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1

똥글 선호자의 최면 감수성에 관한 가설

   
문학이나 예술 쪽 종사자 중 일부는 글을 쓸 때 자유연상법을 즐겨 쓴다. 자유연상법을 즐겨 쓰는 정도가 아니라 자유연상법만으로 글을 완성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영화 <혹성탈출>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보자. <혹성탈출>에는 원숭이가 나오고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건 사과고 사과는 맛있고 맛있는 건 바나나인데, 바나나하면 남근이 떠오르는데 김건모는 왜 그랬냐면서 글이 끝날지도 모른다. 아무 맥락 없이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론이 등장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전문 분야에 대해 폼 잡고 기괴한 글을 쓰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전문 용어를 도입해놓고 그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글쓴이가 어떤 의도로 그 용어를 쓰는지 설명하기 전에 다른 전문 용어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전문 용어를 계속 나열하기만 해서 글 한 편을 완성한다. 아무런 설명이나 분석 없이 어휘력을 자랑하다가 글이 끝나므로, 해당 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 없이도 글을 쓸 수 있다. 인공지능으로 그런 글을 쓴다고 해보자. 알파고 이야기하다가 강한 인공지능 이야기하다가 특이점 이야기하다가 계산주의/연결주의 이야기하다가 라이프니츠는 계산을 좋아했다고 하면 글 한 편이 뚝딱 나온다. 이거 개소리 아니냐고? 물론 개소리다. 그러든 말든 분량은 채웠으니 글 한 편이 나왔다고 우기면 된다.
  
건전한 판단을 하는 사람이 그런 글을 읽는다면 지금 무슨 똥을 본 것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감이 없는 사람은 글쓴이가 전문적인 내용을 압축해서 썼다고 생각하고, 좀 독특한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감이 없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왜 독특한 사람들은 그런 똥 같은 글을 읽으며 야릇한 흥분을 느끼는가. 학부 때 나는 그 두 부류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둘 다 머리가 나빠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바뀐 것은, 대학원에 와서 여러 과를 돌아다니면서였다. 다른 것을 할 때는 굉장한 사람인데 똥글이나 똥발표 앞에서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면서, 똥글이나 똥발표에 대한 이상 반응은 단순히 지능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지능 차이 가설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 나의 새로운 가설은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이다. 최면 감수성의 차이가 반응 차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최면 감수성이 높으면 최면에 잘 걸리고 최면 감수성이 낮으면 최면에 잘 안 걸린다고 한다. 똥글이나 똥발표에는 비-지시적 최면의 요소가 있고 그러한 요소가 최면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의 이상 증상을 유도한다는 것이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이다.
  
최면의 필수 요소로는 연상과 은유가 있다. 똥글이나 똥발표는 어떤가? 걸핏하면 무엇과 무엇이 비슷해 보인다고 한다. 아무 상관없는 것들을 늘어놓고는 그러한 것들끼리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별반 상관없는 대상들은 연상과 은유를 통해 연관을 가진다. 어떤 대상의 본질적인 속성과 거리가 먼 속성을 부각하고, 그 속성을 부차적인 속성으로 가지는 다른 대상을 연달아 나열한다. 아무 관련 없는 것들을 나열하기만 해놓은 글을 읽고도 그 글이 어떤 대상을 분석했다고 생각하거나 심오한 함축을 가진다고 생각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일반인보다 연상이나 은유를 쉽고 빈번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최면의 또 다른 필수 요소는 감각적 표현이다. 가령, 최면을 걸 때 피험자에게 “사과가 있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색상, 냄새, 감촉, 한 입 물었을 때의 아삭 하는 소리, 과즙 같은 것들을 생생하게 묘사해야 한다. 똥글은 어떤가? 감각적 표현이 불필요한 내용을 다루는 경우에도 감각적 표현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똥글에는 최면적 질문과 트랜스 유도성 탐색과 연관되는 부분도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한참 토론하다가 갑자기 “오늘은 며칠이죠?”라고 물으면 누구라도 잠시 멍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잠시 트랜스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똥글이나 똥발표에서도 비슷한 특징이 나타난다. 가뜩이나 별 내용도 없는 글인데 중간에 뜬금없는 소리가 나온다. 그런 때 최면 감수성이 낮은 사람은 ‘이거 미친 놈이네’ 하면서 글을 덮겠지만, 최면 감수성 높은 사람에게 그런 봉창 두드리는 소리는 트랜스 상태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똥글 선호자들은 글에서 뜬금없는 소리하는 부분을 높게 평가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부분을 읽을 때 짜릿해하는 등의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도 최면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비-지시적 최면에서는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경험에서 비롯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일종의 라포를 형성하다가 대화의 방향을 바꾸면서 트랜스 상태로 빠뜨리는 것이다. 똥글이나 똥발표는, 개인 경험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경험을 그렇게 우라지게 강조한다. 최면 감수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경험담을 들으면서 동의의 반응을 격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트랜스를 유도하는 데는 여러 가지 화법이 있는데, 그 중에는 혼란 기법을 사용한 최면 유도도 있다. 똥글이나 똥발표를 보면, 사실은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마치 대단히 놀라운 일인 것 마냥 나열한다. 아무리 현란한 수식어나 쇼맨십을 사용하더라도 결국 자명한 사실이라서 독자나 청자는 계속 그러한 내용에 수긍하게 된다. 일종의 예스 세트(yes set)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예스, 예스, 예스를 반복하다가 한순간 사람들을 혼란한 상황에 빠뜨린다. 사람들은 혼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심리적 저항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암시 화법에는 반어법을 사용한다든지, 함축적인 말을 쓴다든지, 어떤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한다든지, 모호한 표현을 쓴다든지, 아무 내용 없는 빈 말을 한다든지, 혼란스러운 말을 한다든지, 대조적인 단어들을 나열해서 선택이 어렵게 만든다든지 하는 등이 있다. 실제 똥글이나 똥발표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매우 빈번히 등장한다.
  
내 가설을 어떤 방식으로 검증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내 가설이 맞다면, 이는 글쓰기 교육과 관한 함축을 가질 것이다.
  
정상적인 글쓰기 교육에서 아무 이유 없이 저항하는 학생들이 간혹 있다. 그러한 학생들이 뭔가 이상한 신념을 가지고 수업에서 분탕을 치고 자꾸 소모적인 논쟁을 하려고 하거나 이상한 과제물을 제출하면 강사나 조교의 시간을 빼앗게 되고 다른 학생들의 학습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 기존의 글쓰기 수업에서는 그런 학생들에 대한 대응 매뉴얼이 마련되지 않았다.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에 기반한 대응 매뉴얼을 갖추게 된다면 글쓰기 수업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다.
  
많은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 수업 중에는, 똥글 선호자들의 이상 반응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극하는 요소들이 포함된 수업이 적지 않다. 보고서나 논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체계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자기 이야기나 쓰게 하고 무절제한 연상 능력을 보여주는 글이나 쓰게 한다. 최면 감수성 차이 가설은 현행 글쓰기 수업이 어떤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01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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