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서 두 대상을 비교/대조하는 것은 해당 대상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설명하기 위해 두 대상에서 추출한 요소가 해당 설명에서 핵심적이거나 유관한지 여부가 글쓰기의 성패를 좌우한다.
<한겨레> 정◯◯ 기자가 쓴 “윤석열과 히틀러”라는 칼럼을 보자.(원래 제목은 “윤석열과 히틀러”였으나 이후 온라인판에서 “윤석열리스크”로 제목이 바뀌었다) 윤석열과 히틀러는 어떤 점에서 비슷한가? 정◯◯ 기자에 따르면, 윤석열은 2차 대전 독일군이 전격전을 하듯 조국・정경심 교수에 대한 수사를 전격적으로 했고, 독일 육군이 독일 공군의 지원을 받듯 언론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둘의 공통점은 이게 전부다. 검찰총장을 비판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이게 정상적인 글인가?
어떤 대상이든 무수히 많은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아무런 고려 없이 두 대상을 고르기만 해도 둘 사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공통점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두 대상의 유관하지 않은 요소만 놓고 비교/대조하기만 해도 망한 글을 기계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
“정◯◯과 이완용”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이완용이 엘리트 코스를 밟았듯이 정◯◯ 기자도 서울대 학부를 나와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정◯◯ 기자가 매국노의 행보를 걷지 않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정◯◯과 김의겸”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두 사람 다 기자이고 같은 언론사 소속이었다. 정◯◯ 기자도 소속 조직의 안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도모한 인물인지 의심할만하다.
“정◯◯과 히틀러”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히틀러가 독소전쟁에서 헛발질을 하듯 정◯◯ 기자는 지면에서 헛발질을 했다. 히틀러가 총통으로서 나치 독일의 패망을 불러왔듯 정◯◯ 기자가 편집장으로서 <한겨레>의 패망을 불러올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정◯◯과 심영”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심영이 학생과 시민을 현혹하는 것처럼 정◯◯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현혹하는 글을 쓴다. 심영이 김두한 패에게 당했던 것에서 교훈을 얻어 정◯◯ 기자도 영 좋지 않은 곳에 부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대를 착용해야 할 것이다.
“정◯◯과 김대중”이라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여기서 김대중은 대통령이 아니라 조선일보 주필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보였지만 언론인으로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못 쓴 글을 악용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수준 이하의 글을 썼지만 지지자들에게 무비판적인 옹호를 받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가만, 이건 맞는 비교/대조인 것 같다.
하여간, 나는 <한겨레>의 “윤석열과 히틀러”을 읽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경향신문>의 “한 달 동안 쳐놀고 재난학교나 만들자”는 칼럼을 읽었을 때와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재난학교 칼럼은 신문사가 칼럼진을 섭외하는 과정에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지만, “윤석열과 히틀러”는 신문사 내부에 좋은 글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람이 뭔가 큰 권한을 가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 기자가 그 동안 글쓰기 칼럼을 연재하고 글쓰기 교육 서적도 냈다는 사실이다. 한 신문사에서 글쓰기 칼럼을 맡는 사람의 글이 이 정도라는 것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문의 위기가 과연 매체 환경 변화에만 기인한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링크: [한겨레] 윤석열과 히틀러 / 정혁준
( 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942125.html )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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