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에 흥미를 가진 분석철학 대학원생이 철학과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읽기 모임을 한다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이었다.(원서는 총 일곱 권이고 한국어 번역서로는 열세 권이라고 한다.) 책 읽기 모임은 분석철학 대학원생 두 명, 대륙철학 대학원생 두 명,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되며, 책을 읽어가면 대륙철학 대학원생들이 책의 내용을 설명해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책읽기 모임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화합의 장이군요!”라고 답했다.
나도 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다닐 때 프랑스 철학 대학원생들과 김기덕의 <뫼비우스>라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정말 끔찍한 영화였다. 남편이 바람 피워서 거세하고 거세해서 답이 안 나오니까 손등에 화상을 입히려고 돌로 손등을 문지르고, 아들도 거세하고 또 똑같이 돌로 손등을 문지르고, 하여간 영화 내내 미친 사람들의 미친 짓으로 일관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 같이 맥주를 마시며 그 미친 영화에 대해 대화했는데, 프랑스 철학 전공 대학원생들이 하는 말을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상당히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맥주를 많이 마셔서 그랬던 건 아니고, 끔찍한 영화에 대해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하는데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고상해 보이는, 그런 신기한 경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나 분석철학 대학원생이나 대륙철학에 대해 동의하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륙철학 전공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철학은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이다. 저게 뭔지 그렇게 잘 알고 싶지도 않고, 어쩌다가 저게 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가도 한두 마디 듣고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만, 그런데도 이상해 보인다든지 꼴보기 싫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좋아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뭔가 뭔지 모르는데도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륙철학 쪽 책이나 논문을 읽을 때 그러는 게 아니라 전공자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대륙철학 애호가들의 대화에서는 전공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대륙철학 애호가들이 어떤 요소 때문에 대륙철학을 애호하게 되었는지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애호가들은 유의미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애호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륙철학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저런 건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저런 추한 소리를 한 마디 해서 무력화시켜야 하나, 두세 토막 내서 무력화시켜야 하나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아마도 그들의 이야기가 일종의 언캐니 벨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대륙철학 애호가들의 언캐니 벨리가 대륙철학의 문제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임재범 노래를 떠올려보자. 대한민국의 수많은 남자들이 노래에 전혀 소질도 없는 주제에 임재범 노래를 불러서 노래방에 같이 간 일행들에게 일종의 언케니 벨리를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그게 임재범의 잘못인가? 아니다. 작사가와 작곡가의 잘못인가? 아니다. 작사가와 작곡가는 노래를 잘 만들었고 임재범은 노래를 잘 불렀다. 그저 사람들이 자기가 부를 수 없는 노래를 굳이 부르고 기어코 못 부른 것뿐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분석철학 애호가들에게도 언케니 벨리가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분석철학 애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심지어, 분석철학 전공으로 대학원을 다니다 그만 둔 사람도 여간해서는 분석철학 애호가가 되지 않는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분석철학 전공으로 대학원을 다니던 사람은 분석철학 연구자가 되거나 애호가도 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이 또한 참 신기한 일이다.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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