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대학원생들에게 돌을 화폐로 사용하는 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비트코인과 관련한 철학적 함축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내가 아는 한 그에 대한 유의미한 철학적 논의는 없다는 취지로 돌 화폐 섬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Money Mischief』(1992)의 1장에서 돌 화폐 섬 이야기를 소개한다. 돌 화폐 섬 이야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인류학자 윌리엄 헨리 퍼니스 3세가 1910년에 출간한 『돌화폐 섬』(The Island of Stone Money)이며 프리드먼은 이를 소개한 것이다.
마이크로네시아에 있는 캐롤라인 군도의 서쪽 끝에는 얩(Yap)이라는 섬이 있다. 이 섬에서는 금속 물질이 생산되지 않아서 돌을 돈으로 사용한다. 돌돈은 섬에서 400마일 떨어진 섬에서 나오는 석회석으로 만든다. 돌돈의 특징 중 하나는 돈의 주인이 돈에 소유주를 나타내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인정만 받으면 그 돈에 대한 소유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돌돈을 싣고 오던 배가 뒤집혀서 돈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 돌의 크기, 가치, 소유주를 인정하면 그 돈의 구매력은 유지된다. 얩 섬을 스페인에게서 사들인 독일 정부는 돌돈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도로를 보수하기도 했다. 섬 주민들이 도로 보수 명령을 듣지 않자 독일 정부는 집마다 관리를 보내서 돌돈에 정부 소유를 의미하는 검은 십자 표시를 했다. 한순간에 재산을 잃은 주민들은 섬을 관통하는 도로를 보수했고, 공사가 끝난 후 정부 관리들이 돌돈의 십자 표시를 지우자 주민들은 예전처럼 살 수 있었다.
프리드먼이 얩 섬의 이야기 다음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1930년대 미국의 이야기다. 프랑스은행은 금본위제에서 미국이 기존 가격(금 1온스당 20.67달러)을 유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맡긴 달러 자산을 대부분 금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바꾼 금을 굳이 프랑스로 가져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은행은 그 금을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보관하도록 했다. 연방준비은행 직원은 금 저장실에서 프랑스은행이 달러 자산을 팔고 받게 된 금을 별도의 서랍에 넣고 그 서랍에 프랑스 자산이라는 표시를 붙였다. 그러자, 미국의 금 보유고가 감소했다고 난리가 났고 이는 미국 금융공황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리드먼은 두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어떤 것의 외양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에 관한 사람들의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것은 금융 측면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이다. 얩 섬에서 바다 밑에 가라앉은 돌돈의 소유자들이 윤택한 생활을 하는 것이나 금본위제 하에서 금을 지하 보관실에 넣어놓고 금태환 화폐를 가지고 경제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독일 정부에서 돌돈에 검은 십자 표시를 해서 섬에 난리가 난 것이나 연방준비은행 지하실 한쪽에 있던 금이 다른 쪽으로 간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프리드먼은 책의 서문에 “화폐 현상을 다룰 때 돈의 겉모습이 얼마나 오류를 유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얩 섬의 이야기를 소개한다고 썼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에는 기존의 경제 현상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요소가 있는가? 암반을 뚫고 금속을 채굴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채굴한다는 것 빼고, 새로운 이론이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 어떤 새로운 점이 비트코인과 관련하여 있는가? 그런 점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할 텐데, 애초부터 그런 것이 없으니 개소리꾼들이 비트코인이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은행과 화폐 시스템에 대한 기술적 테러라는 둥, 공허한 수식어나 덧붙인 것은 아닌지.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동료 대학원생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 신기하다! 그거 어떤 철학자의 논문에 나와요? 누구의 사고 실험이에요?” 나는 분명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태평양에 있는 섬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모두 사고 실험인 줄 알았던 것이다. 문학 애호가들은 조금만 그럴듯하면 지어낸 이야기도 마치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인 것처럼 여기는데, 철학 전공자들은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어도 신기한 구석이 있으면 누구의 사고 실험이냐고 묻는다. 전 지도교수님의 말씀처럼, 철학 하는 사람들한테는 약간씩 독특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201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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