론 수준의 교재와 비교해보면 지극히 유치한 것이었다. 내가 과학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게 없으면서 과학철학을 전공하기로 한 데는 이 때의 경험이 영향을 준 것 같다.

7. 이기동, 『도올 논어 바로 보기』 (동인서원, 2001) / 스물세 살

학부에서 동양철학도 복수전공 했지만 동양철학 대학원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데는 이 책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다. 학부 때 들은 동양철학 전공수업에는 대부분 심각한 결함이 있었는데, 그 정점에는 이 책이 있다. 동양철학에 대한 피상적인 관심이 학부 철학과 진학으로 이어진 것인데, 막상 학부에 입학한 이후 일단 동양철학은 취미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이 한 개인의 일탈이었다면 나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의 동양철학 학부생 중 상당수가 이 책의 저자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이는 내 진로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8. 사마천, 『사기열전』(전2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2001) / 스물네 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나온다. 특히 「이사열전」에 나오는 구절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사는 초나라 사람이다. 젊어서 관리를 하던 중 화장실에 사는 쥐는 먹는 것도 변변치 못하면서 항상 불안에 떨며 사는데 곳간에 사는 쥐는 배 불리 먹으며 편안히 사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서 진나라로 갔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대학원에 가지 못해서 결국 군대에 갔다.

9. 박재희, 『손자병법으로 돌파한다』(전2권) (문예당, 2003) / 스물일곱 살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한동안 백수로 살면서 발생 확률이 매우 낮은 재수 없는 일이 1년 넘게 연달아 일어났고 운동 없이 체중이 20kg 가까이 줄었게 되었다. 이 때 마음을 다잡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었다. 자기계발서 비슷하게 나온 책이지만 『손자병법』 13편 원문이 모두 들어있다.

10.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전2권),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02) / 스물일곱 살

대학원을 가야겠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극약처방으로 읽게 되었다. 강유원 박사가 석사 1학기 때 『서양철학사』를 50번 읽었다는 말을 듣고, 탈레스부터 칸트까지 두 번 읽었다. 학부 4년 동안 안 것보다 이 책 읽고 알게 된 게 더 많다. 그만큼 나는 쓰레기였고 학교를 매우 엉성하게 다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반성했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성경책 읽으면서 참회하는 게 이런 거 비슷한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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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에 따르면 열 명을 태그하라고 했는데, 좋은 책 말고 정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꾼 책을 쓸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마광수는 가장 인상 깊게 읽는 책으로 『금병매』를 꼽는다. 여섯 살 때 그 책을 읽었는데 그게 이후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나이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게 맞나보다.) 페이스북 친구 중에 그런 고백을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카마수트라』를 읽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사람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좋은 책은 사람들이 수시로 소개하니까, 릴레이는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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