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7

트럼프가 세계를 구하는 영화에 대한 구상



내가 지난 달 쯤에 사람들하고 밥 먹으면서 실없는 소리를 했다. 당시에도 트럼프는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쨌든 임기 끝나고 할 일 없으면 영화나 찍으면 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영화 중 미국 대통령을 다룬 영화는 많고, 영화 배우였던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된 경우도 있지만, 전직 미국 대통령이 영화에 출연한 적은 없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구하는 내용의 영화에 전직 미국 대통령이 현직 미국 대통령 역으로 나오고, 그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라면 얼마나 재미 있을까?

배경은 트럼프의 임기 종료를 앞둔 시점의 백악관이다. 트위터를 하다 지친 트럼프가 넷플릭스로 영화를 본다. 한국 영화 <백두산>과 <강철비2>이다. 영화를 다 보고 트럼프는 혼자서 욕을 한다. 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 <백두산>은 근육질의 마동석은 과학자로 나와서 커피컵을 볼펜으로 뚫어서 백두산 옆구리를 뚫어야 한다고 하고, 수지는 이유 없이 임산부로 나오고, 이병헌은 이상한 개그나 하고, 가족, 딸 이런 걸로 찔찔거리다가, 백두산 옆구리 뚫은 장면을 영화 <신과 함께>의 컴퓨터그래픽 재탕 같은 것으로 연출하고, 그렇게 한반도를 구한다는, 소재만 백두산 폭발이지 그야말로 뻔하디뻔한 한국 영화이기 때문이다. 팝콘을 씹어먹던 트럼프가 영화 재미없다고, 멍청한 한국놈들 어쩌구 하면서 혼자서 욕을 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어서 비서관을 불러서 물어본다.

“화산이 터지면 어떻게 되지?”

“그 일대가 잿더미가 되겠죠.”

“그건 나도 알고, 그거 말고 또 없어?”

“화산재가 날려서 하늘을 뒤덮겠죠.”

“하늘을 뒤덮으면?”

“햇빛이 안 들어오니까 기온이 내려가겠죠?”

“그렇지? 중국과 북한 접경 지역에 백두산이라고 있대. 백두산이 터지면 기온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아와.”

보좌관은 백두산이 폭발하면 대기 기온이 2도 정도 낮아질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트럼프에게 보고한다. 트럼프는 보고받자마자 NASA로 향한다.

현재 기후 변화는 전-지구적인 위기다. 파리 기후협약은 온도 상승을 섭씨 1.5-2도 이하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백두산이 폭발하면 대기 기온이 2도 정도 낮아진다. 화산이 폭발하면 화산재가 대기를 뒤덮어 대기 중으로 들어오는 태양광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산이 필요하다고 마음대로 터뜨릴 수 있는 것인가? 북한에는 핵무기가 있으니까 북한 핵무기로 백두산 옆구리를 뚫으면 된다. 이렇게 기후 변화와 북한 핵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NASA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트럼프는 보좌관에게 야심찬 구상을 밝힌다. “나는 백두산을 터뜨릴 거야. 기후 변화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 노벨상을 받는 거지. 미국 대통령이 백두산을 핵무기로 터뜨리고 세계를 구하는 장면을 전 세계로 생중계하는 거야. 70억 명이 깊은 인상을 받겠지. 그리고 2024년에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는 거야.”

NASA에 도착한 트럼프는 공화당 성향의 과학자를 불러 모은 다음 자신의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고 협조할 과학자를 구한다.

“가능해?”

“아니요.”

“너 해고! 그 다음! 가능해?”

이런 식으로 자기 계획에 협조할 과학자들을 모은 트럼프는 연방 의회에서 백두산 화산 폭발 구상을 밝히는 연설을 한다. 김정은만 협조하면 지구를 구할 수 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말만 하면 김정은이 말을 안 들을 테니까 군사 행동을 취해야 한다. 트럼프가 트위터로 선전 포고를 한다고 해도 의회에서 승인을 안 해줄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이 부분은 시나리오 작가가 어떻게 해결했다고 치고, 그 다음 장면은 트럼프가 7함대의 루즈벨트호를 타고 북한 원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원산으로 가면서도 트럼프는 계속 트위터를 한다.

“백두산은 터질 것이다.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핵무기를 순순히 내놓아라. 내가 가진 핵무기는 훨씬 많다.”

“지구는 내가 구할 테니 뒷정리는 바이든이 하시기를.”

“문제는 중국 쪽으로 터지느냐, 북한 쪽으로 터지느냐이다.”

당연히 중국에서도 난리를 칠 것이다. 그러면 트럼프는 이렇게 트위터를 할 것이다.

“북한 땅이 좁지만, 중국 땅은 매우 넓다.”

“북한이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중국이 조금 잃는 것이 더 낫다.”

전 세계가 트럼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지만, 트럼프는 루즈벨트호에서 유유히 트위터를 하고, 미국 정부는 얼마 주고 핵무기를 구입해줄지 북한과 협상을 하고,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기네 대통령이 멋지다고 감탄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꾸벅꾸벅 졸고, 한국 민주당은 검찰개혁을 하고, 그러는 와중에 트럼프는 원산에 도착한다.

미국이 생각보다 핵무기값을 잘 쳐줘서 김정은은 기분이 좋아졌다. 김정은은 원산항에 내린 트럼프를 껴안고, 트럼프는 김정은을 사랑한다고 한다. 중국도 결국 미국에 굴복해서 동북 3성 지역의 소개령을 내리고, 백두산은 결국 중국 쪽으로 터진다. 그 와중에도 트럼프는 트위터를 한다. “화산재 때문에 한동안 화웨이 전자제품 불량률이 높아질 겁니다.”

그렇게 지구를 구한 트럼프는 카메라를 향해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보르네오 섬의 오랑우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콩고에 있는 고릴라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빙하 위에 있는 북극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남극에 있는 황제 펭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하여간 각종 멸종 위기종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면서 영화가 끝난다. 정상적인 영화사에서는 이런 영화를 절대로 만들지 않겠지만, <어싸일럼> 같은 데서는 만들 수도 있지 않으려나?

하여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와중에서도, 미국의 의사당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시위대에게 점령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왜 나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까?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 링크: [연합뉴스] 트럼프 지지 시위대 의사당 난입으로 4명 사망, 52명 검거

( www.yna.co.kr/view/AKR20210107103551009 )

(202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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