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3

양복



태어나서 처음 양복을 샀다. 이종사촌 동생이 결혼하는 바람에 내가 양복을 샀다. 결혼식을 앞두고 이모들이 어머니께 연달아 전화했다고 한다. 옷을 잘 입어야 한다, 이상하게 입고 오면 안 된다, 양복 입고 오라고 해라, 자기 손으로 머리 깎지 말고 미용실 가라고 해라, 미용실 가는 김에 염색도 해라, 머리가 너무 하얗다 등등. 그렇게 양복도 사고 머리도 미용실에서 하고 염색도 했다.

원래는 학부 졸업할 때 이모들이 양복을 사준다고 했는데 학부 졸업하자마자 입대했기 때문에 나중에 사달라고 했고, 제대 후 1-2년 정도 백수 상태로 있다가 대학원에 들어가서 양복 사주는 것은 없던 일이 되었다. 대학원 입학 이후에도 딱히 양복 입을 일이 없어서 행사 때 입을 정장 윗옷 정도나 샀다. 가령, 결혼식 가면 바지는 청바지 입고 윗옷이나 정장 윗옷을 입고 가는 식이다. 어차피 내 결혼식도 아닌 데다 누가 나를 신경 쓰겠는가? 취업하려면 아직도 몇 년은 남았고, 학부 강의를 해본 적은 없지만 한다고 해도 교수도 아니니 굳이 양복을 입고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고등학교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도 반바지만 안 입지 편하게 입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시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안 부를 건데 더 부르는 것도 아니라서 적당히 대충 입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모들이 어머니께 계속 전화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나는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됐다고 하고는 옷장에서 정장 윗옷을 꺼내 입으려는데, 옷에 팔이 들어가지 않았다. 입었는데 불편하다거나 단추가 안 잠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팔이 안 들어갔다. 내가 벌크업을 한 것도 아니고 밤에 맥주나 벌컥벌컥 마신 것밖에 없는데 몸이 불어서 그렇게 되었다. 주말에 양복 상・하의와 구두를 샀다. 원래는 훨씬 저렴한 곳에서 구입하려고 했는데 거기에는 내 몸에 맞는 크기의 옷이 없었고, 그 옆집에 갔더니 가게 주인이 맞지도 않는 옷을 입혀놓고는 억제로 팔려고 해서 가게를 나왔고, 다시 그 옆집에 가서야 양복과 구두를 구입할 수 있었다.

주말에 양복을 구입하고 며칠 후 미용실에 가서 커트와 염색을 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미용실에 갔지만, 중・고등학교 때와 학부 때는 이발소에 갔고, 군대 다닐 때부터 혼자 머리를 깎았다. 당시 나는 현역 병사이기는 했는데 상근예비역이라서 이발병이 부대에 있는 병사부터 다 깎은 다음 출・퇴근하는 상근예비역의 머리를 깎아주었는데, 가만 보니까 혼자 깎아도 이발병이 하는 것과 비슷하게 깎을 것 같아서 집에서 혼자 이발기로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처음에 작전과장이 내 머리를 보고 “누구야? 누가 머리를 이렇게 깎았어? 당장 그 놈 잡아서 영장 보내!”라고 해서 내가 영창을 갈 뻔 했다. 하여간 나의 이발 기술이 이후에 미세하게 늘기는 늘었다. 거의 30년 만에 미용실에 가서 커트와 염색을 하고 5만 원을 냈다.

결혼식장에 적합한 머리 모양과 복장을 하고 가니 사람들이 좋아했다. 몇몇 사람은 나를 못 알아보기도 했다. 셋째 이모부한테 인사를 하니 이모부가 나를 스윽 보기만 하고 인사도 안 하고 다른 곳으로 가길래 “저 ◯◯이에요”라고 말하니까 이모부는 그제서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 ◯◯이냐?”하고 인사하셨다. 어머니께 들으니 결혼식 끝나고 며칠 뒤에도 이모들에게서 전화가 계속 왔다고 한다. 결혼식장에서 보니까 새신랑 같더라, 앞으로도 옷을 그렇게 입으라고 해라, 얼굴이 밝더라, 머리도 미용실에서 깎으라고 해라, 머리가 검으니까 젊어 보인다 등등. 그런데 얼굴은 원래도 밝았다.

양복을 입고 나서 알게 된 게 있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초기에 왜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왜 그렇게 다리를 쫙 벌리고 고개를 1초에 두 번씩 돌렸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체질과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몸에 살이 찌고 열이 많은 사람이 갑갑한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일 경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1초에 두 번씩 돌리는 것은 경추의 문제가 아니라 덥고 답답해서 몸부림치는 것이고 다리를 쫙 벌리는 것도 땀이 차서 그러는 것이다. 사촌동생의 결혼만 아니었어도 내가 그럴 뻔했다.

하여간, (비교적 자주 보는) 친척들이 결혼식장에서 나를 그렇게 반가워하는 보고, 아르바이트 시급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양복을 입고 가고 그 수준 미만이면 평소대로 입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02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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