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대학원이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학과>로 바뀐다. 이름만 바뀐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정확히 뭐가 바뀌는지는 모르겠다. 협동과정에서 정식 학과로 바뀌면 몇 가지 좋은 점이 생긴다고 들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선생님들이 알아서 잘 하셨을 것이다.
협동과정의 이름에 있던 ‘과학철학’이 빠지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는다. 교수 임용할 때 실적으로 뽑지 소속 이름으로 뽑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교수들이 다 제정신인 것은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래도 학과 이름에 철학이 안 들어간다고 임용에 문제가 생기겠는가.
협동과정을 학과로 바꾸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번번이 실패하다가 이번에 성공한 것인데, 과학정책 전공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과학정책 전공이 다른 전공보다 정부 지원을 많이 받기도 하고, 업무 처리 면에서도 다른 전공보다 능숙했을 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으로 시작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은, 이후에 과학기술학 전공이 추가되었고, 얼마 전에는 과학정책 전공이 추가로 개설되었다. 과학정책 전공이 개설되기 몇 년 전에 협동과정의 정체성에 관하여 생각해보자는 행사도 있었다. 정체성 뭐시기 행사라고 해서 나는 ‘사춘기도 아니고 무슨 놈의 정체성이야? 자기 연구나 잘 하면 됐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행사 때 나는 뒷자리 구석에서 딴 짓이나 하다가 저녁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기억하지도 못한다.
물론, 굳이 따저본다면, 정체성 뭐시기 행사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같은 소속 대학원생 중에는 과학기술학 전공 석사과정으로 입학하여 석사학위 취득 후 과학정책 박사과정으로 입학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곳에 가서 “40년 전통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기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원에서 과학정책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다”고 자기자신을 소개하면, 정상적인 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마치,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100년 전통의 <공화춘>에 함흥냉면 먹으러 갔다가 재료가 떨어져서 꼬마돈가스 먹고 나왔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협동과정이 과학학과로 바뀌어서 확실하게 좋아지는 점은 서류 작성할 때 편해진다는 것이다. 서류 작성할 때마다 소속란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라고 써야 하기 때문에 항상 칸이 넘치게 되고, 그래서 글자 크기를 줄이거나 칸 밖에 글자를 써야 했다. 이제는 소속명이 짧게 바뀌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밖의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협동과정이 과학학과로 바뀌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동안 내가 추적하던 <◯◯◯ 코드>의 비밀을 더 이상 알아내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협동과정 졸업생 중에는 자기가 쓴 책 등에 자신이 “과학사 협동과정”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쓰는 사람이 있다. 오타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번하게 나타나서 어떠한 비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일종의 코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책이나 논문의 앞부분에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하다가 중간이나 끝에서는 “과학사 협동과정”이라고 하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설마 과학철학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소속명을 그렇게 쓰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유치하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는가?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나는 <다빈치 코드>에서 착안하여 해당 졸업생의 이름을 따서 그 코드의 이름을 <◯◯◯ 코드>라고 명명했다. 협동과정에 템플 기사단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 졸업생이 일루미나티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어쨌든 어떤 메시지가 있으니 저작마다 반복하여 그런 코드를 넣지 않겠는가 추측할 뿐이다. 내가 그동안 제안한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 코드>도 정식 학술 용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코드>의 비밀을 밝히려면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한데, 협동과정이 과학학과로 바뀌면서 이제 더 이상 <◯◯◯ 코드>는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 코드>의 비밀도 미궁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과학학과”를 “과학과”나 “과과”라고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 뱀발: 내가 협동과정이 학과로 바뀌면서 <◯◯◯ 코드>의 비밀을 알아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자 동료 대학원생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 ‘과학학과’를 ‘과학사학과’로 쓸 걸요? 열두 글자에서 네 글자 빼는 것보다는 네 글자에서 한 글자 더 하는 게 더 쉽고 티도 덜 나잖아요.” 내가 이 생각을 왜 못 했을까. <◯◯◯ 코드>의 새로운 변형이 나오는지 지켜보아야겠다.
(202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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