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배운다고 해서 없던 통찰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방송 같은 데서 인문학 타령, 통찰력 타령 하는 사람 치고 통찰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드문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렇지만 인문학과 통찰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러한 사례들을 아무리 많이 접하더라도 미련을 못 버릴 수도 있다. 방송에 나오는 떠벌이들과 별개로, 정말로 인문학에서 통찰력을 얻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방송에 나오는 떠벌이들도 원래는 똥멍청이였다가 인문학을 접하고 그나마 상태가 좋아진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문학을 배운다고 통찰력이 생기는지와 별개로, 인문학을 배워서 생긴다는 통찰력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 뻥쟁이들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인문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은 “그러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보는 것”이고 “별다른 설명 없이 한 눈에 딱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빙의나 신탁이나 기타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능력을 얻는가? 뻥쟁이들은 “인문 고전이 지혜를 준다”고만 말하고 어떤 지혜를 어떻게 주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고전을 통해서 거기에 등장하는 일종의 모형과 사례를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나 중세의 고전들에 모형이 명시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저자 나름대로 가진 암묵적인 모형에 맞게 사건이 각색된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사회과학이 없던 시절에는 그러한 고전들이 교과서와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고전들을 통해 그러한 사례나 모형을 학습한 사람들은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보다 당시의 현실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전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전을 읽은 사람들이 발휘하는 판단력이 신비롭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아는 사람에게 과학인 것이 모르는 사람에게 마법으로 보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고전에서 지혜를 얻어서 오늘날 현실 문제에 써먹으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 고전에 나오는 사례가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고전의 저자들은 역사적인 사례들을 얼마나 잘 분석했는가? 그런데 따져보면 고전의 저자들도 당대의 일이나 그 이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오늘날 우리보다 잘 알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실을 일부러 왜곡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단은 이것을 검증하거나 알아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따져보아야 할 것은 고전의 저자가 암묵적으로 전제한 모형이 맞느냐는 것이다. 그 모형의 설명력이나 예측력은 믿을 만한가? 당시로서는 자료도 부족하고, 이론도 없고, 모형도 없고, 분석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이 허구헌날 덕 타령이나 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라가 잘 되어도 덕 타령, 망하면 덕 타령, 전쟁에서 이겨도 덕 타령, 져도 덕 타령이다. 물론 당시에도 현장 기록이나 보고서 같은 것을 썼고 그 중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읽을 맛이 나겠는가? 그런 것은 연구자나 읽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주로 읽는 옛날 책도 덕 타령이나 하는 책이고, 고전에서 얻은 지혜랍시고 “초심”이니 “애민”이니 하는 소리나 하는 것이다.
고전의 저자들이 제시한 모형이 맞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형을 어떻게 응용해야 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게 추출한 모형이 맞더라도, 내가 분석하고자 하는 현실 문제에 부합하는지도 알아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쉽다면 사회과학대학에서 석사 학위 받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고전에서 지혜를 얻어서 오늘날에 써먹기 위해서는 (과거 사례)-(모형)-(현재 사례), 이렇게 세 가지를 모두 다 잘 알아야 한다. 셋 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인문학에서 얻는 통찰이 이러한 성격의 것이라면, 인문학적 통찰력에 미련이 남은 사람이라도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아니, 그러면 인문고전에 대해서는 인문학자에게 묻고 한국 사회의 문제는 사회과학자에게 물으면 되지, 왜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인문학자에게 묻는 겁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인문학에서 통찰력을 얻는다는 잘못된 생각에 근거하여, <인문학에서 통찰력을 얻는다> → <인문학자에게 통찰력이 있다> → <인문학자에게 사회 문제를 묻자>는 망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방송에서는, 심지어 시사프로그램에서도 인문학자를 불러서 현실 문제를 물어본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부르면 정상적인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식으로 부르는데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 나올 리가 없다. 왜 철학 박사에게 남북 문제와 외교 문제를 묻는 것이며, 왜 역사학 박사에게 경제 문제를 묻는 것인가? 정치학 박사나 경제학 박사는 다 얼어 죽었나?
그런 방송에는 꼭 오프닝에 “철학자의 통찰에서 지혜를 얻는다”, “역사학자의 통찰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멘트는 꼭 들어간다.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PD나 작가 중 상당수는 인문대 출신들일 텐데, 이 또한 인문학을 배운다고 없던 통찰이 쥐뿔 안 생긴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일 것이다.
(2020.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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