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3

글쓰기 지도에서 기획서 검토의 이점

   
학부 글쓰기 수업 조교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어떤 글의 기획서를 검토하는 일은 그 글의 초고나 완성본을 첨삭하는 일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글쓰기 지도 방식이라는 점이다. 기획서 검토에는 초고나 완성본 첨삭에는 없는 몇 가지 이점이 있다. 학생들이 글의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기 좋다. 글 쓰는 실력이 는다는 것은 글의 구조를 뜯어고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기획서 단계에서 글을 검토하면, 학생은 글의 구조에 대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그 결과물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글의 뼈대만 있는 상태이므로 부분적으로 고치기도 쉽고 글의 배열을 바꾸기도 쉽고 전면적으로 개편하기도 쉽고 아예 새로 시작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조교도 일하기 좋아서 첨삭할 때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잡아줄 수 있다.
  
거의 다 써놓은 글을 첨삭하면 이러한 이점이 다 사라진다. 조교는 조교대로 힘만 들고 학생은 학생대로 배울 것이 별로 없다. 이미 다 써놓은 글을 고쳐서 좋은 글이 되려면 이미 초고 상태가 웬만큼 좋아야 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만 글이 늘고 일정 수준 미만의 학생은 글이 전혀 안 느는, 일종의 부익부 빈익빈이 글쓰기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초고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서 좋은 글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초고나 완성본을 뜯어고치다 사실상 글을 새로 써주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학생은 글쓰기를 배우기 어렵다. 학생은 자기 글이 철저하게 망했다는 것과 그 폐허 속에서 처음 보는 글이 생겨났다는 신기한 경험을 할 뿐이다. 이렇게 할 거면 학생이 쓴 글을 첨삭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남이 잘 써놓은 글을 읽고 뜯어본 다음 글의 구조를 공부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조교가 학생의 글을 그렇게 다 뜯어고치는 경우도 드물다. 할 일은 많고 받는 돈은 적고 효과도 없는 일을 쓸데없이 열심히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글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쳐야 하거나 새로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조교는 학생의 글을 힘들여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 낮은 점수를 준다.
  
글을 못 쓰고 있는 학생에게 “일단 뭐라고 써가지고 오라”는 말을 한다면 “초고 분량의 글을 써오라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무언가를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한 다음 계획서로 간추려서 오라”는 말을 꼭 덧붙여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학생이 오해해서 초고 분량으로 무언가를 잔뜩 써가지고 오면 학생은 배운 것 없이 힘들고 조교는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해서 괴롭기만 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2019.12.03.)
    

댓글 없음:

댓글 쓰기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