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유의 것으로 언급되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화병(火病)이다. 화병에 대응하는 외국 질병이 없어서 미국정신의학회도 화병의 공식 표기를 화병의 한국어 발음인 ‘hwa-byung’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DSM-4(『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 제4판)에 질병으로 분류된 화병은 2013년에 개정된 DSM-5에서는 삭제되었다. 한국 언론에서는 화병에 관한 보도를 할 때 DSM-4까지만 이야기하고 DSM-5는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지식의 지평』 17호에 실린 최보문 교수(가톨릭대 의과대학)의 글은 DSM-4에 화병이 실리게 된 것부터 DSM-5에서 삭제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화병의 의학적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한국에서 화병을 의학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농촌 주민을 대상으로 한 정신 질환을 조사하면서 민간에서 통용되는 화병의 개념이 학계에 소개되었고, 이와 관련된 논문이 가끔씩 정신의학 학술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민성길 교수가 화병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정신과를 찾아온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화병에 대응하는 정신과 진단명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DSM-3을 기준으로 하면 “우울 장애, 신체화 장애, 불안 장애의 복합적 진단이 가능”하다고 보고되었다. 화병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한국 정신의학계는 화병을 한국 고유의 질병으로 개념화하려고 시도했고, 문학, 심리학, 한의학 등에서도 화병을 한국 고유의 것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화병 연구에 집중하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해외의 정신 의학계에서도 문화정신의학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미국정신의학회가 DSM-4를 준비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고유 질병이나 증후군을 수집했고 이 때 한국의 화병이 DSM-4에 질병으로 수록되었다.
최보문 교수는 화병이 다른 문화 관련 증후군과 다른 경로로 질병 분류에 기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보통은, 어떤 문화권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서구 의학의 관점에서 그 질병을 문화 관련 증후군으로 규정하는데, 화병의 경우 한국에서 한국인의 관점에서 시작된 작업이 서구 의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사례들과 다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화병이 서구 의학에 편입된 뒤 이론적 해석, 양적 평가 등 여러 측면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국 학계에서 의도했던 것과 반대로, 화병의 문화적 고유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이다. 화병을 연구할수록 한국 고유의 어떤 것이 아니라 여느 문화권에서 발견될 수 있는 증상과 비슷하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여러 문화권에서 분노나 불안 같은 감정은 거의 항상 몸의 열감을 수반하는 것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인도 남부에서는 “과열된 머리, 엉뚱한 데로 향하는 몸 안의 불”, 중국과 일본에서는 “간에 쌓인 화기”, 멕시코에서는 “화기가 가득 찬 심장”으로 표현된다. 이밖에도 고통스러운 감정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몸의 증상으로 표현된다. 뉴펀들랜드에서는 어촌 여자들이 “아픈 신경(nervios)을 가졌다”고 말한다. 인도에서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성들이 가족이나 사회에서 낮은 위치로 밀려나거나 고립될 때 “정액 소실”에 대한 공포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2013년에 출간된 DSM-5은 DSM-4에 실린 문화 관련 증후군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증후군이 특정 집단이나 문화권에 일관되게 발견된다는 점, 둘째, 고통스러운 경험을 표현하는 방식이 집단적으로 공유된다는 점, 셋째,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그 원인에 관하여 그 문화권의 방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DSM-4에 문화 관련 증후군으로 수록된 스물다섯 가지 분류는 DSM-5에서는 아홉 가지로 줄어들었고 이 과정에서 화병은 삭제되었다.
내가 최보문 교수의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사례를 잘 가공하면 과학사나 과학기술학 석사 논문으로 쓸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최보문 교수의 글에 나온 내용대로 논문을 쓰면 표절이 되어 학계에 데뷔하기도 전에 불명예 퇴출되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지도교수와 연구 계획에 대해 잘 의논한 다음에 석사 논문으로 발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보문 교수의 글 후반부에는 “질병이라는 공식 명칭”이 부여되면서 나타나는 “경제성과 정치성”을 약간 언급하면서 끝나니까, 의학에서 나타나는 중심부와 주변부의 역학관계를 화병 사례를 중심으로 다룬다면, 표절을 피하면서 학위 논문을 마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보문 교수의 글을 읽고 든 또 다른 생각은, 예전에 유행하던 “한국적 사회과학” 같은 논의가 과연 얼마나 유의미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DSM-5에서 화병이 빠진 것은, 한국 고유의 질병이라고 여겼던 게 사실은 질병 자체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질병이 발생하는 맥락이 특수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질병도 이런 판인데, 한국 사회의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 한국만의 특수한 이론이나 모형이 있어야만 설명 가능한 것인가? 모형의 초기값을 조정하거나 몇 가지 변수만 추가하면 되는 것을, 마치 별도의 다른 모형이나 이론이 필요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것은 아닌가? 내가 아직 사회과학을 잘 몰라서, 한국적 사회과학을 주장한 사람 중에 그럴법한 모형을 만든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차차 알아볼 생각이다.
* 참고 문헌
최보문 (2014), 「화병」, 『지식의 지평』 17호, 57-68쪽.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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