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4

n번방 사건에서도 멈추지 않는 문화 타령



청나라 말에는 아편 중독이 만연했다. 왜 그랬을까? 적어도 ‘아편을 피우는 문화가 만연해서’라는 대답은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아니다. 아편을 피우는 문화가 만연하다는 말은 아편 중독이 만연하다는 말을 다른 표현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아편에 대한 관념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도 별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옛날 사람들이 무지했더라도, 아편이 안 좋은 줄은 알았다. 지금 같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편이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미 청나라 옹정제 때부터 아편 금지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아편 소비량이 증가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편 문화나 풍습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다른 요소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황제의 명령이 먹혀들지 않은 원인이 무엇인지, 당시 관료제가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마약 제작과 유통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범죄 수익은 어떻게 배분되었는지, 유착 관계는 어떠했는지 등등. 백성들이 왜 아편에 손댔느냐가 아니라 왜 중앙정부에서 백성들이 아편에 손대는 것을 막지 못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분석 같은 분석이 나올 것이다.

나는 성범죄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못된 놈들의 손에 못된 짓을 저지를 수단이 있어서 못된 짓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범죄자들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 그렇게 특별하고 이상한 현상인가? 동네 똥개에게 똥을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설명이 요구되는 현상이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 한가한 소리나 하던 사람들이 n번방 사건 같은 것이 터진 와중에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한가하게 문화 타령, 욕망 타령이나 한다.

이상하게 여길 것은, 범죄자들이 텔레그램이나 비트코인을 사용해도 이렇게 잡아낼 수 있는데, 그 전에도 그들을 잡는 것이 기술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큰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왜 그 동안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경찰은 이러한 성 착취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알았는데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인가? 한국의 법 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길래 툭하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것이며, 그런 보도가 나와도 왜 처벌 수위가 높아지지 않는 것인가? 이는 각 부문마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 주마간산 격으로 문화가 어떻다, 이러저러한 문화가 있다는 말로 넘겨짚을 일이 아니다.

문화 타령은 잘 해봐야 현상을 나열할 뿐이다. 현상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분석해야 뭔가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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