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이기적 유전자』를 다룬 적이 있다. 그 회에 교수 패널로 물리학자와 진화학자가 나와서 밈(Meme)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다.
- 물리학자: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인간의 문화를 실체가 있는 실체가 있는 유전자처럼 보는 것이 불편하다. 밈은 자연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대상이다.”
- 진화학자: “우리도 동물이므로 상당 부분은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 없는 플러스알파(+α)가 있는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사회과학에 대입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문화’라는 복제자가 있지 않느냐? 복제자의 한 유형이 유전자이고 다른 유형이 밈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과학 무식자이고 해당 분야의 사정을 잘 모른다. 그럴 때는 해당 분야 전문가의 말이 다른 분야 전문가의 말보다 믿을 만하다고 베팅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여기에 한 가지 배경 지식을 고려하자면, 밈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것은 새뮤얼 아브스만이 『지식의 반감기』에서 소개한 것으로, 원래는 리처드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DNA가 복제되고 전달되는 것은 인쇄술 이전 시기의 고문헌이 필사되면서 전달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문자 네 개(A, T, G, C)를 통해 DNA의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나, 알파벳 등의 문자로 고문서의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DNA 가닥을 복제하는 작업을 담당하는 중합 효소가 저지르는 오류나 필사자들이 문헌을 필사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두 복제 메커니즘의 유사성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호메오텔레우톤’(homeoteleuton)이라고 불린 필사자의 오류가 있었다. 똑같은 문구 두 개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존재할 때 필사자가 부주의하게 중간 부분을 빼먹고 두 번째로 넘어가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the work that he had don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the work that he had done”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 “work that he had done”이 두 번 반복된다. 그러면 어떤 필경사는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the work that he had done”으로 옮겨 쓰고 그 다음 문구로 넘어간다. 이러한 오류의 유형을 가리키는 용어가 따로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오류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며, 이는 개인의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복제 메커니즘의 어떠한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전학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있는데, 이런 오류를 ‘SSM’(Slipped-strand mispairing mutation)라고 부른다. AATTCGATATACGA가 있으면 그 중 중간 부분이 탈락해서 AATTCGA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탈락되는 것과 반대로 중간에 삽입되는 현상도 있다. 이를 유전학에서는 ‘삽입’이라고 하고 고문서학에서는 ‘중복 오사’라고 한다고 한다. 중간에 순서가 뒤바뀌는 현상도 있다. 이를 유전학에서는 ‘유전자 전위’라고 하고 고문서학에서는 ‘음운 도치’라고 한다고 한다.
DNA를 복제할 때 원래 염기를 엉뚱한 염기로 대체하는 것을 ‘점변이’라고 한다고 한다. DNA에서 C와 T가 화학적으로 매우 비슷해서 자주 혼동되기 때문이다. 고문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된 문서의 필사 과정에서 람다(Λ)와 델타(Δ)가 서로 대체되었던 것은 두 글자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두 글자의 상호 유사성에 따른 확률을 바탕으로 발생한다.
이 밖에도 둘 사이에는 여러 가지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에 써먹는가.
각 오류에는 고유의 유형이 있고, 그 유형은 예측 가능한 빈도로 나타난다. 이를 이용하면 DNA 시퀀스를 판단하는 것처럼 여러 고문서의 연대나 할 수 있다. 드물게 발생하는 변이가 어떤 유전자 시퀀스상에 자주 나타난다면 그 시퀀스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드문 오류가 축적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류를 바탕으로 같은 유전자 시퀀스나 문서의 여러 가지 버전 사이의 상호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고문서의 원본을 추적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문학의 시초격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의 원본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알아내기 위해 생화학자, 정보과학자, 인문학자 등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캔터베리 이야기』 중에서도 다른 부분보다 더 널리 알려진 ‘배스 여장부의 서시’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850행 길이의 이 부분은 85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연구팀은 여러 버전에 유전자 분석 기법을 도입했고, 진화유전학 분야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원작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 원작은 어떤 내용을 추가 또는 삭제해야겠다는 뜻이 담긴 노트가 추가된 미완성작이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 정도 단편적인 사례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런 쪽을 파다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남자의 육감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물리학자보다는 진화학자의 주장에 더 무게를 실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동료 대학원생들한테 했는데, 대학원생들 중 해당 분야에 가장 밝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요, <밈>이라는 학술지가 망했어요.”, “언제 망했는데?”, “망한 지 꽤 됐어요.”, “그 분야에서 <밈>이 망했다는 것은 생물학에서 <셀>이 망한 것과 비슷한 건가?”, “대충 그렇죠.”
학술지 <밈>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곧바로 도킨스의 구상이 틀렸다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해당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일 것이다. 밈이 자연과학의 대상인지 논쟁하다가 물리학자가 이 사실을 지적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게 아부지도 없는 게 까불어!”, “우리 아부진 미국 가 있어! 곧 돌아오실 거라구!” 하는 식의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훈훈하게 논쟁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면서, 역시 고수들끼리 대련할 때는 피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 참고 문헌
새뮤얼 아브스만, 『지식의 반감기』, 이창희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4), 144-148쪽.
리처드 도킨스, 『조상 이야기: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이한음 옮김 (까치글방, 2005).
(2020.04.10.)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