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과학학과 대학원 과학철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고자 하는 사람과 상담했다. 원래 그 사람은 지도교수님께 상담 요청을 했는데, 지도교수님은 그 사람에게 답변한 뒤 다른 대학원생의 의견도 들어보라면서 동료 대학원생에게 추가 답변을 요청했고, 그 대학원생은 적절한 답변을 하기 어렵다면서 나에게 대신 답변해달라고 부탁했다. 왜 나에게까지 상담 요청이 건너왔을까? 동료 대학원생은 이메일로 문서 파일을 하나 전달해주었다. 그 사람이 쓴 것이었다. 에세이 제목만 보고도 상담을 요청한 사람이 과학철학에 대해 단단히 잘못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대신 답변하기로 했다.
내가 받은 것은 자기소개서(4매), 연구계획서(5매), 논증 에세이(26매)였다. 다 읽어보았다. 단단히 잘못 알면서도 열의가 대단해 보였다. 동료 대학원생으로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답변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매 학기 한 명 이상에게서 입학 관련 문의를 받았고 대면이든 서면이든 모두 상담했다. 그렇게 상담한 사람 중 실제로 대학원에 온 사람이 아직 단 한 명도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예의 바르게 사실대로 말하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내가 맡았다.
일단 질문에 답변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 다음날 상담 요청자에게 이메일이 다시 왔다. 나는 또 답변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 상담 요청자에게서 “명쾌한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주제를 어떻게 잡을지 실마리를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답장이 왔다. 너무 순순히 받아들여서 약간 의외였다.
내가 두 차례에 걸쳐서 보낸 글은 A4용지 세 쪽도 안 되는 양이다. 이상한 애들은 아무리 멀쩡한 이야기를 들어도 미친 소리를 하기 마련인데, A4용지 세 쪽도 안 되는 글을 받고 나서 상담 요청자가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상해서 이상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뒷받침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변에서 적절하게 몇 마디 해줄 사람만 있었더라도 해당 학생은 불필요하게 힘을 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 사람은 철학과 학생이다. 내가 알기로 그 학교는 좋은 학교이고 훌륭한 선생님도 몇 분 계신 것으로 안다. 교수든 강사든 선배든 지나가는 행인이든 그 학생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딱히 없었던 모양이다.
이는 단순히 그 학생의 인간관계의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학생이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고 하더라도, 수업을 듣고 과제를 내고 시험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과정 중 어느 한 군데에서도 적절한 지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수나 강사가 적절하게 지적했다면 그 말을 진작에 들었겠지, 뒤늦게 고작 대학원생 나부랭이에 불과한 내 말을 들었겠는가?
꽤 좋은 학교의 학부 과정도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인문학 대중화 같은 소리가 씨알이나 먹히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물론, 훌륭한 선생님들이 수준 높은 대중 강연을 하고 교양 서적을 내는 것은 좋은 일이고 장려되어야 하는 일이며, 필요하다면 정부가 지원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대학 안팎에서 똥 싸는 소리나 일삼아하는 사람들이 그걸 인문학 대중화라고 우기고 앉았는 게 정상이냐는 것이다. 학부생도 못 챙기면서 무슨 놈의 인문학 대중화인가? 학부 4년 동안 자기가 뭘 배웠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널렸는데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인문학이 왜 중요한지 아느냐고 하면 그건 약장수가 약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 사람들이 책 안 읽는다고 하는 소리는 허구헌날 언론에 나온다. 그게 믿을 만한 통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인문대 졸업자들은 학부 졸업하고 인문학 책을 얼마나 읽는가? 일기장 대충 뜯어서 묶어낸 것 같은 에세이집 같은 거 말고 그럴 법한 책은 몇 권이나 읽는가?
아무리 책을 읽으려는 의지가 강하더라도 그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책은 읽을 수 없다. 4년 동안 인문대를 다닌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읽는 책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 내가 알기로, 철학과를 졸업하고도 무엇이 철학이고 무엇이 철학이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중앙일간지에서조차 아들러 심리학 관련 서적을 일본의 철학 책이라고 우기며 한국 철학계를 걱정하는 기사가 나온다.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하룻밤에 읽는 뭐시기 시리즈 같은 책이나 읽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상 죽을 때까지 그 정도 수준의 책이나 읽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도 자기와 관련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그 정도일 수밖에 없다. 인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상품을 소비할 고객을 늘리고 시장을 넓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인문대 학부생을 잘 가르치는 것뿐이다. 그런데 대충 둘러 봐도 그럴 가망은 없어 보인다. 어쩌다 인문대 출신 회사원들을 만나도 그들 중 상당수는 어김없이 낭만이니 실천이니 하는 소리나 늘어놓을 뿐이다. 학부 4년을 다녀놓고도 자기 전공을 전문 분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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