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8

tvN <책 읽어드립니다>의 혁신



tvN <책 읽어드립니다>는 상당히 혁신적인 프로그램이다. 매주에 책 한 권을 소개하면서 관련 분야 전문가를 패널로 모셔놓고는 정작 강의는 해당 분야의 비-전문가인 설민석이 한다. 전문가는 한 구석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흐뭇하게 미소 지으면서 설민석의 강의를 듣는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보려면, 내가 전 지도교수님이나 현 지도교수님을 패널로 모셔놓고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강의한다고 상상해보면 된다. 『토머스 쿤의 과학철학: 쟁점과 전망』을 쓴 사람 앞에서 내가 왜 『구조』를 강의하는가? 보통은 반대다. 전문가가 강의하고 비-전문자가 듣는다. <책 읽어드립니다>의 첫 번째 혁신이 여기에 있다.

<책 읽어드립니다>의 두 번째 혁신은 패널 구성에 있다. 명문대 출신 가수, 아나운서, 배우, 소설가를 패널로 앉히고, 방송에서 안 떨고 말할 수 있는 교수 한 명을 전문가 패널 옆에 붙여둔다. 강연자인 설민석은 운만 띄우면 명문대 출신 연예인들과 소설가가 유식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고, 방송 친화적인 교수가 더 유식한 이야기를 해서 전공자가 한 마디 보탤 수 있도록 바람을 잡는다.

이 두 가지가 혁신인 이유는, 이 두 가지를 추가했기 때문에 교양과 예능의 균형을 안정적으로 산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강연 프로그램의 성패는 강연자의 역량에 좌우된다. 강연자가 아무리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너무 재미없게 말하면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 강연자가 아무리 말을 재미있게 말하더라도 내용이 망했으면 해당 프로그램은 다음 회에 사과 방송을 해야 한다.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이를 적절하게 해낼 수 있는 강연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수준과 재미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힘들다.

예전에 사교육 업자들이 강연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한 것도 전문성과 재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말을 전문적으로 잘 하는 것이지 전문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들의 강의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중학생도 아는 빤한 내용으로 안전하게 강연하려면 관객들도 중학생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tvN <어쩌다 어른> 같은 프로그램에서 관객석 맨 앞줄에 깔아놓은 연예인들이 마치 중학교도 안 다녀본 사람마냥 별 내용 없는 강의에 꼴뚜기처럼 팔짝팔짝 뛰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금만 강의 수준을 높이려면 강연자가 모르는 분야의 내용을 다루게 되고 곧 밑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해방 이후에 그린 엉뚱한 그림을 가져와서 조선시대 그림이라고 우기면서 “이것이 조선화다!!!” 하면서 온갖 호들갑을 떨면 그 다음 방송 때 사회자가 사과하게 된다. 사교육 업자를 데려오면 시청률이 높아지지만 위험성도 같이 높아지는 부작용도 생긴다.

어떻게 해야 전문성과 재미를 동시에 충족하면서 안전하게 방송할 수 있을까? 핵심은 방송에서 보여주는 전문성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데 있다. 방송국에서 전문가를 모셔오는 이유는 전문가의 전문성을 있는 대로 죄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송에서 보이면 안 되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발음, 발성, 연기력, 쇼맨십을 가진 사람이 강연하고, 전문가는 강연자가 선을 넘지 않도록 지켜보는 역할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전문가가 한 구석에서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앉아있어도 오히려 기존의 강연 프로그램보다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혁신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최초의 혁신은 아마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일지도 모른다. PD가 방송을 진행하는 MBC <PD수첩>과 달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진행자가 자기가 사건 조사라도 한 듯이 대본을 읽는다. 문성근도, 정진영도, 그리고 지금의 김상중도 대본을 읽는 것뿐이다. 취재를 어떻게 했든 간에, 방송에서는 정해진 대본만 읽는다. 그러면 대본을 잘 읽는 사람이 대본을 읽는 것이 효율적이다. 이것이 왜 강연에는 적용될 수 없겠는가?

강연만큼은 강연자가 뭔가 오리지널리티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관습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전문 분야의 최신 내용이야 연구자가 아닌 이상 알기도 힘들고 배우기도 힘들지만, 교양 서적 수준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호흡법과 발성법, 그리고 연기력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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