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30

한국 학생들이 바칼로레아 문제를 푸는 영상을 보고

     

홍세화 선생이 프랑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가 20년 쯤 전이다. 그 당시 한국 사회는 홍세화 선생의 프랑스 이야기를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데 20년이나 지난 지금도 프랑스가 이렇다더라 하는 이야기의 수준은 홍세화 선생이 소개하던 수준을 못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홍세화 선생 같은 사람들이 프랑스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고 하면 후발 주자들은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을 전달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을 것이다. 가령, 이런저런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데 어떤 취지에서 도입되었고 어떤 문제점이 있어서 어떻게 수정되어서 지금은 어떤 식으로 정착되었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프랑스 이야기가 시작된 지 한 세대 가까이 지났으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최근에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프랑스산 담론은 백신 음모론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을 가르친다더라, 주입식 교육을 안 해서 학생들이 저마다 독창적인 생각을 한다더라,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비판정신이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20년은 된 것 같다. 그런데 바칼로레아에서 어떤 문제를 푸는지만 소개되지 실제로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등은 소개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을 가르쳐서 비판적인 사고를 한다면서 왜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백신을 안 맞는다고 하는가?
 
<대학내일>에서 3년 전에 만든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보게 되었다. 수능 본 학생들을 대상으로 바칼로레아를 풀어보게 한 영상이다. 나는 해당 영상에서 한국 학생들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나오고 프랑스 교육이 얼마나 우수한지 찬양하고 한국 교육이 이상하다고 할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학생들이 시험 문제를 받아들고 잠시 약간 당황하기는 했으나 영상에 출연한 네 명 모두 합격점을 받았다. 바칼로레아는 20점 만점에 10점 이상이면 통과인데 학생들은 각각 18점, 15점, 17점, 19.5점을 받았다.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물론, <대학내일> 유튜브 영상에서 학생들이 받은 점수라는 것이 영상에 나오는 학생들끼리 상호채점하는 것이므로 프랑스에서 하듯 채점기준표를 두고 채점한 것과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바칼로레아 문제라는 것도 한두 문장 띡 주고 글 한 편 쓰라는 것이므로, 채점 기준이 있어봐야 촘촘하지는 않을 것이고 아마도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구분하는 최소한의 기준의 역할 정도나 할 것이다. 바칼로레아 합격률도 80%라고 하니 그런 채점 기준이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 의심할 만하다. 심지어 작년 바칼로레아 합격률은 사상 최고치인 95.7%였다고 한다. 아무리 한국 학생들이 한국 교육을 받아 사고력이 썩었다고 하더라도 상호평가에서 각각 18점, 15점, 17점, 19.5점을 받은 학생들이 프랑스 기준으로 채점했을 때 10점 밑으로 떨어질까?
 
이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아마도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정말 한국식 교육이 학생들의 사고력에 악영향을 미치느냐는 것이다.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상태가 좀 안 좋다고 하자. 그게 머리가 좋은 애들이 한국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멍청해진 것인가, 아니면 원래 어중간한 애들이 어중간한 교육을 받고 어중간한 것인가? 주입식 교육 받아서 비판적 사고를 못 한다는데 왜 바칼로레아 기출문제를 푼 학생들은 모두 합격점을 받는가? 두 번째는 프랑스식 교육이 정말 학생들의 사고력을 키워주느냐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니 프랑스에서 중등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모른다. 다만, 한국에서 프랑스 가지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말하는 몇몇 요소들이 그렇게 유의미한지는 따져볼 수 있을 것 같다.
 
바칼로레아 가지고 호들갑 떨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호들갑 떨었는지를 돌이켜보자. 그들은 프랑스의 중등교육 과정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는 말하지 않고 바칼로레아에 나오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 것처럼 말했다. 가령, “할 권리가 있는 모든 행위들은 정당한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본 학생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학생이 어떻게 같겠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물음은 “그래서 뭐가 다른데요?”이다.
 
“할 권리가 있는 모든 행위들은 정당한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고등학생 수준의 답변도 가능할 것이고, 학부생 수준의 답변도 가능할 것이고, 박사급 이상의 답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식 교육을 받지도 않은 한국 고등학생들이 풀고도 합격점이 나온다면, 반대로 프랑스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수준이 그렇게 높은 것인지, 자유-평등-박애가 찔찔 흘러넘치게 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교육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바칼로레아에 출제되는 문제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할 권리가 있는 모든 행위들은 정당한가?” 같은 질문에 어쩌다 생각해볼 수도 있고 안 해볼 수도 있지 그까짓 것을 한 번 생각해본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그런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경험이라고 마치 유년기 첫사랑의 추억인양 소중하게 여기는지 모르겠다. 어떤 것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든지, 어떤 문제를 탐구하여 성과를 얻었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문제를 고민해보았다는 것 가지고 그렇게 애틋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수성이 독특한 사람들로밖에 안 보인다.
 
  
* 링크: [대학내일] 프랑스의 수능, 바칼로레아를 풀어봤다
  
  
(202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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