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2

수로에서 억새를 태우다가



수로 근처에 있는 억새에 불을 놓다가 밭둑에 있는 밤나무를 태워먹을 뻔 했다. 나는 억새가 그렇게 화력이 센지 몰랐다.

억새에 불을 놓은 것은 토지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표시해놓기 위해서였다. 여름에 토지 경계를 측량하고 나서 밭 경계에는 말뚝을 박고 나무를 심었으나, 수로 근처 경계는 억새가 너무 우거져서 손을 대지 못하고 빨간 말뚝만 박아놓았다. 이제 겨울도 되었고 풀도 다 말라죽어서 억새를 정리한 것이다.

억새를 베어놓고 나니 처리하는 것이 문제였다. 몇 년 전에 동네 아저씨가 수로 근처에 있는 억새에 불을 놓았다가 불이 번져서 밭둑에 있는 나무들까지 홀랑 다 태워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그 쪽 억새에는 아무도 불을 놓지 않아서 죽은 억새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내가 벤 억새가 그대로 썩어 없어지면 다행인데 혹시라도 어떤 놈이 불을 놓아서 타기라도 하면 문제가 생길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미리 문제가 될 만한 소지를 없애기로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불이 옮겨 붙을 만한 곳에 있는 억새나 마른 풀을 낫으로 베어서 정리했다. 태울 억새도 모두 수로에 고인 물에 띄웠다. 적당히 타다가 가라앉게 할 생각이었다. 설사 불이 뜻하지 않게 옮겨 붙는다고 해도 근처에는 산도 없고 집도 없고 논은 추수가 끝나서 비어있고 밭도 비어있었다.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밭둑에 있는 밤나무다. 몇 년 전에 타죽은 줄 알았던 밤나무에 움이 터서 자란 것인데, 이것만 타지 않게 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억새에 불을 붙였다. 마른 풀에 불을 붙일 때보다 훨씬 빨리 불이 붙었다. 느낌이 안 좋았다. 그래도 조치를 다 취했으니까 별 일 없겠거니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불길이 너무 강했다. 볏단이나 마른 풀이나 고추대나 깨 떨고 남은 대 같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억새에 소나무처럼 인화물질이 들어있는 것도 아닐 테니 마른 풀 정도로 잘 탈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잘 탔다. 불길이 너무 세서 내가 예상한 곳을 벗어난 곳에 불이 붙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얼마 안 되는 억새에 그렇게 큰 불이 붙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밤나무 쪽으로 불이 옮겨 붙고 있었다. 저거 태워먹으면 어머니한테 미친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불길이 너무 세서 불이 안 번지게 하러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 한 쪽 팔로는 얼굴을 감싸고 한 손으로 삽으로 잡고 밤나무 근처로 불이 번질 때마다 삽으로 땅을 내리쳐서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대충 정리가 된 다음에 맨 먼저 한 일은 눈썹이 타지 않았는지 손으로 얼굴을 만져서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눈썹은 타지 않았다.

내가 이번 일을 겪고 생각하게 된 것은, 왜 사극이나 소설 같은 데서 화공 쓰는 장면에 억새나 갈대를 쓰지 않느냐는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같은 드라마에서는 일본 배에 화공을 쓸 때 조선 병사들이 볏단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볏짚을 태워보면 잘 타기는 하는데 그렇게 화력이 강하지는 않다. 볏짚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설정을 해도 당시에 휘발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물성 기름이 그렇게 잘 타는 것도 아니다. <삼국지연의> 같은 데서는 유황과 염초(질산칼륨)로 배에 불을 붙인다고 나오는데 당시에 비료공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질산칼륨을 그렇게 대량으로 구할 곳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화약무기가 발달한 남송시대의 영향이 소설에 투영된 것일 것이다.

화공에서 억새나 갈대를 썼다고 하면 훨씬 개연성이 있게 된다. 억새는 마른 풀보다 불이 잘 붙고 화력도 더 강하며, 줄기가 곧고 단단하기 때문에 여러 개를 모아서 끈으로 묶으면 병사들이 운반하거나 휴대하거나 목표지점에 던지기 쉬울 것이다. 풀은 말을 먹여야 하지만 마른 억새나 갈대는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지도 않으니 다 베어내서 태워 없애도 부담이 없다. 강이나 하구에 갈대가 널려 있으니 노동력만 투입하면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마른 풀은 물에 가라앉지만 갈대는 물에 떠서도 불에 잘 붙는다. 고대 전쟁에서 실제로 화공을 어떻게 했는지는 학자들이 할 일이라서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소설 같은 데서는 이러한 요소를 첨가하면 더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밀 수 있을 것 같다.

(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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