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2

일부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의 함축



자의반 타의반으로 의심스러운 논문이나 발표문을 읽을 때가 있다. 항상 그러한 글의 저자들은 분석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분석했다고 하고, 설명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무언가를 설명했다고 하고, 쥐뿔도 함축하는 게 없는데 무언가를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분석’, ‘설명’, ‘함축’은 내가 아는 개념과 다른 것 같아서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의심하다보면 결국 이런 의문이 든다. 저것은 왜 연구라고 불리며, 연구가 아니라고 하면 왜 안 되는가?

문학 논문으로 예를 들어보자. 내가 문학 무식자이기는 하지만, 내 눈에도 정민 교수의 「16・7세기 조선 문인지식인층의 강남열과 서호도」 같은 논문은 분명히 뭔가를 분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호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 호수인데, 16-17세기 조선에서는 서호를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 왜 그랬는가? 당시 조선의 문인들은 중국과 직접적으로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있어봤자 명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사신으로 명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명에 간다고 해도 북경까지나 가는 것이지 강남에는 못 갔는데 왜 조선 문인들 사이에 ‘강남열’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유행했는가? 중국 강남에 땅을 사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민 교수는 조선의 강남열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첫째는 임포의 고사를 비롯하여 서호에는 유토피아적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었다는 것, 둘째는 고려 때는 강서시풍의 영향을 받았으나 조선은 학당풍의 영향을 받았으며 거기에는 작품 배경으로 서호가 자주 등장했다는 것, 셋째는 『전등신화』 등 중국 전기소설의 영향인데 그러한 소설에는 서호가 낭만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덧붙이자면,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명군의 상당수가 절강성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면서 절강성 출신 장수들이 조선 문인들과 교류했는데 이 때 서호 일대를 동경하는 시가 이전보다 더 활발히 창작되었다고 한다. 정민 교수의 논문에서는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현상을 제시하고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들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분석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 논문의 함축은 무엇인가? 정민 교수는 작은 사건에 관찰에 불과한 것에서도 문학사나 예술사의 동태적 흐름을 포착할 수 있으며, 서호도의 유행이라는 표피적 현상을 통해서 조선 문인들의 내면 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정리한다. 정민 교수의 분석이 맞다면 논문은 정말로 그러한 함축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정민 교수의 사례와 정반대되는 사례를 생각해보자. 분석도 아니고, 설명도 아니고, 쥐뿔도 함축하는 것이 없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선, 설명될 필요가 없는 현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피-설명 현상의 발생 원인과 무관한 요소들을 나열한 뒤, 해당 논문의 내용이 함축하지 않는 것을 함축한다고 우기면 된다. 쉽게 들 수 있는 예로는 ‘포스트휴머니즘’을 앞세운 일부 논문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포스트휴머니즘 연구는 훌륭한 연구이겠지만, 일부 포스트휴머니즘 논문은 연구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아무런 유의미한 분석이 없다.

포스트휴머니즘에서는 기존의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비-인간 주체들의 뭐시기 뭐시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포스트휴머니즘 논문에서는 어떤 문학 작품에 인간이 아닌 존재가 그 작품을 이끌어가는 행위자로 등장하기만 하면 그것이 대단한 분석 대상인양 취급한다. 물론, 어떤 문학작품에서 어떤 동물이 어떤 식으로 그려지는지 분석한다면 나름대로 가치 있는 연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일부 포스트휴머니즘 논문에서는 다른 어떠한 유의미한 분석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동물이 주인공으로 나왔다는 것만 가지고 마치 그 자체로 마치 어떠한 대단한 함축이 있는 것처럼 다룬다.

동물들이 실제로 말하면 신기한 일이겠지만, 문학 작품 속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 전래동화 같은 데서 호랑이가 담배 피우고 토끼가 사기 치는데,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이솝이 지어낸 우화에서는 동물들끼리 말을 한다. 이건 아직 고대 유럽인들이 데카르트 식 이분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가? 단군신화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겠다며 환웅을 찾아온다. 이는 인간 주체에 견주어 비-인간 주체들이 열등한 특질을 지녔다는 인간중심주의의 맹아가 이미 고대 한반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하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같은 데를 보면 거미도 사람한테 말을 거니까 이것도 포스트휴머니즘의 틀로 분석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글이 몇 년 전에 정식 논문으로 나왔다.

허구적인 문제 설정을 한 다음에는, 알아먹을 수 없거나 알아먹어보았자 이게 왜 분석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많이 하면 된다. 어차피 안목 없는 사람들은 이상한 데에 꽂혀서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며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어떤 작가가 박근혜 정부를 꾸짖는 우화를 지었고, 그 우화는 낙타가 박근혜의 어리석음과 꾸짖는 내용이라고 해보자. 23세기쯤에 어떤 연구자가 포스트휴머니즘에 입각해서 그 작품을 분석하는 논문을 쓴다면, 도대체 어떤 요절복통 대환장 파티가 벌어질 것인가?

우선, 23세기의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자는 낙타가 한국인들의 관념에 낙타가 어떤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지 역사적 연원을 찾을 것이다. 『고려사』에는 고려 태조 때 거란에서 낙타를 보냈는데 발해를 멸망시킨 놈들이 보낸 것이라고 해서 다리에 묶어두고 굶겨 죽였다는 내용이 있다. 연구자는 그 부분을 인용하여 고려인들은 동물에 민족 감정을 투영했고 동물을 형별을 받는 주체로서 사고했다는 식의 주장을 할 것이다. 또, 해당 연구자는 한반도에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성서에 언급된 낙타의 이미지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파되고 기독교의 교세가 커지면서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잔뜩 써놓을 것이다. 그러면서 박근혜의 별명은 닭이었고 낙타는 닭보다 지능이 높기 때문에, 아무래도 당시 작가는 동물 지능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 같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유사-분석은 죄다 개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2015년 당시에는 메르스가 퍼지는 와중에 정부에서는 낙타 젖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국민들 사이에서는 낙타 젖을 먹지 말라는 황당한 지침이 정부의 무능을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낙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대통령과 정부를 꾸짖는 우화를 썼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낙타를 화자로 하여 우화를 쓴 것이고 단지 그 뿐일 것이다. 낙타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대단한 분석 대상이 되려면 동시대의 다른 우화에 등장하는 동물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이고, 해당 연구자는 이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23세기의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자는 낙타에 투영된 관념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똥 싸는 소리나 늘어놓으면서 자신이 작품을 분석했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한 일부 포스트휴머니즘 연구들은 어떤 함축을 가지는가? 놀랍게도 인류세의 인간 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주체와 비-인간 주체가 종의 차이를 넘어 공존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수로? 문학작품에서 동물이 말을 하고 인간을 꾸짖는다고 호들갑 떠는 글에 그런 함축이 있다고? 백 번 양보해서, 그런 식으로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찾았다고 치자.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면 대기 중의 탄소 농도가 줄어드나, 미세 플라스틱 문제가 해결되나?

나는 쓸데없는 일을 덜 하는 것이 그나마 지구를 덜 파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거 하는 데에 연구비를 주지 말고 탄소 저감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회식비를 제공하는 것이 비-인간 주체들을 위하는 길일 것이다.

(202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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