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6

대학에 왜 철학과가 있어야 하는가?



대학에 왜 철학과가 있어야 하는가? 국가, 대학, 개인, 이렇게 세 가지 차원에서 그 필요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철학과가 있는 것이 좋다. 모든 대학에 철학과가 있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럴법한 대학에는 철학과가 있어야 한다. 산업이든 학문이든 유기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고도화되려면 그 분야의 모든 하위분과가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가령, 물리학에서 발생한 철학적 쟁점에 대해 물리학자들이 논의한다고 해보자. 물리학자들끼리 철학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물리학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과 협업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다들 천재라서 철학책을 읽고 척척 다 이해하더라도 물리철학 전공자가 따로 있는 편이 낫다. 분업의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리철학 연구자는 어디에서 나오나? 제일 간단한 방법은 물리학과 학부생을 꼬셔서 유학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그 학부생이 외국에서 훌륭한 학자가 된다고 한들 한국에 안 돌아온다. 한국에 돌아와서 혼자 뭘 할 것인가? 같이 연구할 동료가 있어야 하고, 수업을 개설할 학과가 있어야 한다. 물리철학을 하다 보면 과학철학의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고, 형이상학도 관련되니까 형이상학 연구자도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고대철학부터 근세철학까지 다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는 철학과 풀 세트가 있어야 한다. 철학과가 없어진다고 해서 당장 아쉬울 일은 없겠지만, 철학과를 다 없애고 나서 아쉬울 때 다시 만들려고 하면 몇 십 년은 걸릴 것이다. 철학이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쓰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철학이 학문의 근본까지는 아니어도 반도체 산업의 불화수소나 자동차 산업의 볼 베어링 정도는 될 것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은 일종의 사치품 같은 것이어서 형편이 어려워지면 처분해야 한다.(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 14장에서 대학의 과시적 소비를 다루는데 그 사례로 연고전 같은 사립대학들의 운동경기와 인문학 등을 제시한다.) 사실, 사치품보다도 못한 것이, 사치품은 비싼 값에 팔 수라도 있지, 인문대학은 팔 수도 없다. IMF 구제금융 받을 때 재벌들이 빅딜했던 것처럼 대학들끼리 빅딜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냥 없애는 것이다.

솔직히 개인에게 철학과를 다니는 것이 무슨 효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철학 교수가 된 사람들 말고, 그냥저냥 철학과를 다니는 학부생들에게 도대체 철학과를 다니는 것이 무슨 효용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는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원래부터 똑똑하게 태어나서 큰 어려움 없이 변호사가 될 학생에게는 학부 때 철학과를 다니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 법률을 40년 들여다보나 44년 들여다보나 그게 그것이니 학부 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도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철학과를 다닌다고 해서 철학적 능력이 유의미하게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웬만한 철학과의 학부생이 철학 교수가 될 확률보다 서울대 물리학과 학부생이 철학 교수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렇다고 철학과를 다닌다고 해서 개인의 덕성이 함양되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 비판의식을 갖춘 성숙한 지성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전해 듣기로, 내가 다니던 학교 앞에 있던 <지오>라는 술집은 철학과 학생들의 외상값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물론, 철학이나 철학과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나 근거 없는 호감 같은 것이 철학과의 존속 이유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철학과가 있다는 것은 전공 수업이 개설된다는 것이고 졸업생이 일정 수준 이상의 학문적 역량을 갖추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얄팍한 낭만 따위는 부실한 교양수업만으로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 직장인들끼리 아무 책이나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책 읽기 모임 같은 것은 천지사방에 널려있다. 그러니 철학과 폐과에 대한 심리적 공허감 같은 것은 철학과 존속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철학과 졸업생들의 얄팍한 감상은 학과 구조조정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어느 학교에서 경제학과가 없어져서 계량경제학 수업이 없어질 판인데, 학부 때 경제학과 다녔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넣고 있는 펀드 이야기나 한다든지, 비트코인 이야기나 한다든지, 청약통장 이야기나 하면서 경제학의 가치 같은 소리를 떠들고 다닌다고 해보자. 이는 해당 경제학과가 이미 옛날에 망했거나 애초부터 학과로서 기능한 적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용될 것이다. 있으나 마나 한 학과를 없앤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경제학과를 없애고 <생활 속의 경제 이야기> 같은 식의 교양수업만 남겨도 아무도 문제 삼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과를 비롯한 인문대학 학과들의 존속을 주장할 때 제일 먼저 내세워야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필요성이고, 그 다음이 대학 차원의 필요성이고,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개인 차원의 얄팍한 감상인데, 오히려 노출되는 빈도로 보면 정반대인 것 같다. 철학과 졸업생들이 얄팍하게 낭만을 떨수록 학부 전공으로서의 철학이 별 의미 없다는 것만 보여주는데, 그런 마당에 인문학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202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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