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동네에 건물을 짓다가 만 곳이 있다. 무슨 대학원대학교라고 하는데, 건물 한 채는 멀쩡히 다 지었는데 그 근처에 있는 건물은 짓다 말았다. 짓다 만 지가 오래되었는지 건물 외벽에는 붙은 글씨는 ‘안전제일’이 아니라 ‘안일’이라고 되어 있다. 건물 상태를 보니 조금 안일해보이기는 하다.
왜 건물을 안 짓는지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동네 사람의 말로는, 한참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는데 건물 부지에 어떤 사람의 사유지 100평 정도가 들어간 것이 문제가 되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사유지 주인이 소송을 걸었고 결국 이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아마 건물 주인은 소송까지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수로 사유지가 건축 부지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즈음은 GPS를 이용해서 토지를 측량하기 때문에 오차가 몇 센티도 나지 않는다. 위성 사진을 이용하면, 지적도와 실제 토지 사용 현황이 어떻게 다른지도 쉽게 알 수 있다. 동네 업자도 아니고 꽤 큰 건물을 짓는 업체가 실수로 남의 사유지를 침범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종의 고의성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건물주는 사유지 주인이 토지 침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장 일을 하는 친구가 나에게, 시골 살면 사람들이 무시한다, 더러워서 못 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격지심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시골에 살면 정말 무시 받는 일이 생긴다. 몇 주 전에 어머니는 면사무소에 공문서 발급받으러 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공문서를 발급받으려고 서류를 작성하려고 하는데 어떤 공무원이 오더니 서류 작성을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됐다고 하는데도 공무원은 거듭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서류라는 게 세무 관련된 것도 아니고 이름, 주민번호, 집 주소 쓰는 정도였다. 어머니가 들은 체도 안 하고 서류를 작성하니까 공무원이 무안한지 어디로 갔다고 한다. 예전에 내 친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무슨 고시 붙은 놈이 무시해도 짜증날 텐데 말단 공무원이 무시한다니까?”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동네에 물류창고가 들어오려고 하면서 분쟁을 겪고 있다. 업체에서는 농어촌공사의 허가를 받았으니 농어촌공사 소유인 농로에 빗물관을 묻겠다고 한다. 이미 일부를 우리 밭 근처에 이미 묻었다. 우리 땅 중간으로 농로가 관통하는데 우리한테는 알리거나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어느 날 갑자기 관을 파묻은 것이다. 옆집에서도 난리가 났고 자기 돈을 들여서 행정사를 사겠다고 했다. 옆집 할머니의 며느리가 공무원이라서 잘 아는 행정사가 있다고 했다.
며칠 후 행정사를 만나러 옆집에 갔다. 행정사는 옆집 며느리의 직장 상관이었던 퇴직 공무원이었다. 공무원하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영업이 잘 된다고 한다. 행정사 세계에도 전관예우 같은 게 있다나 어쩐다나. 하여간 행정사가 하는 이야기를 죽 듣는데 이상했다. 업체가 개수작 못하게 하려고 행정사를 부른 줄 알았는데, 행정사는 이번 참에 농로를 확장해서 정식 도로로 만들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옆집 아저씨가 운을 띄우기는 했다. 업체가 관을 묻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도로를 포장해달라고 하자고, 도로 포장 비용이 많이 드니 협상이 결렬되어서 공사를 못하게 될 거라고 아저씨는 말했다. 물류창고 건설 비용에 비한다면 도로 포장 비용은 얼마 안 들 텐데 그런 조건으로 협상이 결렬되나? 행정사의 말을 들으니 뭔지 알 것 같았다. 옆집 아저씨의 속셈은 건설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도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행정사가 하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농로는 폭이 3미터인데 정식 도로가 되려면 폭이 6미터는 되어야 한다, 우리집에서 땅을 내놓으면 도로가 생긴다, 도로가 생기면 도로 주변의 땅값이 오른다고 행정사가 말했다. 땅을 어디에 내놓는가? 행정사는 말했다. “시에 기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땅을 나라에 갖다 바치고 도로를 내라는 말이다. 우리집에서 도로 부지를 내놓고 업체에서 도로 포장을 하면, 옆집 아저씨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도로를 얻게 된다.
옆집 아저씨의 속셈을 다 알았으니 행정사의 말을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 표정이 안 좋았다. 내가 땅을 시에 내놓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도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어머니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행정사에게 물었다. “행정 소송 같은 걸로 공사가 취소될 수는 없나요?” 행정사는 말했다. “행정 소송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구요, 소송에서 져서 돈 물어내다 망한 동네도 많아요.” 이런 사기꾼 새끼를 봤나. 나는 공사 잘못하다 업체가 망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동네가 소송 잘못해서 망한 이야기는 못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 그런 경우가 있나요?” 하면서 계속 들었다.
어머니는 측량한 걸 보니 업체에서 우리 땅을 침범했다고 하자, 행정사는 심하면 오차가 5미터도 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오차가 5미터가 난다니, 이승만 정권 때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땅을 내놓으면 남은 땅의 가격이 오른다고 해도 우리는 땅이 줄어들지 않느냐, 다른 사람만 좋은 일 아니냐고 어머니가 말하자, 행정사는 “원래 윗논에 물이 차면 아랫논까지 다 물이 가게 되는 것”이라면서 “도로 만들어서 땅값이 올라가면 자식한테도 좋은 일이니 자식 생각해서 잘 판단하시라”고 했다.
당시 나는 밭에서 일하던 대로 옆집에 간 것이었다. 행정사의 눈에 어머니는 당연히 시골 아줌마로 보였을 것이고, 나도 백수 아니면 농부로 보였을 것이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젊은 놈이 공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집에 이러고 있으니 고등학교나 겨우 졸업했나 싶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행정사에게 상담받았다면 그 정도로 개뻥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시골 사람들이 대체로 도시 사람들보다 상황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하다. 원래 머리가 나쁜 사람도 있고, 머리가 나쁘지 않은데 교육을 못 받은 경우도 있고,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교육을 못 받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약해서 대처를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 중에서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내용 증명만 받아도 마치 곧 감옥에 가거나 거액의 벌금을 물어내고 파산할 것처럼 두려워하기도 한다. 우리동네 이장 아저씨만 봐도 그렇다. 건설 업체들은 이를 이용해서 시골에서 하는 공사를 수월하게 진행하는지도 모르겠다. 내용 증명만 보내도 시골 사람들은 큰일 났다고 하고 업체에 먼저 연락을 할 테니까. 고발한다고 어르고 동네 발전기금 준다면서 달래면 순진한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 대학원대학교에서도 안일하게 생각했지 않았을까. 사유지를 사든지, 사유지를 침범하지 않게 설계 변경하든지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한 것은 그만큼 시골 사람들을 우습게 봐서 그런 것은 아닌가. 야산이니까 땅 주인이 자기 땅 침범당한 줄도 모르겠지, 침범당한 걸 알아도 어르고 달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시골에 멍청하거나 무식하거나 쓸데없이 착한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가끔씩은 멍청하지도 않고 무식하지도 않으면서 착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 동네 기준으로, 길에 인접한 토지는 평당 70만 원, 그렇지 않은 토지는 평당 30만 원, 절대농지는 평당 20만 원에 거래된다. 해당 토지가 100평 남짓이니 사유지의 주인이 평당 100만 원을 불렀다고 해도 1억 원이고 평당 200만 원을 불렀다고 해도 2억 원이다. 그 돈을 아끼려고 그랬는지 시골 사람을 우습게 봐서 그랬는지 둘 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그러한 안일한 태도 때문에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시골 사람 무시하다 사업에 차질을 겪는 것도 어찌 보면 인생의 좋은 경험일 수는 있겠다.
(20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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